한국 SF 팬덤의 역사는 일천하다. pc 통신이 pc통신 인터넷 사이트를 낳고, pc통신 인터넷 사이트가 다시 웹진과 커뮤니티를 낳고, 웹진과 커뮤니티가 다시 카페와 블로그들을 낳고, 카페와 블로그들이… 카페와 블로그들이… 끝.

…끝? 애초에 SF는 영화나 게임으로라도 마이너한 편이고(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은 빼고), SF소설은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한 취향이라 팬들이라고 해봐야 항상 그 밥에 그 나물이었다. pc 통신 시절을 예로 들자면 많은 팬들이 하나 이상의 동호회에 가입해 있었고, 따라서 계보고 뭐고 언급할 상황이 아니다. 남아 있는 자료도 제한적이지만 그러나, pc 통신부터 트위터로 대표되는 오늘날까지 온라인에서 SF 팬들이 주로 뭉쳐다닌 발자취는 한 번 쯤 정리해볼 만 하지 않을까.

1. 태초에 pc 통신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사설 bbs는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전국의 SF 팬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4대 통신망 시절. 99년 5월 24일, SF컨벤션(2000.2.) 준비 작업의 일환으로 서울도서전에 부스를 열었던 SF도서전(1999.6.)의 참고자료 팜플렛에 따르면 SF 관련 국내 pc통신 동호회의 종류와 역사는 아래와 같다 :

가. 천리안, ‘멋진 신세계’ (go bnw) : 국내 통신망의 SF 동호회로서는 최초로 1989년 9월 설립. 동명의 SF 번역모임을 통해 고려원 미디어에서 {시간여행SF걸작선}과 {코믹SF걸작선} 등을 번역, 출간했다. (여성사의 {세계여성소설걸작선}도 ‘멋진 신세계’ 옮김으로 되어 있는데, 시종일관 하이텔 번역 모임이라고 나와 있다. 사정을 아시는 분은 답글 좀?) SF 직지프로젝트의 정상돈 씨도 ‘멋진 신세계’ 소속으로 소개되어 있다.

나. 하이텔, ‘과학소설 동호회’ (go sf) : 통칭 ‘과소동’. 1992년 6월 발족. 최용준, 박상준 등의 이름이 팜플렛의 SF 컨벤션 운영위원 명단에서 보인다. SF 영화제의 모태라 할 수도 있을 박상준 씨의 SF 영화 연구회 역시 하이텔 소모임이었다.

다. 나우누리, ‘SF2019’ (go sf2019) : 1994년 7월 개설. SF 팬덤 전체와 관련해서 설명할 만한 내용은 별로 없다. (안습이다) 한 회원이 90년대 후반에 이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5권을 절반 이상 번역하기도 했지만 전체 팬덤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듯. 그야말로 정말 안습.

라. 유니텔, ‘SF Odyssey’ (go sf) : 1998년 12월 개설. 고장원 씨 정도가 동호회 결성의 ‘결정적 동기’를 제공한 회원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쪽도 안습? 그러나 2000년 5월 동란의 진원지ㅡ’탄핵’이란 단어의 실례를 찾아보려면 이 케이스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ㅡ가 바로 여기였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고 할 원시공산주의에덴 시대. 노스텔지어 때문에 미화된 것도 있겠지만, pc통신의 특성상 이후 인터넷 시대에 비해 찌질이들의 출몰 빈도가 적었고, 크든 작든 어슷비슷한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오순도순 모여 앉아 재잘거리는 재미가 있던 시절이었다. 외로움과 쓸쓸함에서 빠져나와 나 말고도 SF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네? 놀라고 기뻐하며, 이러저러한 텍스트 위주의 저용량 자료들을 보물처럼 모아들이고 아낌없이 나누었던 시절. 크고 멀게는 90년대 특유의 대중 문화의 위상 재정립과도 연관되겠지만, ‘애들이나 보는 공상과학물’이라는 편견에 대해 ‘과학소설은 바보들이 읽는 것이 아니다. 가장 형편 없는 과학소설조차도 격렬한 지적 참여를 요구한다'(올슨 스콧 카드, {세계 휴먼 SF 걸작선}(홍인기 편역, 1994, 도솔)로부터 재인용)는 선언이 터져나오던 시절. 그러나 그 시절은 90년대 말,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끝난다.

2. 대항해시대인터넷 시대

pc통신 업체들이 인터넷 접속 서비스도 제공하기 시작하다가, 슬슬 인터넷 기반으로 바꾸다가, 그냥 그렇게 묻히던 시기. ‘이야기’나 ‘새롬 데이터맨 프로’보다 ‘넷스케이프’나 ‘익스플로러’를 켜기 시작하던 시절. 프리챌 등이 잠시 떠올랐던 시기. 아직  다음이나 네이버가 천하를 이분하기 직전, 디지털 카메라가 인터넷과 결합되기 바로 직전, pc통신망을 벗어난 SF 팬들이 모이기 시작한 장소를 꼽아보자면ㅡ

가. 정크SF (www.junksf.net 물론 링크해봤자 이젠 없다. -_- ) : 대략 2000년 전후로 존속했던 SF 커뮤니티 사이트. 편집두목은 고경환 씨, 구호는 “이곳은 SF 업계의 쓰레기 전문 취급 싸이트입니다. 쓰레기는 반드시 분리수거 해 주십시오.”. 로고는 천지창조와 ET를 패러디한, 가운데 손가락의 불경스런 움직임이었다.

 

이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pc통신의 에덴 시절을 청산하고 본격 하드-리얼리즘-버라이어티-카인과 아벨쇼를 표방하고 나섰다. (기억하십니까, 추억의 그 코너ㅡ’Lagrangian point’와 ‘칼잡이들’, ‘용병창작단’ ‘돗대기 시장’ 등등? )

위악스러운 컨셉에도 불구하고 퀄리티 면에서 SF팬덤이 꽃피웠던 마지막 불꽃, 벨 에포크로 기억한다. 지금의 네임드들이 마치 뉴비처럼 촐랑거렸던 시절.  ‘happysf.net’에 ‘겉저리’가 있듯이 여기에도 ‘은조정준銀鳥.鄭俊’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pc통신 동호회와 이후 인터넷 사이트들의 과도기 정도였다. 많은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고, 보기 좋지 않은 일들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안 좋은 일들이 전적으로 정크SF 때문은 아니었으며, 분란의 씨앗은 4대 동호회가 SF컨벤션을 계기로 합쳐지며 뿌려질 수 밖에 없었고, 정크SF는 그 토양이었을 뿐이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SF계의 디시인사이드.

나. 월간 SF 웹진 (http://www.bawi.org/~sfwebzin 아마도?) : 99년 10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유지되었던 웹진. 연재 기사와 기고 기사, SF 동호회 소식, 국내 SF 소식, 해외 SF 소식, 비평 및 감상, 영화와 만화 등의 코너를 갖추고 게시판을 유지하여 일종의 커뮤니티 역할까지 담당했다.

(참고 : 종간호 고별사 다시 보기)

다. SF를 좋아하는 이들의 느긋한 오후(사이트도 없었던 순수 오프라인 모임) : pc통신 시절 막바지에 각 동호회들의 느슨한 연합을 도모했던 모임. 제목 그대로 무리한 의욕없이 여유로운 모임이었고, 특이하게도 듀나가 SF 관련 퀴즈를 진행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들은 기억이 있다.

(참고 : 첫 공지 다시 보기)

라. SF Readers (www.sfreaders.org 역시나 클릭해봤자..) : 추억하기에는 이른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올 기약이 희미하기에 추가한다. 박종대씨가 운영하는/했던 wiki 사이트.


주로 작가와 서브장르, 관련 용어 위주의 표제어로 정리되었으며, ‘새책소식’과 ‘팬덤소식’ 코너는 이 사이트를 단순히 아카이브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뉴스 미디어가 될 수 있도록했다. 특히 ‘새책소식’은 SF 뿐만 아니라 판타지 등 인접 장르까지 포괄하여 인기를 끌었다. (자신의 환협지를 홍보하려고 귀 모씨가 찌질거리는 등 부작용도 있었지만) 계속되는 스팸 공격 때문에 폐쇄(2006.12?)된 이래 새로운 엔진을 단 리뉴얼 소식이 들려온 적도 있었지만 언제 부활할지는 알 수 없다.

3. 소녀 시대팬덤 시대

팬덤이란 단어는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김상훈 씨가 국내에 처음 소개했으며 SF 리더스 위키에 표제어로 등장하며 보편화된 것으로 기억하는데(상당 시간 동안 fan과 kingdom의 합성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특히) SF를 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집합명사 이외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듯. (예 : “제임스 블리쉬의 우주 도시 2권 을 찼는대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1권이랑 교환하실 팬덤 계신가요?”) ‘사변소설’이랑 ‘팬덤’이랑 ‘경이감’이라는 단어를 남용하는 사람은 일단 주의하자. 하여간 정크SF와 SF리더스 이후의 현재 운영 중인 SF 관련 커뮤니티들을 정리하자면,

가. 행복한 책읽기 출판사 홈페이지 (http://happysf.net/) : 2003년 3월 26일에 개장한 출판사 홈페이지.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창작/투고란을 운영하면서 전문(?) 비평 위원을 초빙하기도 했고, SF 칼럼란에 김상훈 씨의 공개/미공개 칼럼들을 올리기도 하며 일개 출판사 홈페이지가 아니라 ‘정크SF’ 이후 팬덤 포털을 표방하고 나섰는데, 결국 일정 정도 이상 커뮤니티로의 정착에는 성공한 듯 하다. 대개 SF를 읽기 시작한 것이 오래지 않은 사람들이 주요 구성원으로, 올드 팬들에 대한 컴플렉스의 발로인지 심심할 때마다 키보드 배틀이 벌어지기도 하며, SF리더스의 폐장 이후로는 SF 관련 신간 소식들이 비교적 빠르게 올라오고 있다.

나. JOY SF 사이트 (http://www.joysf.com/) : ‘표도기의 스타워즈 유니버스’라는 개인 홈페이지에서 ‘SF WAR CLUB’이라는 이름을 거쳐 현재에 이른 SF 영화/게임/만화 커뮤니티.  ‘SF 파티’나 컨벤션을 개최하기도 했고 회지를 발간하기도 하는 등 온라인 / 오프라인 활동이 활발하다. 단, 이용자들의 수준은 대개 이족 보행 로봇과 우주 전함, 광선검에 대한 관심에 머무르는 편.

다. SF 카페 안드로메다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sfreview) : 고장원 씨의 개인 카페. 본인의 국내외 SF 리뷰 및 해외 리뷰, 토막 기사들의 번역 위주의 조용한 커뮤니티로, 최근 고장원 씨는 블로그에 집중하려는 듯 카페 매니저를 다른 회원에게 넘겼다. 과연 1인 커뮤니티의 세대 교체는 가능할까?

라. 디시인사이드 판타지 갤러리 (http://gall.dcinside.com/list.php?id=fantasy) : 장르 판타지의 잉여 독자들의 집합소. 라이트 노벨이나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대한 이야기와 곁들여 국내외 SF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올라온다. 국내 작가로는 초기에 배명훈 씨를 밀다가 요즘은 김보영 씨로 지지가 기운 듯.

그러나 아직까지 SF에 대한 들을 만한 이야기가 올라오는 곳은 개인 블로그들이다. 작가와 번역자, 리뷰어 등의 블로그들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최근에 출간된/출간될 신작에 대한 정보나 감상, 코멘트들을 흘려 보내고 있는데, 개별 팬들의 활동은 본 기사의 주제와 다소 벗어난 방향이기에 여기서 일단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