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다시 담론의 정글

…지난 호 줄거리…는 아니지만, 다음 호 예고편이었던 항목 하.는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하. SF는 S+F다.

‘과학소설은 과학 더하기 소설이다’라는 것은 말장난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존에 국내에 수차례 소개되었던 수많은 SF의 정의들을 거친 체에 쳤을 때 위에 남는 가장 소박한 알맹이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요. SF가 어떤 식으로든 과학과 관련이 있으며, 소설의 한 갈래라는 것만큼은 대개들 동의하는 바일 것입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어떤 과학이 소설 장르와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는지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예의 그 수많은 정의들이 난무합니다만…

일단 지난 호에 소개한 가.부터 하.까지의 담론들을 정리해봅시다. 크게 쾌락설과 교훈설, 그리고 우등론과 열등론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차. SF는 사변소설이다’와 ‘하. SF는 SF다’는 우열이나 효용으로 나눌 수 없으니 뺐습니다.)

…어쨌든 그럼 계속해서 섬 안쪽으로 들어가 봅시다…

 

 

4. 해설의 구릉

…담론의 정글이 정글이라기엔 좀 뭣한 규모였듯이, 그 속에는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은, 언덕치곤 좀 높은 구릉 지대가 나름대로 그럭저럭 솟아 있습니다…

a. 멋진 신세계(박상준 엮음) 1992.09.20(현대정보문화사)

그런데 아직까지는 SF의 미개척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에 독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안목을 높여줄 안내서 하나 없는 실정이어서, 엮은이는 나름대로 입문서에 해당될 만한 책을 한 권 집필하고자 별러왔지만 아직은 아는 것도 부족하고 시간적인 여유도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3쪽) 

일본 고단샤에서 1986년에 펴낸 {Key Person, Key Book}(石原藤夫, 金子降一 지음)을 저본으로 휴고 건즈백 이전의 SF약사를 서술한 제1장을 덧붙이고 하드 SF에 치우친 관점을 보완하기 위해 본문 곳곳에 박스형 기사를 넣은 SF 해설서입니다. 원제 그대로, 시대별 주요 작가와 주요 작품들을 소개 정리한 책이라 전반적으로 90년대 초중반에 많이 나오던 대중문화 소개서들ㅡ예를 들어 ‘열려라 비디오 ㅇㅇㅇ’시리즈들과 비슷한 느낌이죠. 그 시절 대중문화 소개서들이 그렇듯이, 작품 자체보다 소개평이 먼저 들어온 케이스. 전반적으로 한국 SF계의 표준 모델, ‘SF는 SF다’에 가장 충실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이쪽이 바로 그 담론의 시초랄지, 하여간 그런 책입니다. 

 

b. SF의 이해(로버트 스콜즈, 에릭 라프킨 지음) 1992.3.10(평민사)

지난 1세기 반동안 SF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은 인류를 위한 현대적 양심을 창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이 분야의 많은 작가들 역시 문학적이기는커녕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시시하고 단명한 작품들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을 쓰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 이 분야에서 많이 나와 현재의 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대문학의 한 경향으로서 연구 대상으로 삼아 마땅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SF의 어떤 요소들은 이 문학형식 특유의 것이어서 특별한 취급을 요한다는 것도 역시 인식하고 있다. (5쪽)

국내 SF 안내서/해설서들의 종조宗祖라 할 문예비평서입니다. 이런 이야기하기는 싫지만, (문예비평에 대한)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일지, (문화적인 의미에서) 본토와 변방의 차이일지, 처음 십여 쪽만 읽어보아도 여타의 다른 책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여명기 SF의 4대 교부들ㅡ애드거 앨런 포우, 쥴 베른, 에드워드 벨라미, 에드거 버로우즈, 그리고 웰즈와 스테이플든, 카렐 차펙들을 지나 휴고 건스백, 켐벨을 찍고 이른바 (미국) SF 황금기의 빅3를 거쳐 50년대 이후로 필립 딕과 르귄 등을 조명하고 최신 사조로 뉴웨이브를 소개하는 제1부 SF 소사小史의 비평적 안목도 안목이거니와 물리학, 천문학, 컴퓨터공학, 생물학, 열역학 등 다양한 과학 분야와 그에 관련된 SF들을 소개하는 2부, SF의 형식과 주제를 고찰하고 10대 걸작들을 정리한 3부가 단순히 외부의 시선-주류 문예비평의 테두리를 넘어 SF팬들이 충분히 읽고 즐길 수 있게 한다는 점은, 팬덤 안의 담론과 정보들을 마치 자기들만의 새로운 것인양 앵무새처럼 주절거리는데 그치고 있는 국내 주류문단 비평계 일부 작자들의 한심한 작태를 생각하면 정말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c. 과학 소설이란 무엇인가(대중문학연구회 지음) 2000.02.15(국학자료원) 

게다가 처음  의도했던 바와 달리 원론 부분을 쓰기로 한 사람들이 원고를 쓰지 못했고, 각론에 참여하기로 한 사람들도 글을 완성시키지 못한 이가 많았다. 그 바람에 우리가 처음 기획했던 내용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책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 회원들의 역량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 학계에서 과학소설에 대한 논의가 화랍ㄹ하지 못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쪽)

대중문학연구회지 5집입니다. 고상하신 교수님들이 무슨 비천한 대중소설 나부랭이에 관심을 가져주시는지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고, 관심씩이나 가져주셔서 대단히 황공무지로소이니까 그냥 감사하고 넘어갈……수는 없죠. 총론에 해당하는 ‘과학소설의 전반적 이해’는 {SF의 이해}를 베이스로 김성곤, 복거일 등의 글을 짜깁기한, 학부생 레포트 스타일의 글입니다. 이어지는 두 편의 해외 평론 번역은, 하나는 이론서 서문스럽게 짧고, 다른 하나는 동구권 문학에 관심이 있는 프랑스 문학자의 글로, 프랑크 허버트를 ‘에르베’라고 번역하지를 않나, 미국 SF 작품들 제목이 전부 불어로 소개되지를 않나 참으로 재미있는 글입니다. 그나마 읽을 만 한 건 ‘서양 과학소설의 국내 수용 과정에 대하여’와 ‘한국 과학소설의 현황’인데, 전자는 일차적인 서지 사항에만 너무 치우쳤고ㅡ그렇다고 생각해볼 거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후자는 주석에서 밝히는 바ㅡhttp://kail.semtlent.co.kr/sf/arc 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ㅡSF 독자들 사이에 상식처럼 돌던 그저 그런 이야기의 반복 재생에 불과합니다. 이후로는 {철세계}, {완전사회}, {파란 달 아래} 등 한국 SF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들에 대한 개별 평론들인데, SF가 뭔지 잘 모르니 애초에 SF 평론은 될 수 없고, 그렇다고 본격적인 문예 비평도 할 줄 모르는 건지 안 한 건지 애매한 글들입니다. 전반적으로 상아탑 교수님하들이 하위 문화를 만만하게 보고 덤비면 어떤 꼬라지가 되는 지 잘 보여주는 예랄까요.

 

d. SF 부족들의 새로운 문학 혁명, SF의 탄생과 비상(임종기 지음) 2004.05.28(책세상)

이 책에서는 SF에 대한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하기 위해 SF 문학의 태동부터 현재에 이르는 진화 과정과 주요 주제를 탐색해보려 한다. 이 탐색 과정 소에서 SF만이 갖는 독특한 비전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8쪽)

{SF의 이해}를 베이스로 (당시까지만 해도 지겹게 유행 중이었던) 포스트모던 철학의 관점을 가미한 칵테일입니다. 올드팬들에게는 쓸 만한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고, 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작품들을 ‘출발! 비디오 여행’식으로 줄거리 요약 해대는 것이 (팬덤 일각에서 그렇게 못 모아서 안달인) 초보자-입문자용 안내서ㅡ를 빙자해서 ‘SF 안 읽고 읽은 척 하기’에 특화된 요약집이랄까요. 그래도 {SF의 이해}가 절판된 지 오래이니, 저자의 관점을 적절히 가감해서 읽는다면 요즘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가이드북으로서는 괜찮을 것입니다.

 

e. 과학소설 전문무크 창간호 HAPPY SF 01 2004.09.17(행복한 책읽기)

과학소설을 소개하는 잡지로는 처음 시도되는 까닭에 보람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아쉬움도 남는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들은 보다 다양한 스펙트럼과 보다 깊이 있는 기획들로 채워질 다음 호를 위한 자양분으로 가슴 속에 묻으며 창간의 인사를 대신한다. (5쪽)

SF 총서 출판사를 표방하고 나선 행복한 책읽기에서 야심차게 냈던 무크지입니다. 그러나 결과물은 불행하게도, 이후 {월간 판타스틱}이 수 년 동안 충실히 질리도록 보여준 삽질의 예고편이랄까요.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골고루 건드려보고 찔러보고 다닌 난장판입니다. 장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장르판에 우쭐거리며 들어왔을 때의 참극이지요. 팬덤 내부 인사인 김상훈 씨와 홍인기 씨의 칼럼들이 그나마 쓸 만하고ㅡ그 중에서도 볼 만한 건 역시 홍인기 씨의 독설. 김상훈 씨의 칼럼은 그동안 그리폰 북스 시리즈들의 권말 해설 등을 통해서 소개했던 해외 SF관의 소개에 주류문단에게나 먹히는 슬립스트립 떡밥을 두리뭉술하게 버무려 별로 새로운 맛이 없습니다. 구광본 씨의 칼럼은 팬덤 바깥의 시시한 헛소리ㅡ게다가 SF보다는 환상문학에 초점을 맞췄죠, 왜냐면 SF는 뭔지 잘 모르겠걸랑,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특집1의 압권은 좌담회인데, 아마도 밥 한 끼를 미끼로 불러모은 듯 팬덤에 이름 좀 알려진 사람들을 모아다가 ‘동무들, 금일자로 하달된, SF가 주류문학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당의 새 강령을 전적으로 지지하씨요!’ 하듯이 무작정 선동해대는 꼴이 아주 볼 만 합니다. (당연히 사람들 반응은 ‘사주시는 밥을 먹고 있는 시점에서 차마 웬 개소리시냐고는 직접 말씀드리기가 힘드니 참으로 난처하군요.’ 정도입니다. 아, 언제 한 번 달 잡아서 특집으로 좌담회 기록 전체를 한 줄 한 줄 철저하게 까보는 것도 재미있겠군요) 특집2의 테드 창 관련 내용은 특별히 트집 잡을 구석은 없습니다. 다만 특정 출판사에서 특정 해외 작가에 대해 의도적으로 붐을 조성하고 일정 기간 이상 관련 담론을 장악하는 것은, 열린책들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선례를 생각해볼 때 원천적으로 경계해야할 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요. SF 영화 관련 칼럼들은 alt. SF에서는 논할 대상이 아니고(아, 그래도 제발 순수하게 SF 소설만 이야기하는 건 대한민국에서는 그렇게 힘든 걸까요?), 창작 SF란의 (듀나를 제외한) 자칭 창작 SF들은 참, 이것들도 씹어보면 재밌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긴 합니다만 그러기엔 바이트가 아깝죠. SF 독자를 위한 가이드는 정말 이 책이 저지른 죄악 가운데에서도 최악입니다. SF 독자들을 초/중/고급자로 나누는 꼬라지를 보세요. 헌책방이나 중고책 사이트 빌빌거리며 돌아다녀서 쓸데없이 가격 올린 헌책들 모아다가 레벨 업하라고 부추기기는. 철 지난 SF들 비싼 돈 들여 많이만 모으면 참 고급 팬님들이 벌떡벌떡 되시겠습니다?

 

f. 과학소설 전문무크 창간호 HAPPY SF 02 2004.09.17(행복한 책읽기)

출판 불황, 무크지 판매총액이 고료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고 좁은 SF 시장, 한정되고 중복되는 필진……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은 많지만 그래도 {Happy SF}는 반드시 제3호를 낼 것이다. 4호도 내고 5호도 낼 것이다. 꾸준히, 끈질기게, 악착같이…… .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아서 강해질 것이다. (5쪽)

취미 산업에 지사 정신 열사 정신 같은 거 가지고 덤비는 건 아무래도 좀 우습죠. 지난 호에 쏟아진 비난을 좀 의식했는지, 창작란과 작가특집을 전면에 내세우고, SF가 문단을 구원할 거야 같은 헛소리는 많이 집어치웠습니다만, 창작란은 양에 비해서 질적으로 빈약하고, (감동적인 작품인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중편은 고장원 씨 말대로 SF 성분이 많이 부족합니다. 이전 호의 테드 창 특집과 여러 모로 비교되는 것이, 테드 창 특집은 곧 출간될 단편집을 무크지 창간호라는 주목 받는 무대를 통해 홍보하느라 콘텐츠가 깊고 넓었다면, 부졸드 특집은 이미 출간된 장편소설로 주목 받은 작가의 중편을 통해 ‘고료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의 판매량을 보이는 무크지 2호를 좀 팔아보는 게 목적이라 짤막한 작가 소개에 중편 하나가 전부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무크지는 그냥 행복한책읽기 출판사의 홍보물인지도 모르겠군요. 박하영 씨의 05-06년 출간 SF ‘리뷰’는 한 권 한 권 나올 때마다 사읽는 SF 독자들 입장에선 전혀 쓸모없는, 낡은 뉴스 모음이고,  전홍식 씨의 게임 리뷰는 그냥 게임 잡지에 실리는 게 딱ㅡ아니, 생각해보니 새로울 거 하나 없고 깊이 같은 건 애초에 찾아볼 수 없는 이 무크지에 딱 어울리는 수준이긴 하군요, 고장원 씨의 북한 SF 관련 칼럼이 거의 유일무이하게 볼 만한 수준이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부스러기 글들은 언급하는 게 의미 없어 보입니다(같은 고장원 씨 글이지만 ‘과학소설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고장원 씨가 알려주겠다니 실소를 금할 수가 없군요)… 마지막으로는 무려 앞표지에 ‘600매 전재’라고 자랑스럽게 써 붙여놓은 국내 출간 SF 목록이 이어지는데, 서지학적인 가치는 인정하지만, 동시에 이 무크지 혹은 행복한 책읽기 출판사 전체의 실패를 인정하는 비석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ㅡ그러니까, 신규 독자층을 새로운 담론의 생성 발전을 통해 신간 SF 구매로 이끄는 대신 기존에 팬덤에 축적되어 있던 담론을 편의대로 과장해서 구간 헌책들의 소비로 빠져버리게 했을 뿐이라는?

 

g. SF의 법칙(고장원 지음) 2008.05.25(살림)

이에 필자는 이글에서 과학소설의 정체성을 정의함과 아울러 과학소설이라면 일반적으로 지켜야 할 규칙들을 차례로 살펴봄으로써 일차적으로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의 과학소설계 일각에서 노력해온 과학소설 시장 확산을 위한 계몽작업을 계승하고자 한다. (17쪽)

살림지식총서로 출간된 소책자입니다. 제목 그대로 SF의 정의와 특성을 아홉 개의 항목으로 정리해서 SF의 특성과 함께 주요 작품과 간략한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아홉 개의 항목의 내용들은 SF 독자들의 일반적인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SF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그래서 오해와 편견을 가진 일반인들이 SF에 대한 시각을 교정하는 데 무난해 보입니다.

…그 밖에 몇 권 더 있습니다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루기로 하고… 월간/계간/월간/웹진 ‘판타스틱’의 SF계에서의 의의 등도 다음에 언제 한 번 특집으로 조명해 보죠.  

 

 

5. 칼럼의 동산

…해설의 구릉 한가운데, 섬 최중앙에는 보통 사람은 쳐다보지도 못할 준엄한 평론가들의 산맥이 있……다면 참 든든하고 좋겠지만 현실은 언제나… 

一. 전도사 박상준

시공사 그리폰 북스를 기점으로 한국 SF가 2차 팽창을 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90년대 중반 이전까지 한국 SF의 진흥을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개척자입니다. 현재 한국 SF 팬덤 내외에 정립된 SF 담론의 태반은 SF 해설가 박상준 씨의 수많은 칼럼과 서문, 권말 해설들로부터 나온 것들이죠. 팬덤 바깥에 대한 영향력도 커서, 판타스틱 초대 편집장, 임프린트 오멜라스 대표, 2010국제SF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굵직굵직한 타이틀만도 몇 개나 됩니다. (오래 못 가서 그렇지) 심지어 클론까지 만들어 모 공대 인문학교수로 위장해서 SF에 대해 썰을 푸는 02호와 모 과학전문출판사 대표로 위장취업해서 SF를 배후지원하는 03호를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심하면 썰렁하니까 이 쯤 합시다.

해설가 혹은 평론가로서 박상준 씨에 대한 일각의 비판은, 그리폰북스 1기의 라인업에서 클래식한 작품들이 모두 박상준 씨의 선정이었다는 것이라든지, 오멜라스에서 낸 SF들이 대개 70년대 이전 올드 SF들이었다는 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고전적인 취향ㅡ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는 걸로 알지만, 아서 클라크가 아마도 가장 그 취향에 부합하는 작가가 아닐까요ㅡ이나, 그다지 눈에 띄는 변화나 발전이 없는 국내 SF 담론 환경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설득력 있는 편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팬덤 바깥을 향해 동어반복만 계속하는 모습이 별로 보기 좋은 것도 아니긴 하죠. 예전에 조금 건들다 만 한국 SF 수용사만 하더라도, 좀더 천착할 여지가 많고… 직함만 크고 유명무실한 일들보다는 팬덤 안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많아 보이지만, 할 수 있는 일들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들도 알아서 잘 하시겠죠.

 

二. 훈장질 홍인기

홍인기 씨는 {세계 휴먼 SF 걸작선}의 편역자 후기를 비롯해서 웹진 이매진에 연재한 칼럼들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행복한 책읽기 출판사의 홈페이지 개장 초기에 야심차게 개설했던 창작 투고란에서 그나마 제일 의욕적으로 활동했던 것이나 같은 사이트 자유게시판에서 벌어진 개싸움에서 열심히 싸웠던 것을 보면 한국 SF에 대해 무한한 애정이 넘쳐나셨던 분인듯 했으나…요즘은 생업이 바빠서인지 눈에 띄는 활동이 없습니다. 해외 SF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해박하기로는 김상훈 씨와 함께 독보적이지만, 홍인기 씨 쪽은 보다 SF를 반영론적 관점에서 읽는 편이고, 국내 창작 SF에 대해서는 김상훈 씨보다도 관심이 적은 듯 합니다.

김상훈 씨가 SF 번역 출판에 훨씬 깊이 매여 있어 자유롭지 못한 반면 홍인기 씨는 도솔에서 예의 단편집을 편역한 이후로는 SF 출판계로부터 자유로운 편이어서 국내 SF계에 대해 보다 솔직하고 비판적인 발언을 거침없이 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이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본지와도 일맥상통한 면이 있지만… 물론 이쪽은 식견이나 깊이에서 따르기 힘들죠. 표현은 좀 비아냥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홍인기 씨의 ‘훈장질’은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三. 약장수 김상훈

90년대 중반 이후로 (여전히 해외 SF의 수용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SF계에 가장 영향력이 큰 기획자 겸 번역가입니다. 로저 젤라즈니, 그렉 이건, 테드 창, 부졸드 등을 비롯해서 최근의 버너 빈지까지 국내 SF 독자들에게 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스케일로 소개한 작가/작풍이 모두 몇인지 헤아리기 힘들죠. 해외 SF에 정통하고, 오컬트부터 밀리터리까지 다양한 분야의 하위 문화에 해박하며 이른바 일반적으로 교양이라고 불리는 쪽으로도 방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에 덧붙여 무엇보다도 청자나 독자 양쪽 모두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말빨/글빨을 자랑하며, 따라서 여기서 소개하는 네 명 중에서 아마 거의 유일하게, 문학적 자의식이 있는 평론을 쓰는/쓸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시공사 그리폰 북스 시절 보여줬던 포스는 요즘 들어 많이 감소한 상태입니다. 그리폰 북스의 권말 해설들에 SF 독자들의 심장을 직격하는, 혈관 속으로 순수한 팬심이 용솟음치게 하는 약빨이 있었다면 요즘 행복한 책읽기 총서들의 권말 해설들은 약빨이 좀 많이 빠진, 평범한 역자 후기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나이 탓일까요? 아니면 출판사라든가 혹은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으나 전체적을는 결국 여전히 답보 상태나 다름 없는 국내 SF 출판 시장 때문에?

국내 창작 SF에 대해 글을 쓴 건 김보영 씨의 {진화 신화}의 권말 해설이 거의 유일한 걸로 알고 있는데, 국내 SF에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아마 아직 평할 만한 작품이 없기 때문이겠죠.

 

四. 꽁생원 고장원

SF 관련 비문학 저술을 출간한 것으로는 국내에서 거의 독보적이고, 국내 창작 SF들에 대해서 네이버 카페 및 블로그를 통해 꾸준히 리뷰한 것도 거의 독보적이지만, 안타깝게도 양적으로는 경탄할 만 하지만 질적으로는 양에 부합하지 못한 면이 많습니다. 동구권 SF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서구 SF에 대해서는 해박하거나 일가견이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놀기도 잘하는 우등생보다는 성실한 모범생 타잎이랄까요. 어쩌면 SF 팬으로서의 열정은 넷 중 가장 클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창작에도 매진하시는데, 예로부터 비평과 창작 양 쪽에서 모두 성과를 거둔 예는 드물죠.

세상 다른 일들이 대개 그렇듯이 노력이 재능의 부족을 언제나 메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만큼이나 재능이 언제나 열정을 압도하는 것도 아니어서, 예의 행복한 책읽기 게시판에서의 [슬픔의 산맥] 관련 논쟁이라든지, 근래에 개인 블로그에 올린 {심연 위의 불길} 서평을 보면 눈에 띄지 않지만, 그리고 SF관이 촌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국내 SF 담론의 무게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것은 고장원 씨인 듯 합니다. 부디 본지의 ‘터무니없이 상스런 말투’의 ‘아무리 봐도 리뷰라고 볼 수 없는 욕설 메들리’에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활동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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