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분권되었지만 모 출판사와는 다르게 연달아 번역 출간된 존 발리의 중단편집에 수록된 아홉 편의 작품들은 주제와 소재 면에서 상당히 긴밀하게 연관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 발리의 작품 세계 전반적인 특징이라고 과도하게 일반화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아홉 편의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독특하고 개성 있는 세계를 보여준 존 발리의 작품들을 공통점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는 것은 의미 있어 보입니다.

1. 롤리타 컴플렉스

‘나는 키가 작았고, 작은 가슴과 평범한 몸을 가졌었다. 하지만 얼굴은 괜찮았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귀여웠다. (중략) 지금의 몸은 실제 나이로 치면 17살에 해당했다.’ ([캔자스의 유령] p.28)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나이는 열 살이나 열한 살처럼 보였다. 나는 직관적으로 그녀의 실제 나이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지 속에서] p.14)

‘바넘이 본 것은 열여섯 살 소녀의 몸이었다. 몸은 앙상하고 엉덩이와 가슴은 빈약했으며 두 갈래로 꼰 금발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행동은 외모와 달랐다. 그녀에겐 사춘기 소녀가 보여주는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다.’ ([노래하라, 춤추라] p.62)

‘나중에 듣기로 그녀는 열세 살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옷을 하나도 입고 있지 않았다.’ ([잔상] p.164)

제대로 된 성인 여성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공습], [블랙홀, 지나가다], [화성의 왕궁에서], [기억은행에서의 초과인출] 정도인데, 남자 주인공이 아예 없거나([공습]), 여자 주인공의 실제 등장이 거의 없는 경우([기억은행에서의 초과인출])등을 제외하면 성인 남녀의 관계가 나오는 것은 [블랙홀, 지나가다] 한 편 정도밖에 남지 않습니다.

조숙하고 자유분방하며, 자신감에 가득 찬, 당당한 이 알몸 소녀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존 발리의 개인적 취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가 속한 시대의 도전적이고 일탈적인 정신의 반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로버트 A. 하인라인도 울고 갈, SF 로리콘 계의 숨은 본좌가 존 발리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2. 신체개조(인공보철)

‘나는 그녀의 윗니 중 앞니 사이에 있던 약간의 틈까지 그대로 묘사한 의치를 잇몸에 끼웠다. 그리고 볼에는 보형물을 채웠다. 콘택트 렌즈가 분배기에서 나오자, 그것도 눈 안에 장착했다. (…) 나는 얼굴 위에 플라스틱 살로 된 가면을 쓰고 플라스틱이 녹아 얼굴에 붙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가면은 1분 정도가 지나자 완벽히 붙었다. 이후 나는 내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입술을 다시 가질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공습] p.64)

‘의사는 누나의 흉부를 열어 안에 있던 폐를 제거한 후 그 자리에 보호복 발생기를 집어 넣었다. (…) 수술을 받았다는 유일한 흔적은 왼쪽 빗장뼈 아래에 있는 공기 밸브의 황금색 단추였다.’ ([역행하는 여름] p.88)

‘그녀는 머리카락 대신 자신의 눈앞으로 기울어지는 공작의 꽁지깃을 대신 심어놓고 있었다. 원래 두피는 무릎 아래와 팔뚝으로 옮겨져 있었고, (…) 나는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만들기 위해 두개골을 여러 차례 접고 보강재를 채웠음을 알 수 있었다.’ ([분지 속에서] p.14)

‘바넘은 인간이었고 육체적으로 평범한 인간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수술로 무릎을 교체해 무릎이 앞뒤가 아니라 양옆으로 굽혀지는 ‘O’자형 다리였고, 두 발이 원래 달려 있었던 각각의 발목 아래에는 ‘페드’라고 부르는 커다란 손이 발 대신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노래하라, 춤추라] p.57)

과학 기술에 의한 신체 개조는 존 발리의 중단편들에서 1) 퇴폐적인/하위장르적인/가치전복적인 새로운 미의식의 탐구의 일환이거나, 2) 우주 공간이나 외계 행성 등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과 새로운 삶의 방식 모색의 일환으로 나타납니다. ([공습]의 경우에는 미래 사회를 기준으로 낯선,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여타 SF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점이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80년대 사이버펑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뉴로맨서}의 등장인물 핀을 생각해봅시다) 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3. 성 전환(성 해방)

‘어쨌든 나는 어린 시절을 남자아이로 지냈다. 그리고 첫 번째 육체개조 수술을 할 때 나는 내 육체의 모습을 스스로 선택했다. (…) 나는 첫 번째 여성의 몸을 얻고 나서 타고난 유전구조를 반영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했었다.’ ([캔자스의 유령] p.28)

‘양모는 아기 상태의 복제인간이었던 나를 데리고 수성으로 이주한 후, 자신을 여자로 개조하고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키웠다.’ ([역행하는 여름] p.110)

‘직원들은 핀갤의 몸을 수면실로 옮기라는 뜻의 초록색 지시서 대신 성전환 수술용 몸을 나타내는 푸른색 지시서를 보게 됐고, 그의 몸을 다른 어딘가ㅡ아직 그곳이 어딘지는 밝혀내지 못했다ㅡ로 보내버린 것이다.’ ([기억은행에서의 초과인출] p.124)

성 전환은 신체개조의 하위 요소로도 볼 수 있지만, 따로 뽑아봅시다. 어슐러 K. 르귄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성은 인간이 스스로를 분류하고 정의하는 가장 가장 원초적인 기준 중 하나입니다. 이 기준, 신체에 가장 깊이 못박혀 있는 이 경계선을 과학기술을 빌려 허물고 흐트러뜨리는 것은 앞의 두 키워드와 마찬가지로 60년대 시대 정신의 반영이자,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SF의 가장 근본적인 힘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사랑의 행위였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소수점 열 자리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나 역시 그가 좋아하는 것을 그만큼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남자였을 때를 떠올리고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지금 했다. 우리가 했던 일은 어쩌면 두 사람이 함께한 자위의 오케스트라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캔자스의 유령] p.56)

‘”우리가 사랑을 나눌 수 없다는 게 너무 유감이구나. 그 생각만 자꾸 나.”‘ ([역행하는 여름] p.106)

‘트리모니셔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왼쪽 북부 곶’을 남쪽으로 이동시키더니 ‘대계곡’을 따라 움직이며 그곳을 살짝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곳에 살던 식물들과 동물들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블랙홀, 지나가다] p.127)

‘생존자들은 돔 내부에 분리된 별실을 만들었다. 그 용도는 누구도 입에 꺼내지 않았지만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곳에선 세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순열과 조합이 미친 듯이 이뤄졌다.’ ([화성의 왕궁에서] p.184)

‘”그럴지도 몰라요.” 마침내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바넘의 분석에 수긍했다. “시냅스 공연의 특성상, 신체가 주변 환경과 완벽히 조화를 이룰 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음악이 탄생해요. 나는 오르가슴에 도달하려는 그 순간이야말로 그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노래하라, 춤추라] p.82)

‘내 생각이 틀렸다는 이유는 간단했다. 켈러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대화를 하게 되면 그 모습은 필연적으로 난교와 유사할 수밖에 없다. 대화의 광경을 더욱 상세히 살펴보면 백여 명의 사람들이 한곳에서 동시에 서로의 나체를 교차하고 비비고, 키스와 애무를 나누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겠는가? 차이는 없다.’ ([잔상] p.170)

…과학 기술에 의한 성 전환에서 사회적 실험으로서 새로운 사회와 삶의 방식 모색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히피즘으로 대표되는 60년대 정신과 뉴웨이브 사이의 연결점, SF에서 가장 멀리 나간 분파인 뉴웨이브 속의 SF적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4. 나체주의

세 번째 키워드로 아우를 수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별도 항목으로 분리해봅니다. 존 발리가 등장인물들을-주로 소녀들이지만-벗기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기존의 SF들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1) 에로스의 솔직한 발로로 봐야겠지만, 이것도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기존의 사회 관습의 해체와 전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조금만 더 나아가면 2) 새로운 사회 질서를 위한 대안적 의사소통 수단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은 거짓말을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가 존 발리표 유토피아의 모토랄까요.

1)의 예로는,

‘이 이야기를 하기위해선 트리모니셔가 자신의 옷을 모두 벗고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야만 했다. 그는 벌거벗은 그녀의 모습 옆에 조심스레 앉아 모험을 즐기는 3인조들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블랙홀, 지나가다] p.125)

‘그녀는 래그타임처럼 홀로그램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와는 달리 그 생성기를 허리가 아닌 자신의 손가락 반지에 설치해놓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팔을 뻗자, 홀로그램 생성기는 그녀의 몸 주위로 홀로그램의 막을 더 넓히는 대신 그 강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파스텔이 폭발하는 것처럼 홀로그램 옷이 급격히 늘어나더니 농도가 옅어졌고 덕분에 그 속에 있던 그녀의 알몸이 드러났다.’ ([노래하라, 춤추라] p.62)

‘그리고 하얀 안개가 뭉쳐 돌아가고 있던 한가운데에서 여자 천사가 나타났다. 그녀는 날개와 후광은 있었지만, 전통적으로 천사가 입고 있는 흰 옷은 입고 있지 않았다.’ ([기억은행에서의 초과인출] p.133)

2)의 예로는,

‘그는 벌거벗었고, 온몸이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캔자스의 유령] p.42)

‘”네가 날 안았을 때, 손의 촉각 때문에 깜짝 놀랐어. 보호복이 아니라 네 피부가 느껴졌으니까.” / “나도 누나가 깜짝 놀라는 게 느껴졌어. 보호복이 합쳐져서 그런 거야. 누나가 날 만지면 보호복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로 합쳐지게 돼. 가끔은 유용하게 사용되는 기능이야.” / 우리는 수은 웅덩이 위에서 나란히 누워 서로의 팔을 포갰다. 기분이 좋아졌다.’ ([역행하는 여름] p.106)

‘”(…)앞으로 수년 동안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관계가 가까워지게 될 테니까. 내 생각엔 우리 모두 긴장을 풀어줄 필요가 있어. 혹시 반대 의견 있는 사람 있어?” 그녀는우주복을 반쯤 벗은 상태에서 동작을 멈춘 후 사람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이후 그녀는 알몸 상태가 된 후 조명 쪽으로 걸어갔다.’ ([화성의 왕궁에서] p.183)

‘옷을 벗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옷을 벗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나는 다른 집마다 있는 고유의 풍습에 쉽게 순응하던 때였다.’  ([잔상] p.167)

5. 신기한 외계

‘우리 추측으로 깊이가 그정도였다는 것이지, 수은 호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납 정도의 무게를 가진 것들만 짙은 당액 같은 호수 아래로 가라앉지, 다른 것들은 모조리 그 위로 떠오르기 때문에 호수의 깊이를 정확히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꼬마들은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꺼내, 그걸 배로 사용하며 놀고 있었다.’ ([역행하는 여름] p.97~98)

‘3주 후, 타르시스 협곡은 아이들의 장난감이 넘쳐나는 놀이동산으로 변해버렸다. 크로퍼드는 협곡의 상황을 그 이상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플라스틱 스파이크 하나마다 환상적인 풍차 모양으로 꽃을 피웠고, 그것들은 각각 모양이 다 달랐다. 작은 것들은 키가 10센티미터 이하였고, 지면과 평행한 방향으로 바람개비 형태의 꽃잎이 생겼다. 캔자스에 있는 농장의 풍경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탑처럼 생긴 가늘고 긴 형태의 플라스틱 지주도 곳곳에서 생겼다. 그것들 역시 색상과 형태가 모두 달랐다. 셀로판 같은 투명한 막이 입혀져 있던 꽃잎들은 화성의 강한 산들바람을 맞아 화려한 색상을 뽐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화성의 왕궁에서] p.174)

‘”갈수록 높아진다니까요. 지난번에 내가 이 주변에 왔을 때보다 더 높이 솟아 올라있네요. 그러니까 과거의 고도에 비해 지금 고도가 더 높다는 뜻이에요.” / “높아진다는 말의 정의는 알고 있어요.” 내가 말했따. “하지만 왜 그런 거죠? 정말 확실해요?” / “당연히 확실해요. 기구의 공기 가열기가 한계에 다다랐어요. 그건 우리가 즉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올라왔다는 뜻이에요. 지난번에 왔을 때는 충분히 넘을 수 있었는데, 오늘은 불가능하네요.” / “왜 그렇게 됐을까요?” / “응결 때문이겠죠. 이곳의 지형은 조금씩 변하고 있어요. 금성 표면에는 특정 금속과 암석이 녹아 흐르고 있어요. 그것들이 뜨거운 날이면 끓어올랐다가 주변보다 차가운 산 정상에서 응결돼요. 그러다가 다시 날이 따뜻해져 열을 받으면 녹아서 계곡으로 흘러내리게 되지요.”‘ ([분지 속에서] p.33)

‘토성의 위성인 야누스와 랑데부를 하기 위해 비행하던 도중, 바넘과 베일리는 흔들리고 있는 거대한 4분음표와 만나게 되었다. 음표는 줄기가 5킬로미터, 몸통의 지름이 1킬로미터였으며 희미한 청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접근하자 음표는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노래하라, 춤추라] p.54)

존 발리의 작품들에 고색창연한 빛깔을 부여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존 발리는 아이디어 전개에 필요하다면 ‘공허 장’ 같은 가공의 이론이나 ‘FPNA’ 등의 허구의 물질을 끌어다 쓰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이러한 경향이 배경으로 확장된 결과가 50년대 이전 SF들을 연상시키는 고풍스럽고 환상적인, 신기한 외계 풍경입니다. 이것은 우주에 대한 인류의 얕고 부분적인 지식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는 동시에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그 여백을 메우는 유쾌한 시도이자, (특히나 외계 풍경의 스케일에서는) 현실 세계의 고정된 단조로운 리얼리티를 부수고 객관 세계의 한계를 뛰어넘어 작가의 주관적인 상상력을 자유분방하게 펼쳐낼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6. 난파와 조난

‘불이 꺼졌다. 나는 내 몸이 떨고 있는 이유 중 일부는 추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펄로 똥을 더 찾아보려 했지만, 주변이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은 ‘달’이 뜨지 않는 날이었고, ‘해’가 뜨려면 몇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캔자스의 유령] p.54)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공황상태에 빠지려는 듯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 “갇혀버린 것 같아. 입구 쪽으로 산사태가 일어난 것 같아.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그리로 갈게.”‘ ([역행하는 여름] p.104)

‘하루가 지났지만, 그는 계속 로켓만 붙잡고 있었다. 그 사이 좀 더 적절한 비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 “배가 난파되어 통나무를 붙잡고 있는 신세로군.” 그는 자신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사실 새로운 비유가 원숭이 비유보다 더 적절한지 자신이 없었따. 만약 그가 로켓에서 손을 떼더라도 우주 공간에 있는 그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짠 바닷물에 익사할 수도, 절대적 진공에서 질식사할 리도 없다. 그러니 공포 때문에 자신이 붙잡고 있는 얇은 나뭇가지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원숭이 신세가 오히려 그와 비슷할 것이다.’ ([블랙홀, 지나가다] p.137)

‘돔 건물은 이제 환상적인 크리스마스 장식물처럼 보였다. 건물 안은 눈송이와, 긴급경보를 알리는 적색등과 청색등의 깜빡임으로 온통 가득 찼다. 돔은 꼭대기 부위가 멀찌감치 올라가 있었고 한가운데 바닥도 이미 공중에 떠 있었다. 돔은 그의 반대편 부위에 부서지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있던 유일한 강철 지지대에 연결된 부위만 겨우 땅과 붙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눈과 먼지가 밀려오더니 돔의 바닥이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후 공기가 완전히 빠져나간 돔의 내부로 지붕이 서서히 무너져내리며 내부 골격에 걸쳐지는 모습 이외에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화성의 왕궁에서] p.152)

‘둘째 날이 되자 내 ‘졸졸이’가 고장 나버렸다. 앰버는 내 ‘졸졸이’를 버렸고, 우리는 그녀의 ‘졸졸이’를 교대로 사용했따. 하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때만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녀의 ‘졸졸이’는 아죽 작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종류였기 때문에 나와는 크기가 맞지 않았다. 내가 그걸 이용해 직접 걸으려고 하면 그것은 곧바로 쓰러져 내 균형도 무너뜨렸다.’ ([분지에서] p.50)

‘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당신의 몸이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래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몸을 찾고 있으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것입니다. 다만 시간은 좀 걸릴 겁니다.’ ([기억은행에서의 초과인출] p.111)

해양과 항해에 대한 개인적 취향의 반영일까요, 유독 존 발리의 주인공들은 난파 혹은 조난 상황에 자주 빠집니다.

홀로 망망우주에 빨려나가든 낯선 외계 행성에 여럿이 함께 떨어지든, 난파 혹은 조난 상황의 끝은 결국 새로운 인간관계 혹은 공동체의 구성으로 귀결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여섯 개의 키워드가 모두 마지막 일곱 번째 키워드로 모아집니다.

7. 새로운 사회

거시적인 관점에서 미래 사회의 모습을 고민하고 소설적 형상화를 통해 사고 실험을 행하는 것은 H.G. 웰즈 이래 SF의 가장 중요한 본령 중 하나인데, 크게 다음 세 가지의 목적 혹은 충동에 의해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앞서 말한, 보다 바람직한 미래 사회의 모색을 위한 사고 실험, 2) 현재 사회의 비판과 경고를 위한 거울상으로서의 미래 사회 제시, 3) 장르 내부의 규칙과 관습에 의한 유희. 1)에 반드시 유토피아물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2)에는 상당수의 진지한 디스토피아물들이 들어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H.G. 웰즈의 {타임머신}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2)에,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와 필립 리브의 “견인도시 연대기”는 2)와 3) 사이에, 휴고 건즈백의 {랄프 124C41+} 이래 고전 스페이스오페라들은 대부분 3)에 넣을 수 있겠죠. 그렇다면 1)에는 과연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부터 에드워드 벨러미의 {뒤돌아 보며} 등까지 SF로 부르기 민망한 고전들을 제외하면 어니스트 칼렌바크의 {에코토피아}, 어슐러 K. 르귄의 {빼앗긴 자들},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낯선 땅 이방인}… (더 있을까요? 이언 M. 뱅크스의 ‘컬처’나 댄 시먼스의 미래 사회들은 1)보다는 3)의 경향이 정교해진 결과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이 이야기되었다시피 2차 대전 이후 SF에서 장미빛 미래를 그리는 것은 힘든 일이 되었습니다. 과학 기술과 서구 문명의 지속적인 발전에 대한 전망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대안적 공동체의 모색 뿐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낯선 땅 이방인}이나 {에코토피아}, {빼앗긴 자들} 속의 사회는 모두 그런 성격을 공유하고 있으며, 특히 로버트 A. 하인라인은 {낯선 땅 이방인} 외에도 {스타십 트루퍼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우주의 개척자}, {므두셀라의 아이들} 등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비록 초점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지만, 대안적 공동체 혹은 사회 질서를 모색하는 시선이 계속 나타납니다.

그리고 존 발리 역시, 로리콘 계열 만이 아니라 그런 면에서 로버트 A. 하인라인의 계승자로 불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안 사회의 모색이 가장 두드러지는(사실상 그 자체를 주제로 한) [잔상] 외에도 [화성의 왕궁에서]의 조난자들의 공동체도 그런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며, 그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캔자스의 유령]의 결말에서 주인공(들)이 향하는 명왕성, [역행하는 여름]에서 주인공들이 꿈꾸는 명왕성과 혜성 구역, [분지 속에서]에서 엠버가 열망하는 화성, [노래하라, 춤추라]의 공생체들의 토성 고리(공동체라고 부르기 힘들기는 하지만요) 등에도 대안적 공동체 질서 혹은 (‘지금 여기’에 대한 불만과) ‘지금 여기’ 바깥의 다른 삶에 대한 소망과 희구는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분권되어 두 권으로 출간된 존 발리의 중단편집이 우리에게 주는 신선하고 참신한 느낌의 상당 부분은 이런 점에 기인하는 게 아닐까요.

.

.

.

.

.

Advertis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