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대리전]이 실린 것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2005년 10월 창간호를 올리며 시작된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의 웹저널 교차로‘크로스로드’가 창간 10주년을 맞았습니다. 풍성한 특집 기사들이 SF 영역을 건드리고 있으니 창간 10주년을 축하하며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주제별로 분류해보자면,

1. ‘크로스로드’와 한국 SF에 대하여

2. 한국 SF에 대하여

3. SF 창작에 대하여

로 나누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차례로 살펴보자면,

1. 크로스로드’와 한국 SF에 대하여

크로스로드 SF 10주년, 희망을 말한다

화장실 변기 개그물 [아직은 너의 시대가 아니다]와 길고 지루하고 재미 없는 농담 [관찰 예외 대상]으로 ‘크로스로드’를 통해 ‘프로 작가’가 된 이덕래 씨의 ‘크로스로드’ 찬가입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1) 본인을 포함하여 ‘지난 10년간 58명이나’ 작가로서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준 ‘크로스로드’에 ‘은혜를 입었’으며, 그래서 감사한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투고해서 좋은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

2) B급 영화로 시작한 SF 영화가 이제는 블록버스터 영화로 거대한 산업이 되었는데, ‘대부분 과학 관점에서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을 수록 대중들은 좋아하고,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처럼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지루하고 긴 철학적인 영화’는 성공하지 않는다.

3) 쓸데없는 짓처럼 보여도 B급 SF 영화를 만들던 사람들이 계속 노력한 끝에 블록 버스터 영화 산업이 만들어졌다.

4) 어슐러 K. 르귄이 SF와 판타지, 순문학, 로맨스 등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성공했듯이 ‘어떤 일이든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5) ‘내가 SF를 좋아하는 이유는 미래학이기 때문이다. 미래학이 뭔지도 모르고 찾아보지도 않을 것이지만’테드 창은 안 읽었지만 테드 창을 좋아합니다 ‘SF 소설은 그 자체가 크로스오버다. 과학과 인문학이 잘 버무려져 있기 때문이다.’ ‘ SF는 과학과 인문학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SF라는 장르가 앞으로도 핫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의 현실에서 SF 소설이라는 것이 암울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 세계와 우주가 SF를 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우주가 원하면 한국인들이 온힘을 기울여 들여줍니다

6) ‘우리 아버지 세대가 어느 정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한 삶을 살았듯이, 미약한 토대를 닦고 있는 ‘크로스로드’나 이곳을 찾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토대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뒤로 갈수록 논리는 물론이거니와 문장까지 난잡해져서 외계인 메시지를 방불케 하지만 필사적으로 해독해봤습니다. SF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SF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양쪽을 향해 동시에 포문을 여는 듯한 호쾌한 포지션이 인상적입니다만, B급 SF 영화들이 오늘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산업을 만들어냈듯이, ‘크로스로드’에 올라오는 SF들이 비록 B급으로 보여도 본지가 보기에는 C급이나 D급, F급도 많지만 언젠가 쨍하고 해 뜰 날 올 테니까 참고 버티자, 정도로 다시 간추리자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긴 합니다.

2. 한국 SF에 대하여

우리나라 과학소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

전반부에서는 1907년 {해저여행기담}, 1908년 {철세계}부터 문윤성과 한낙원의 80년대 이전 계보를 관례에 따라 대충 요약하고 80년대 이후로 복거일 씨와 듀나, 김보영 씨 등을 언급한 다음 ‘과학기술창작문예’와 웹저널 ‘크로스로드’, 환상문학웹진 ‘거울’, 잡지 ‘판타스틱’ 등을 호명하더니 ‘2013~15년 사이 창작과학소설이 이전에 비해 양적으로 크게 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좀 문제가 많은 것이, 제시한 표에서 2001년부터 2007년까지는 장편이든 단편이든 세부 항복은 빈 채로 총계만 한 자리에 머문데 비해 2013년 이후로는 갑자기 종이책과 단편 개별 작품 항목 숫자가 충실해지면서 총계 숫자가 두 자리로 껑충 뛰어오르기 때문입니다. 보다 상세한 검토는 [여기]에서 해보겠습니다.)

중반부 ’21세기 한국과학소설 작가들의 집필 경향’에서는 듀나의 예를 들며 한국 SF가 2010년대 이후 영미권 SF의 모작 단계를 벗어나 동시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맥락과 시대정신을 작품 속에 녹여 넣으려는 시도를 강화해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고장원 씨의 다른 글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한국 SF의 질적 성장을 너무 정치적 주제와 피상적 소재에만 국한해서 설명하려는 무리수라서 답답하기만 한데, 그래놓고는 돌연, 방향을 틀어 ‘본격적인 하드SF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정반대 방향에서 한국 SF를 후려치는 상상불가 예측불허의 현란한 스텝을 보여줍니다. 본지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아득한 고수의 경지라 넋이 나갈 지경인데,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아서, 말미에서는 다시, ‘너무 한국향이어서 영어권 독자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설정은 피해야 한다’며 한 번 더 시전됩니다. 그리고는 ‘어차피 한국작가는 해외의 최신과학 동향 입수에 뒤지고 SF 분야의 문학적 추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기도 어렵다.어차피 안 될 거야며, ‘절대 따라가지 않는 것’을 주문합니다.

이 얼마나

하필이면 가만 놔둬도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괴작들이 쏟아져 나오는 ‘크로스로드’ 지면에서 무슨 도발을 하는 겁니까. 동시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맥락과 시대정신을 작품 속에 녹여넣되 과학기술적 사고가 작품의 중요한 골간을 이루는 하드 SF에도 도전하고, 나아가 해외  SF의 동향에 철저히 눈 돌리는 자세로 세계 시장을 노려보자는 주장은 마치 500원 줄 테니까 맥도날드 가서 와퍼 세트 사오고 3000원 거슬러 오라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한국SF와 키워드 10

[한국 근대 대중소설 비평론], [대중문학과 정전에 대한 반역], [한비광, 김전일과 프로도를 만나다: 장르문학과 문화비평], [한국문학 대중문학 문화콘텐츠], [경계를 넘고 간극을 메우며: 장르문학과 문화비평] 등의 저서를 내놓으신 전라남도 보성군조성면 교수님의 글은 일차적으로, 제목에서는 키워드 10이라고 했는데 왜 정작 본문에서는 키워드 5까지밖에 없는지 궁금한데, 그닥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간다치더라도, 그리고 덧붙여 도입부에서 서술하고 있는 1900년대 초반의 해외 SF의 번안으로서 한국 SF의 초창기에서 복거일 씨의 {비명을 찾아서}에 이르기까지의 간략한 한국 SF 통사(에 대한 박상준(초호기) 씨 연구 성과의 Ctrl+c/Ctrl+v)에 대한 동어 반복도 그냥 한국 SF씬 안팎에서 관성적으로 되풀이하는 일종의 관습적이고 인습적인 허례허식이라 치더라도(그리고 2007년 창작 6편에 번역 35편이던 것이 2013년에는 창작 13편에 번역 43편으로 성장세가 뚜렷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라는 것도 출처는 고장원 씨인 거 같은데, 위에서 언급한 고장원 씨의 통계랑도 또 숫자가 안 맞는다는 점이 수상하다는 점도 차치하고서라도), 뿐만 아니라 영화 “설국열차”에 대해 ‘사실, <설국열차>(2013)는 공산품 같은 영화다. 원자재를 수입하여 제조하고 이를 다시 해외시장에 내다파는 한국경제의 메커니즘과 패턴과 유사하게 이 작품은 프랑스산() 그래픽노블Transperceneige(1983)을 도입하여 이를 한국자본과 한국인 감독과 한국인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로 만든 다음,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섰기 때문이다.라고 폄하하는 것에 대해 봉준호 감독이 뭐라고 반응할 지 궁금하긴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저 글을 읽을 리가 없으니 넘어간다 하더라도, 더더군다나 ‘번역과 모방의 단계를 넘어’선 것과 ‘패러디와 외전을 만들어낼 정도’인 것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또 매우 궁금하긴 하지만 교수님도 설명 못할 거 같으니 넘어간다 하더라도, 또-또 ‘동시대인들의 공통된 관심사와 미래에 대한 간절한 희구를 담아내’는 것이 과연 ‘환상적 괴기문학(the fantastic uncanny)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SF만의 고유한 특질인가 하는 의구심이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과감하게 무시한다치더라도, 또-또-또 ‘오늘날의 SF는 미국을 중심으로 1950~60년대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한 이후, 예전만한 영광과 성가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사실인지의 여부마저 차치한다 치더라도, 또-또-또-또 ‘한국SF는 만개의 시기를 놓치고 꽃을 피운 7월의 장미와 같아 우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한국SF의 미래 역시 희망적일 것이라는 믿음에 한 표를 던지며, 그 가능성을 과감한 정치성과 사회적 상상력에서 찾아보자고 제안하고 싶다.는 상반된 문장들이 어떻게 ‘문학은 예의 빼어난 상상력과 열정으로 위기를 돌파해왔으며 위기 속에서 항상 빛나는 성취를 이룩해왔다는 점’이라는 막연한 구절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지는 진정으로 진정으로 진정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수님, 무슨 약을 복용하시길래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갈팡질팡한 글을 아무렇게나 쓰실 수 있었어요?  어라? 그러고 보니 남는 게 하나도 없네요?

한국 창작SF를 읽는 재미

자, 이제 드디어 이번 특집 기사들 중의 압권입니다. 제목만 봐서는 해외 번역 SF들과 차별되는 한국 창작 SF들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심도 깊은 기사가 나올 거 같은데, 그래도 에이, 설마 ‘크로스로드’에 아직까지 그런 거 기대하는 분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라나요?

‘문득 이 행사장에 외계인들이 쳐들어와서 폭격이라도 하는 날에는 한국 SF계는 작가, 비평가, 편집자와 출판계까지 홀랑 다 멸망하겠다는 그야말로 SF 같은 생각이 들었다. 듣보잡 SF작가인 나는 그런 이야기로 소설 쓰면 재미있겠다고 혼자 잠깐 웃은 뒤에 나는 그 분들을 알지만 그 분들은 나를 모르는SF 작가님들께 인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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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코미콘이 열리는 상황을 가정한 누군가의 트윗을 길고 지루하고 재미없게 잡아늘인 이 글의 핵심은 SF 작가들에 대해 외부에서 제멋대로 붙인 ‘발랄하고 통통 튀는 신예 SF 작가들’, ‘지루한 일상을 뒤집는 발칙한 상상력’, ‘기발하고 참신한 본격 SF의 탄생’ 등의 광고 문구에 대한 한풀이인데, 한풀이나 넋두리 같은 개인적인 행사는 가급적 비공개로 진행하는 게 피차 덜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나저나,

‘크로스로드 10주년 기념행사 초대장을 받았을 때 나의 가슴은 뛰었다. 내가 비록 아무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는 무명작가이지만, 최근에는 그다지 작품 낸 것도 없지만, 드디어 누군가 나의 노력을(별로 안 했지만) 알아보고 나를 SF 작가로 인정해서 이런 행사에 초대해줬구나 생각하니 기쁘기 한이 없었다.

SF 안 쓰시는 분들이 이상하게 SF 작가로 분류되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것도 좀 우스꽝스럽습니다. SF 작가라는 게 뭐 그렇게까지 있어 보이는 타이틀입니까? SF 작가로 불리고 싶으면 그냥 SF를 쓰면 되지, SF를 쓰지도 않으면서 SF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건 도대체 무슨 심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3. SF 창작론

SF를 쓴다는 것

이쯤 되면 한국에서의 SF라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한국에서 SF팬이 되어버린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에 대해 절망하며 인생과 우주, 그 안의 모든 것들을 향해 가운데손가락을 날리고 담금주나 원샷하고 싶어지는데, 바로 그 순간 웹저널 ‘크로스로드’에서 기대하기 힘든, 제대로 된 SF 에세이가 나타납니다. (김보영 씨가 썼으니까 당연하죠.)

[우수한 유전자]와 [땅밑에]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 한국에서 SF를 쓴다는 것과 읽는다는 것에 대해 차분하게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경이감은 우리가 겪지 못한 것, 지금까지 생각해보지는 못했지만 내 지성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을, 하지만 지금까지는 무심함과 편견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한순간에 깨닫게 해 주는 감각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경이감을 느낄 수 있는 주체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무엇을 경이롭게 느끼려면 그것에 너무 익숙해도 안 되고 너무 낯설어도 안 된다. 적당히 익숙해서 톡 건드리는 정도로 생각이 열릴 준비가 된, 하지만 우연히도 아직은 안 열린 사람들만 체험할 수 있는 감각이다. 그런 사람의 숫자는 적을 수밖에 없다.

SF를 읽고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우월감을 갖는 것 만큼이나  SF를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입니다만, SF를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SF를 다루는 건 결코 웃을 수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와중에도 가장 놀라운 것은 (최소한 [땅 밑에]가 게재되던 시기에는) 웹저널 ‘크로스로드’에서 무려 편집위원들끼리 이메일로 게재작에 대해서 토론했다는 사실입니다만)

그분이 지적한 용어는 ‘NPC’, ‘로그인’, ‘IP’, ‘퀘스트같은 단어였으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처음 듣는 말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걸 굳이 설명해야 하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편집자는 일반 독자보다도 더 내 소설을 어려워했다. 그들은 내 소설을 생전 처음 보는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솔직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를 통과할 수 없다면 설사 좋아해주는 독자가 있다고 해도 출간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스크립터]와 관련된 것은 {진화신화}를 출간한 ‘행복한책읽기’ 출판사의 김경실 주간으로 보입니다만,[김보영 씨의 트위터 제보로 정정합니다. 해당 출판사 편집부가 SF를 싫어한다는 풍문을 접한 적이 있어 잘못 추측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르는 게 나오면 일단 자기가 무식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찾아봐야지, 내가 모르니 남들도 모를 거라며 작가보고 뭐라고 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이 대목은 사실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불안과 공포 없이 읽어나가기 힘든데, 다행히 김보영 씨는 그러니 앞으로는 어렵게 쓰지 말고 쉽게 쓰겠다는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선언으로 끝맺는 대신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부분은 아예 인지조차 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 부분을 전부 보지 못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이중의 스토리라인을 만들면 될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우리 모두를 구원해주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사실 이건 그다지 새로운 해결책은 아닌데(물론 김보영 씨도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SF가 소설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인물이 사건을 통해 갈등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일반 독자들이 SF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배경이 지금 현재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땅 밑에]도 김보영 씨의 분석처럼 한 줄 구조가 아닙니다. 일상에서 벗어난 목적을 추구하는 남편과 그런 남편을 일상으로 되돌리고 싶어하는 아내 사이의 갈등이 다른 한 줄의 스토리를 형성합니다. 다만 [0과 1사이]와 달리 머글일반 독자들에게 이해되지 못한 이유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갈등은 파국이든 해소든 명확하게 끝맺음되지 않은 채 결말이 온전히 세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솔직히 말한다면 [0과 1사이]도 일반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하기는 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아마 세대간의 단절 속에서 10대 청소년들이 느끼는 소외와 좌절에 공감한 독자들이 작품을 ‘이해’했다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요? 양자역학과 시간여행, 홀수 챕터의 서술자와 뿔테여자, 수애 사이의 관계를 과연 이해했을까요?

이 꼭지를 쓰면서 [0과 1사이]를 다시 훑어보았는데, 챕터 11과 15에서 두드러지는, 화자의 담담하고 나지막한 어조의 서술에서 다시 한 번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영세한 한국 SF계와 무식한 한국 출판계와 한심한 한국 독서계와 웹저널 ‘크로스로드’의 잘못 발신된 이메일들이 제발 김보영 씨가 김보영 씨의 SF를 써나가는 데 걸리적거리지 않기만을 진심으로 기원할 뿐입니다.

맨바닥에 헤딩하며 SF쓰기

웹저널 ‘크로스로드’를 통해 [우주복], [시공간-항], [장군은 울지 않는다], [우로보로스] 등을 발표한 라퓨탄-백상준 씨의 글입니다. SF를 쓰기 위한 고군분투 과정에 대한 서술은, 영양가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맨 땅에 헤딩하느라 고생이 참 많으시구나, 하는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마는, 말미에서 공상 속의 공상과학하드SF에 대한 몽상은 그런 감상을 좀 많이 깹니다. 과학 지식이 SF로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는 건 (위의 김보영 씨 글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골백번은 나온 이야기인데 무슨 인공지능이 SF 쓰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그래, 지금은 모르고, 못 하는 거지, 영원히 엉뚱하고, 불가능한 건 아니다. 같은 문장도, SF와 현재의 과학적 지식의 한계와 논리적 개연성 사이의 관계를 (고의적으로든 아니든) 도외시한 생각이라서 안타깝습니다.

웹저널 ‘크로스로드’가 창간 이래 10년 동안 한국 SF를 위해 한 일들을 돌아보면,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것이 빈 소리가 아니라, 정말 지금까지 그 어떤 기관과 매체에서 했던 일들보다도 더 큰 업적을 쌓아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점은 지속성인데, 겨우 3회에 머물렀던 ‘과학기술 창작문예’나 3년을 채 채우지 못한 “판타스틱”과 달리 10년 동안 매월 한국 SF 단편을 위한 고정 지면을 제공하고 있다는 건 사막에 십 년 동안 물을 길어 부은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며, 이로써 지난 10년 동안 한국 SF가 말라죽지 않고 이어져 왔다고 자부해도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아쉬운 점은 그러한 지속성과 안정성을 바탕으로 제발 SF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갖고 눈을 높이고 옥과 석을 구분하는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주변에서 꽃과 풀들이 시들어가는데 아무 데나 물을 부어놓고 가면서 10년 동안 사막에 물을 댔다고 하면 지나가는 사람들 중 웃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크로스로드’ 창간 10주년을 축하하며, 다음 호에서는 보다 좋은 작품에 대한 리뷰를 올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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