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2주년을 맞은 환상문학웹진 “거울”에는 김보영 씨 등 판타지보다는 SF로 분류될 작가들도 참여했던 것처럼, ‘환상문학’ 안에 SF까지 포함하고 있는 웹진인데, 그 중에서도 ‘해외 단편’란에 해외 환상소설 뿐 아니라 상당량의 해외 SF 단편 소설들이 (해적판으로) 번역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안 알려진 듯합니다. “거울” 웹진의 창간 12주년을 축하하며, ‘해외 단편’란을 한 번 살짝 털어보겠습니다.

전설의 레전드도 섞여 있긴 하지만 하여간 이름 있는 네임드들의 작품들 먼저 살펴봅시다.

34호에 실린 아서 C. 클라크의 [머나먼 지구의 노래]가 담고 있는 비전에 대한 감상은 ‘아서 C. 클라크!’라는 감탄사 하나로 끝납니다. 다만 동일한 번역자가 번역한, 그러나 대사와 장면 서술이 훨씬 더 풍부한 {아서클라크 단편 전집} 셋째 권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과 비교하면 거의 줄거리 요약에 가까운 이 판본의 출처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52호에 실린 아이작 아시모프의 [꿈 꾸는 로봇]은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이례적인 작품이 아닐까요. 선입견과 달리 아서 C. 클라크는 그의 유명한 제3법칙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하드한 작풍 안에서도 슬며시 초월과 영성, 신비주의를 집어넣는 경우가 있는 것에 비해, 오히려 아이작 아시모프야말로 무신론과 유물론의 테두리 안에 착실하게 남아 있으려고 노력한 편입니다. (아, 네. [최후의 질문]은 예외로 칩시다. 다음 반론?) 로봇이 꿈을, 그것도 예지몽을 꾼다는 설정은 이러한 아이작 아시모프의 경향에서 상당히 벗어났으며, 덧글들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결말의 냉정함과 비정함 역시 유별난 느낌입니다.

17호에 실린 알프레드 베스터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는 아쉽게도 SF가 아닙니다. 미국 사회의 계약과 법률 제도를 풍자한 판타지인데, 별로 재미도 없습니다. 하지만 100호에 실린 [시간과 3번가의]는 우리가 알프레드 베스터에게 기대하는 반짝이는 재치가 고스란히 담긴 재미있는 SF 단편입니다.

60호에 실린 레이 브래드버리의 [전기처형]은 세밀한 심리 묘사와 극적인 긴장감이 레이 브래드버리의 탄탄한 필력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지만, 아쉽게도 SF는 아닙니다. 하지만 111호에 실린 [단 하루의 여름]은 비 내리는 금성을 배경으로 한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들 중에서도 가장 슬픈 이야기입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계몽주의적 주제 의식(무지몽매에 대한 혐오)이 아이들의 순진한 얼굴들 위에서 한층 두드러지게 강조됩니다.

65호에 실린 커트 보네거트의 [2BR02B]에 대해서 우리가 커트 보네거트! 외에 도대체 뭐라고 덧붙일 수 있을까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라는 해묵은 주제도 커트 보네커트의 미친 냉소주의 앞에서는 견디지 못하고 환골탈태당하고 맙니다.

94호에 실린 필립 K. 딕의 [문 너머] 역시 실망스럽게도 SF가 아닙니다. (이 기획 괜히 했다 싶어지는군요) 필립 K. 딕이 쓴 호러물이라고 하면 좀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필립 K. 딕이 쓴 다른 SF들도 대개 호러적인 면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나요?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의 모호한 경계, 혹은 인간에게 적대적인 사물이라는 필립 K. 딕의 반복되는 테마들은 호러 장르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발상도 전개도 평이하다기보단 그냥 진부합니다.

20호에 실린 로저 젤라즈니의 [여기저기 드래곤들이 있음]은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고 가볍고 밝고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진부하긴 해도 재미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가 로저 젤라즈니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기대하게 되는 것들은 모두 빠져 있습니다. 26호에 실린 [스테인리스 스틸 흡혈귀]는 그보다는 좀 더 낫습니다. 작고 가벼운 이야기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분위기는 어둡고 아이러니는 복잡합니다. 흡혈귀를 로봇으로 치환한 아이디어도 눈여겨 볼만하고요.

22호에 실린 윌리엄 깁슨의 [홀로그램 장미의 파편들]은 윌리엄 깁슨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짧은 단편입니다. 윌리엄 깁슨은 항상 설정보다 분위기, 액션보다 심리와 정서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이 짧고 두서없는 데뷔 단편에서마저 그렇듯이, 첨단 기술이 인간 사회와 개인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있게 탐색합니다. 막 헤어진 연인이 남기고 간 감각 기록 매체를 통해 자신을 만나기 전 그리스 여행을 하던 연인의 짧은 기억을 마주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를 더욱 가깝게 느끼는 주인공을 통해 윌리엄 깁슨은 청춘의 방황과 혼란, 실연의 아픔과 깨달음을 감각적으로, 그러면서도 낯설고 새롭게 그려냅니다.

19호에 실린 코니 윌리스의 [신부의 아버지]는 흘깃 보면 그저 그런 또 하나의 다시 쓴 동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타임 슬립의 후유증에 대한 스팀 펑크로 읽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며, 그렇게 무리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기술 발전과 세계 변화가 인간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은유로 읽는 것까지 부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29호에 실린 [여왕조차도]는, 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개는 말할 것도 없고}나 {둠즈데이북} 같은 두꺼운 책을 꽉 메운 수다만 보고 코니 윌리스를 대단한 수다쟁이라고 생각한다면(물론 [화재 감시원]도 읽으셨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코니 윌리스는 단편 한 편 안에서도 정신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위대한 수다의 신입니다. 그리고 그 수다는 유쾌하고 흥미진진하지만, 유쾌하고 흥미진진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코니 윌리스 단편집이 내년 1월 출간 예정이라는 소식이 최근 트위터를 들썩이게 했는데, 이 단편은 시의적절한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한국에서는 언제나 시의적절할 수도 있겠지만요)

다음은 국내에 그나마 이름은 알려진 작가들입니다.

마이클 스완윅은 “거울” 해외단편란의 주된 번역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정소연 씨의 개인적 선호에 따라 네 편이나 소개되어 있습니다. 11호에 실린 [선물]은 아시는 분들은 아시는 마이클 스완윅의 짧은 단편 시리즈 ‘과학소설의 주기율표’의 ‘불소’ 항목입니다. 글 자체만 보면 다소 썰렁합니다만,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읽으시면 보다 흥미로울 것입니다. 31호에 실린 [과학 소설이 죽은 후에]는 앞서의 [선물]보다 조금 더 길고 딱 그만큼 더 재치 있습니다. 이제 버너 빈지까지도 읽어본 이름이니 번역된 시점보다는 조금 더 흥미롭습니다. 33호에 실린 [핵폭탄 협박]은 예의 주기율표에서 95번 아메리슘에 해당하는, SF라기엔 좀 그렇고, 그냥 미국인들에게나 재미있을 유머로 끝나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41호에 실린 [달 사냥개들]은 앞서의 짧은 단편들과 달리 어둡고 깊이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단편입니다. 과학 기술이나 세계 변화보다는 개인의 죄의식과 심리적 상처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취향에 따라 호오가 갈리겠지만,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마이클 스완윅의 필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테리 비슨도 무수히 많은,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SF 작가 중 하나입니다. 23호에 실린 [그들은 고기로 되어 있다]는 ‘정크 SF’ 번역 게시판부터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까지 세 번 정도 각각 다른 역자가 번역한 작품인데, 읽어보시면 그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24호에 실린 [앤을 누르라고요]는 SF가 아니지만, 자동 입출금기를 소재로 한 재미있는 발상을 담은 짧은 단편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찰스 스트로스는 시공사의 {세상의 생일}에 수록된 [항체] 외에 공식적으로 번역된 작품은 없지만 해외 원서 관련 블로그 등을 통해 이름은(혹은 이름만) 많이 알려진 작가입니다. 51호에 실린 [또 다른 냉전]은 바로 지금, 한여름밤의 무더위 속에서 읽기 딱 좋은 근사한 중편입니다. 냉전 첩보물에 러브크래프트 신화를 끼얹었다고 하면 괴작 냄새가 풍깁니다만, 대체역사에서 외우주 탐사까지 SF의 본령을 시원하게 가로지르는데다가 구성이나 어법이 모두 치밀하고 견고해서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125호에 실린 [초과 근무] 역시 마찬가지로 끝내줍니다. 이른바 ‘세탁소 파일’ 시리즈 에 속하는 중편이지만, 본문에서 대략적인 설정 소개는 나와 있으니 그냥 읽어도 됩니다. 온누리에 평안과 축복과 즐거움이 가득한 12월 24일 자정 무렵 외롭게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읽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지만, 여름밤에 맥주 한 캔 따고 킬킬거리며 읽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말 나온 김에, 모 출판사에서 2013년 2분기에 낸다던 {토성의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이러니 아무리 김보영 씨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를 순순히 반기기 힘들지 않습니까.)

32호에 실린 필립 호세 파머의 [킹콩이 떨어진 다음에]에 이르면 우리는 아무리 {연인들}과 {가라, 흩어진 너희 몸들로}를 읽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필립 호세 파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음을 실토해야 할 것입니다. 픽션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었다면, 이라는 가정은 좀 진부한 발상인데, 성장 소설의 틀을 통해 인생에 대한 통찰을 끼얹는 솜씨는 눈여겨볼만합니다.

98호에 실린 클리포드 D. 시맥과 칼 자코비의 [사라진 거리]의 기본 아이디어는 뻔한 유아론입니다만, {정거장}을 연상시키는 고독과 은둔의 분위기가 매력적이며, 다른 차원에서의 음모와 전쟁 등 국제 갈등을 연결한 부분도 기발합니다. 다만 그 정도 학설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대학에서 쫓겨난다는 건 별로 설득력이 없지만요.

116호에 실린 코드웨이너 스미스의 [쥐와 용의 게임]은… 아! 정말 어느 출판사든 코드웨이너 스미스 단편집 좀 출간해주면 안되겠습니까? 현기증 난단 말예요(2) SF에서 한정해서 이야기하자면, 한 작품이 혹은 한 작가가 자신이 속한 시대를 뛰어넘어 영원한 걸작이 되기 위한 조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살짝, 아주 살짝 미치면 됩니다. 미친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기묘한 우주와 그 속의 이상한 사건들은 세월의 한계에서 벗어나 언제 읽어도 낯설고 신선하며 새로운 재미를 줍니다. (이러한 특성은 ‘과학소설’에서의 ‘과학’이 현실 세계의 실제 과학과 동일하거나 겹쳐지는 부분이 많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논거로도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코드웨이너 스미스의 다른 단편들처럼 이 작품도 처음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제시되는 낯선 신조어들과 설정들 때문에 정신이 없지만, 모범적인 SF 독자답게 꾹 참고 따라가다 보면 점차 설정과 용어들이 체계를 갖추어가면서 사건에 빠져들게 되고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특히 ‘파트너’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의 즐거움은 아직 이 이야기를 읽지 않은 분들이 샘날 정도입니다.

같은 호에 실린 토비어스 S. 버켈의 같은 제목의 소설은 원작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인터넷과 인공지능과 증강현실의 근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새롭게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낯선 이야기를 오히려 친숙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메타트로폴리스}에 수록된, 마찬가지로 증강현실 속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도 혹시 토비어스 S. 버켈의 이야기였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군요.

117호에 실린 팻 머피의 [요정에 관하여]는 시공사 그리폰북스의 끝자락을 장식했던 {추락하는 여인}을 떠오르게 합니다. 둘 다 SF가 아니라는 점 외에도 고독과 노쇠, 유년기의 심리적 상처, 불안과 죽음이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면을 통해 절절하게 번져 나온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분위기와 문체, 주제의식과 서술 모두 매혹적인 작품이지만, 이참에 돌아봤을 때, 국내에 소개된 팻 머피의 작품들 중 SF로 분류할 수 있는 건 (번역된 작품들이 한손에 꼽을 정도라는 사실은 감안해야 하지만) [채소 마누라]정도가 고작이라는 점은 당혹스럽습니다.

40호에 실린 댄 시몬즈의 [시체의 위안]은 초능력과 흡혈귀를 소재로 한, 지배와 게임, 애증과 복수, 노쇠와 재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최근 {테러 호의 악몽}이 출간되긴 했지만, 지금까지 SF만 소개되었던 댄 시몬즈가 다른 한 발은 모던 호러에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잘 환기시켜줍니다.

43호에 실린 루시어스 셰퍼드의 [멩겔레]는 H. G. 웰즈의 {모로 박사의 섬}에서 이야기 틀을 빌려와 2차대전의 기억을 통해 현대 서구 문명이 자초하고 있는 파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주 매력적인 작품인데, 읽고 있자면 그러게 ‘그리폰북스’가 출범할 때부터 20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루시어스 셰퍼드의 작품집은 번역되지 않고 단편 한두 편만 띄엄띄엄 나와서 사람 감질나게 하는지 열불이 뻗쳐오릅니다.

114호에 실린 [라이카의 유령]은 앞서 잠시 토비어스 S. 버켈의 작품으로 착각했던 [머나먼 실레니아에서]와 함께, 증강현실과 IAEA를 소재로, 인류의 낡은 죄들이 새로운 세상의 발목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칼 슈뢰더의 또 다른 단편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요? 지나간 시대, 구체제들이 남긴 것은 처리해야만 하는 골칫덩이들-우주 전쟁의 결과물인 오염된 위성 궤도와 환경오염, 기후 변화 핵 기술 유출 등등-만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꿈에 대한 가장 순수하고 무모한 도전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 지나간 역사에 대한 회한과 새로운 역사에 대한 희망이 교차하는 하드보일드한 모험담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세파에 지쳤지만 신념에 여전히 충실한 주인공 겐나디의 이야기는 아직은 이 두 편이 전부인 듯합니다만, 좀 더 계속되기를 기대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국 작가들을 훑어보고 끝냅시다.

35호에 실린 링천의 [4월 1일, 벌레 반 쪽, 마이너스 입체 공간]은 본격적인 SF로는 보기 힘든 환상 소설입니다. 권태기에 빠진 젊은 부부의 작은 위기가 SF적으로 설명되는 환상적 장치와 사건을 통해 해결되는데, 교차 서술되는 벌레의 우화가 상징하듯 젊은 부부의 심리적 갈등에 초점을 맞출 뿐, SF적인 요소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부족해 보입니다.

46호에 실린 류츠신의 [인생]은 뭐라 말하기 힘든 작품입니다. {삼체}에서도 슬며시 보였던, 어딘가 과장되고 허황되고,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하여간에 구린 상상력 부분만 뽑아내어 극대화한 이 작품을 보면 류츠신은 중국의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도 되고 싶은 건가 불안해집니다.

122호에 실린 켄 류의 [모노노아와레]는, “우린 서로를 믿고, 총리와 자위대를 믿어야만 해요.” 같은 대사가 참, 손가락과 발가락 관절들의 운동 한계를 시험해보게 합니다만, 이 단편이 앤솔러지 {미래는 일본풍The Future is Japanese(2012년)} 수록작이었다는 점을 참고하고 참아 봅시다. 작가 켄 류가 중국계 미국 작가로 류츠신의 {삼체} 등 중국 SF를 영어로 번역 소개하고 있다는 점도 참고하면 조금 더 참기 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차분한 어조와 정교한 구조 속에서 우주와 인류의 미래와 한 개인의 삶이 만들어내는 SF 특유의 드라마를 즐기고, 혹은 감동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자발적이더라도 전체의 미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예찬하는 관점은 여전히 마음에 걸립니다만)

130호에 실린 하오징팡의 [보이지 않는 행성들]은 본문 안에서도 살짝 언급하지만, 제목과 전체 틀은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떠올리게 하고, 내용과 상상력은 {우주만화}를 빼다 박았습니다. 너무 닮아서 살짝 기분 나쁘기도 합니다만, 자유로운 상상력의 향연이라는 점에서는 아서 C. 클라크의 [머나먼 지구의 노래]로 시작해서 켄 류의 [모노노아와레]로 끝마친 정찬의 달콤한 디저트로 제격이 아닐까 싶습니다.

애초에는 “거울” 웹진의 ‘해외 단편’란을 통틀어서 SF를 모두 추려내어 소개하려고 했는데, 시간과 노력의 한계 속에서 대표적인 작가들 위주로 살짝 훑었습니다. 전수조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하고, 모쪼록 독자 여러분들의 즐거운 SF 독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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