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이웃집 슈퍼 히어로} 김보영 外 지음, 황금가지

수록작 전체를 볼 필요는 없고(우리가 좌백의 무협 [편복협 대 옥나찰]을 정말 여기서 이야기해야 할까요?), 듀나와 김보영 씨의 신작 SF만 보겠습니다.

[아퀼라의 그림자]는 미국 10대 영화를 소재로 한 [히즈 올 댓]이나 홍콤 멜로드라마와 스페이스오페라의 결합인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와 비슷하지만 연예 산업 자체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는 보다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히즈 올 댓]도 연예계 이면을 다루고는 있지만 SF라고 보긴 힘들죠)

그러나 시도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초능력과 슈퍼히어로물 산업과 아이돌 산업의 조합은 그다지 매끈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일단 배경 설정부터,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일부 사람들이 초능력을 갖게된 한국은 ‘링커 우주’나 ‘배터리 우주’ 등으로 익숙한 설정인데, 국제적으로 봉쇄된 상태에서 ‘적사병과 대량학살과 낮은 출산율 덕택에 남한 인구는 20년 동안 절반으로 줄었지만 이전의 5분의 1도 안 되는 에너지와 자원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슈퍼히어로(히로인?) 아이돌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다섯 명의 글로우 멤버가 아홉 가지 기능을 가진 아홉 색깔 공 4500개를 자유자재로 놀리면서 안산 시청을 제압하는 광경은 7백여 대의 드론에 의해 촬영되었고 지금까지 4000개가 넘는 편집본이 나왔으며 이들의 조회수는 K-포스 관련 동영상 조회수의 7분의 1이다’를 보면 아마도 실시간 중계나 녹화본 유통으로 수익을 얻는 게 아닐까 싶지만, 과연 그걸로 운영이 될까 싶습니다. (국제 봉쇄 상태에서 해외 결제가 얼마나 가치 있을까요?)

어쨌거나 이야기 자체만 보자면, (추가로 라스푸틴의 정체와 목적 같은 맥거핀을 빼고 보면) 결국은 자신의 창작물에 스스로의 실존을 잠식당하는 이야기, 문학적 프랑켄슈타인입니다. 슈퍼히어로물과 아이돌 산업의 교집합으로 팬픽션을 짚어낸 듀나의 예리함은 감탄할 만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은 우리가 왜 김보영 씨의 SF들을 좋아하는지, 왜 김보영 씨의 새로운 SF들에 목말라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김보영 씨의 이 치열함, 이 진지함, 이 성실함에 대해서 도대체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요? 똑같이 세월호 참사를 다루면서도 ‘보이드는 자신의 세계에서 이러저러한 업적을 이루고 있었다. 수백 명의 아이들을 싣고 있던 침몰하는 배를 건져 올렸고, 법으로는 처벌 불가능한 위정자를 흠씬 두들겨 패서 위염을 앓던 많은 시민들을 구했다’ 같이 피상적이고 말초적이고 선정적이고 무성의하게 다루는 다른 수록작에 비해, 혹은 슈퍼 히어로 자체를 ‘영웅’이라는 이상하고 괴상한 역어로 치환하고 근육질 재벌 3세 꽃미남과 싸이코 평민 계집의 삼류 아침 드라마 “내 뺨을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를 찍는 다른 수록작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특히나 훨씬 두드러집니다.

SF의 뿌리에서 가장 일찍 갈라져나간, 그래서 가장 멀리 갈라져나간 가지 중 하나인 슈퍼히어로물에서조차 치밀하고 견고한, 치밀함과 견고함에서 진솔한 감동을 뽑아내는 김보영 씨야말로 한국 SF의 돌연변이 슈퍼히어로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잔상} 존 발리 지음, 안태민 옮김, 불새

[분지 속에서]는 고색창연한 행성 모험물입니다. 존 발리식 신체 개조와 소녀 취향을 끼얹은 정신나간 로맨스물이기도 하지만요. 폭발석과 관련된 공상적인 설정들이나 엠버 캐릭터의 심리적인(혹은 정신적인) 불안정성 등이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깎아먹는 감이 없지 않아 높이 평가하기는 힘듭니다.

SF에서 과학 기술 발달에 따른 새로운 예술을 소재로 삼는 것이 보기 드문 일은 아니지만 [노래하라, 춤추라]는 그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작품입니다. 존 발리의 변태적인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제자리를 찾았달까요. 첫문장부터 멋지고 공생체 팀의 생태나 시냅스 공연, 그리고 둘을 합쳐내는 상상력은 정말 대단한데다가, 별들로 가득 찬 우주에 대한 동경이라는 SF의 가장 원초적인 감성으로 깔끔하게 끝맺는 결말까지 나무랄 데 없습니다. 포만감 가득 느껴지는 훌륭한 단편 SF입니다.

[기억은행에서의 초과인출]에서 필립 K. 딕의 진한 향기를 느낀 건 저만 그런 걸까요? 어슐러 K. 르귄의 {하늘의 물레}에 이어 또 하나의 ‘필립 K. 딕이 쓰지 않은 필립 K. 딕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이 작품은 존 발리가 얼마나 미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앞권 표제작 [캔자스의 유령]과 동일한 세계를 배경으로 주관적 현실에 갇혀 버린 한 평범했던 남자의 악몽을 잔인하고 끔찍하면서도 웃지 않을 수 없는 유쾌한 블랙코미디로 그러낸 이 단편은 사이버펑크가 어느날 우주에서 갑자기 떨어진 서브장르가 아니라 SF의 내부에서 천천히, 조용하게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잔상]은 분명 가장 존 발리다우면서도 존 발리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기존 질서 해체, 대안 공동체와 새로운 세상의 모색… 존 발리는 ‘불새’에서 번역 출간한 두 권의 중단편집에 수록된 아홉 편의 단편들 전편에 걸쳐 서구의 60년대 시대 정신이 SF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었는지, 그것이 다시 이후 SF들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잘 보여주었지만, 특히 올라프 스태플든의 {이상한 존} 이래의 SF 초인물의 계보를 충실히 잇는 이 작품에서 그러한 점은 가장 두드러집니다. 위악적으로 보일 정도로 가벼운 어조로 비사실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진지하고 세밀하며 담담한 서술 속에서 전혀 새로운 언어와 인식, 그에 기반한 사회 제도와 삶, 이를 통한 인간 존재의 한계 초월에 대한 비전을 찬란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의 시적인 문단은 알프레드 베스터가 떠오를 지경입니다.

 {가라, 흩어진 너희 몸들로} 필립 호세 파머 지음, 안태민 옮김, 불새

고장원 씨가 유토피아물(특히 ‘컬처’ 시리즈) 까기 주재료로 밀며 국내에도 이름이 알려진(다른 데서도 언급된 적 있었던가요?) “리버월드” 시리즈의 첫권입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이 작품을 예로 들어 ‘물질적 풍요에 기반한 유토피아’를 비현실적이라고 까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죽음의 트라우마를 품은 사람들을 원시 정글 속에 각설이처럼 깡통 하나만 주고 발가벗겨서 던져놓은 것을, 아득히 먼 미래에 그때까지 물질적인 토대 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 문화와 사상이 발달한 결과물로서의 ‘컬처’나 몰록들의 사회와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습니다)

“천일야화”의 리처드 버턴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원조 앨리스 플레전스 리들(!), 헤르만 괴링(!!), 네안데르탈인과 21세기초에 인류를 멸종시킨 외계인이 파티를 이루어 대나무로 집을 짓고 사람가죽 끈으로 죽창에 돌촉을 고정시킨 아이템을 휘두르며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이들을 향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나서는, 목적했던 장소에 부활할 때까지 계속 자살해대는 정신나간 마인크래프트RPG를 보고 싶으십니까? 불새 최신간을 사세요. 두 권 사세요. 단언하건대 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SF들 중에서 가장 정신 나간 SF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김보영 지음, 기적의 책

작가 후기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미래로 가는 사람들} 연작이 떠오르는 중편입니다. 혹은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 또는 {영원한 전쟁} 물론 광속에 근접했을 때의 시간 지연 효과를 소재로 한 SF들의 목록은 국내 출간본(상영본, 출시본, 기타 등등)에 한정하더라도 아마 한 시간 정도는 떠들 수 있을 정도로, 진부하다면 진부하고 인기 있다면 인기 있고 역사가 깊다면 유서깊은 소재입니다. 문제는 낡은 소재를 얼마나 새롭게 이야기하느냐는 것인데, 여기서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낭독을 위한 글이기 때문에 분량상의 제약이 엄격하게 주어졌는데, 김보영 씨 본인의 원래 스타일도 짧은 이야기보다는 긴 이야기 속에서 치밀한 구성과 문장이 구축되는 것이 훨씬 편안하고 적절하며, 이 이야기 자체의 성격도, 보다 많은 분량 속에서 오랜 기다림으로 설정된 사건들이 그에 부합하는 무게를 갖추고 제시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무리 분량이 넉넉하더라도 장면과 장면 사이의 시간적 비약은 필수불가결하겠지만, 이 정도 분량이면 장면 하나 하나가 제대로 형상화되기 힘들 정도로 턱없이 여유가 부족합니다)

개인적인 이벤트로는 적절했을지 모르겠지만, 굳이 출간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정말로 필요했다면 픽스 업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WEB

  [아바타, 마루타] 김용준 지음, 웹저널 크로스로드

일단 배경인 암울한 미래 사회가 꽤 정교하게 짜여졌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현대 한국 사회를 적당히 비틀고 과장했는데, 그럴싸하게 암울한 디스토피아가 뙇 튀어나와서 슬플 정도입니다. 그리고 배경이 잘 구축되니까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심리도 탄력을 받아 꽤나 사실감 있게 그려집니다.

아바타 실험이나 보존원 관련 음모들은 사실 좀 진부하고 헐렁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마는, 그래도 사건 전개와 관계 변화, 내면 심리 등을 이만큼이나 안정적이고 유기적으로 전개한 작품이 그동안 웹저널 크로스로드에서 그렇게 보기 드물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높이 평가할 부분입니다. 특히 주인공을 ‘너’라고 지칭하는 서술을 작중 설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편에 머무르지 않고 결말의 반전을 통해 이야기 전체를 뒤집어 보게 하는 결정적인 장치로 사용한 감탄할 만한 솜씨(시점과 서술 트릭의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나, 단순히 미래상을 제시하기 위한 소도구로 보였던 디지털 페이퍼를 결말 직전에 효과적으로 써먹는 수법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합니다.

 [연천137년을 떠나 보내며] 김컁컁 지음, 웹저널 크로스로드

이건 뭐 {삼체} 독후감도 아니고… {삼체}의 영향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차라리 류츠신의 단편 SF를 번역한 것이라면 납득하겠습니다. 한국 SF가 과연 굳이 중국식 인명, 중국 배경을 취할 필요가 있을까요? 맹목적인 권력과 이성적인 학문 사이의 갈등이 꼭 문화대혁명을 모델로 해야만 하나요?우리도 할 수 있다 대한민국 만세! 지상과 단절된 지하 사회의 이야기는 당장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울}, {소년과 개}, {최후의 수비대}… 세 편은 댈 수 있습니다. 뒤져보면 더 나오겠죠. 주인공 화자의 연설만으로 배경부터 사건 경과, 결론까지 모조리 제시하는 구성인데, 말솜씨가 꽤 괜찮아서 단조롭거나 지루한 느낌은 없습니다만, 중국식 고유명사들과 문화대혁명의 알레고리 외에는 아무 것도 새로울 것 없는 낡고 진부한 이야기입니다.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는데, 한국 SF라고 해서 굳이 한국식 고유명사와 한국 배경이 나올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미국식 고유명사나 중국식 단어들이 나올 필요도 결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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