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최후의 성} 잭 밴스 지음, 안태민 옮김, 불새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잭 밴스의 작풍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인물과 배경, 소재, 문장은 모두 1950년대 이전 작품이라고 해도 충분히 속으리만치 좋게 말해서 고전적이고 솔직히 말해서 낡고 촌스러운데, 두 편의 중편을 지배하고 있는 퇴폐적인 감각, 분위기는 시대를 초월해서 지금도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두 편 모두 인류가 은하계로 퍼져나갔다가 너무 넓고 얇게 퍼진 나머지 마침내 쇠퇴하고 소멸하는 시기를 배경으로 우주의 조그만 한 귀퉁이에서 인류의 마지막 후예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걸고 필사적으로 싸우는데, 그래봤자 거대한 우주의 무한한 시공간 안에서의 작고 짧고 시시한 에피소드에 불과할 뿐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최후의 성]은 외계에서 온 생명체들을 하인과 노예로 부리던 인류의 후예들이 궁극적인 반란을 맞아 그때까지 지켜온 고고한 품위를 그대로 고수하다 깨끗이 죽는 것과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성 밖의 거칠고 품위 없는 삶을 지지부진하게 이어 사는 것 사이의 대립이 중심 갈등인데, 중심 갈등의 고조와 해소 과정보다는 ”여섯 별들의 전쟁’ 이후, 지구는 대재앙 속에서 용케 살아남아 이후 야만 상태의 유목민이 된 한줌의 불쌍한 인간들 외에는 3천 년 동안이나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내버려져 있었다. 그 이후 약 700년 전에 견우성에 살던 몇몇의 부유한 귀족들이 약간의 정치적인 불만과 변덕심에 기인해 지구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했었다'(p.26) 같은 배경이나 ‘멕’, ‘괴조’, ‘노예’와 ‘페인’, ‘짐승차량’ 같은 소도구로 구성된 ‘성 안’의 탐미적이고 공허하며 덧없고 양식화된 지루한 삶의 묘사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이건 두 번째 수록작 [드래곤 마스터]도 마찬가지인데, 내부의 대립과 외부의 침공 앞에서 인류의 마지막 후예들이 살아남는 과정 자체보다는, 한 해 뒤에 나오는 {듄}을 예언이라도 하는 듯한 중세 유럽 판타지 풍의 사회에 SF의 우주를 결합한 맛이 일품입니다. (전투 전의 영지 관리나 드래곤 풍종 개량, 사육이나 전투에서 유닛 간의 상성과 지형 효과를 이용하는 요소들이 RTS 게임을 연상시키는 부분은 {듄}이 그 분야 시발점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인류가 외계 생명체를 길들이고 개조해서 부리는 거야 SF에서 진부한 소재입니다만, 그 외계 생명체들이 또 반대로 인류를 길들이고 개조해서 침공해온다는 부분도 재치있고요.

두 편 합쳐 216쪽에 2만원은 요즘 물가를 감안해도 비싸기는 합니다만, 우린 이미 154쪽에 번역도 편집도 훨씬 극악한 {빅 타임}을 13400원에 산 전력이 있지 않습니까. (이 문장을 쓰느라 다시 {빅 타임}을 들춰봤는데, 정말 이 조악함, 가독성과 심미성을 모두 포기한 이 절망적인 편집은 정말 구제불능으로 목불하견이군요) 불새 출판사에서나 낼 만한 고색창연하면서도 이색적인 SF를 즐기는 데는 치러 볼 만한 가격이라고 생각됩니다.

 {내해의 어부} 어슐러 K. 르귄 지음, 최용준 옮김, 시공사

어슐러 K. 르귄의 중후기 대표 단편집이라고 출판사에서는 선전하고 있습니다만, 수록작들을 하나하나 까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수록작은 모두 8편인데, 이 중 [북면 등반]은 (사실은 [고르고니드와 한 최초의 접촉]도 넣고 싶은데) 완결된 이야기를 담은 제대로 된 단편으로 보기 힘든 글이고, [상황을 바꾼 돌]과 [케라스천]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아예 SF가 아니며, [쇼비 이야기]와 [가남에 맞춰 춤추기], [또다른 이야기 혹은 내해의 어부]는 독립성과 완결성을 갖춘 어느 정도 갖춘 단편들이긴 하지만 결국은 배경과 등장인물을 공유하고 사건이 이어지는 연작들이고, 유일하게 남는 [뉴턴의 잠]마저도 (이건 사실 [쇼비 이야기] 등 ‘처튼’ 3부작도 그렇긴 한데) 결국은 객관적 물리 현상을 다루는 SF라기보다는 주관적 환상을 인정하는 판타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SF를 기대하며(그런데 이쯤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가 어슐러 K. 르귄에게 그런 걸 기대하는 게 애초에 정당한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긴 합니다만) 이 책을 펴든 독자들은 아무래도 허전함이나 실망감을 떨치기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뉴턴의 잠]은 출발은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연상되리만치 하드하게 시작되는데, 중반 이후로는 차라리 필립 K. 딕을 떠올리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될 정도로 처참하게 주관적이고 환상적이며 비물질적이고 반물리적인 전개로 점철됩니다. 에스더의 시력 이상과 아이크의 편견이 문학적 상징으로는 그럴싸하지만 SF에서는 말장난처럼 무의미합니다. 가장 적절한 해석은 지구의 대참사를 피해 궤도에 올라온 사람들의 죄의식이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집단 환각으로 나타난 것인데, 제임스 G. 발라드풍의 냉소적인 접근이라면 몰라도 어슐러 K. 르귄의 부드럽고 따뜻한 문체는 적절한 균형이나 타협점을 찾지 못합니다. 파탄을 맞는 건 아이크의 과학적 세계관이 아니라 작품 자체일 뿐이죠.

앤서블은 10초 정도는 재미있는 사고실험 장난감이긴 하지만 애초에 앤서블이 작동하는 우주는 우리 우주가 아닙니다. ‘처튼’ 연작은 앤서블식 사고실험을 훨씬 더 재미없게 끌고나간 결과물로, 첫 단편 [쇼비 이야기]는 아예 작품 자체가 개별적인 독립성을 획득하는 데도 실패했으며, [가남에 맞춰 춤추기]는 굳이 ‘처튼’ 장치가 등장해야 될 필연성이 없는, 그냥 어술러 K. 르귄식의 문명과 문명 사이의 만남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두 작품의 실패가 결국 전적으로 마지막 이야기ㅡ이자 작품집의 표제작인 [또 다른 이야기 혹은 내해의 어부]를 위한 희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는 점입니다. 순간 이동과 평행 우주, 시간 여행을 감동적으로 결합한 이 작품은 앞서 늘어놓은 투덜거림이 모두 무색해지게 만듭니다. 어쩌면 이 한 편의 감동적인 SF를 위해서 이 작품집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암흑을 저지하라} 스프레이그 드 캠프 지음, 안태민 옮김, 불새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로버트 하인라인이 쓴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라고 하겠습니다. 주인공은 고전 SF의 전형적인 영웅이라 할, 불굴의 의지와 지식을 갖춘 이과인이고ㅡ역사학 박사라는데 하는 짓은 완전 공돌이ㅡ주변 인물들은 대체로 비현실적으로 착해서 주인공의 과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데, 대사와 문장이 천연덕스러워서 술술 풀려나가는 스토리가 눈에 거슬리기보다는 시원시원한 재미를 줍니다.

“마르티누스, 정말 미친 계획이야. 그런 짓을 하다간 나도 분명 사로잡힐 거야. 그러면 내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안 돼. 내가 충고한 대로 가만히 있는 게 좋아. 무고한 사람들의 미래까지 걸면서 위험을 감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 밧줄과 다른 물건들은 언제 갖고 오길 원하나?” (p.155)

기술과 변화 위주의 전반부에 비해 정치와 전투 중심의 후반부에서는 극적 긴장이 다소 늘어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시간 여행과 대체역사물들 중 읽는 재미로는 꽤 앞줄에 놓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WEB

  [소백산 천문대 연쇄살인사건] 김창규 지음, 웹저널 크로스로드 2015년 1월, 2월호

잘 읽었습니다. 이제 SF를 보여주세요. 작중 행사인 <소백산 천문대 과학 문화 융합 워크숍>은 실존하는 소백산 천문대에서 실재로 진행되는 행사라고 합니다. 등장 인물들 중에도 SF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박상준 씨1호 등 실존 인물들이 꽤 되어 보이고요. 사건 장소와 살인 방식 외에는 그냥저냥한 추리 소설로 두 달 동안 지리하게 전개되었는데, 다소 작위적으로 고전 추리소설의 대단원을 패러디한 결말부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SF적 설정들을 쏟아내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망했다는 느낌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직설적으로 쏟아내는 구성부터 자연스럽지 않고, 쏟아내는 SF적 설정 자체도 별로 참신하거나 인상적이지 않은 데다가, 연쇄 살인의 근본 동기라는 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이라는 미래상이나 소백산 행사가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설명에 이르면 공상과학, 허무맹랑, 과대망상 같은 단어들밖엔 떠오르지 않습니다.

[크로스로드 연쇄살인사건] 같은 소설은 어떨까요? ‘크로스로드’의 엉터리 SF들 때문에 한국 SF계가 망해서, 그걸 막고자 미래의 한 평행우주에서 파견한 요원이 ‘크로스로드’ 편집 위원들과 게재 작가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이야기라면 SF거나 말거나 정말 정말 재밌을 거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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