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환상 문학 웹진 ‘거울’ 132호 기획 기사로 실린 캐머런 헐리의 ‘과학 소설에 대해 변명하기’입니다. 일단 장르 바깥의 독자들에게 지나치게 방어적일 필요 없다는 주제는 누구나 동의할 만 합니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몇 가지 의문스러운 점들이 있습니다. 일례로, ‘어쨌든 모든 사람이 하인라인의 모든 작품을 읽지 않아도 인기 있는 최신 SF 도서를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는 전혀 불필요한 질문인데, {스타십 트루퍼스}를 (그리고 {영원한 전쟁}까지) 이미 읽었다면 물론 훨씬 재미있겠지만, 그렇다고 {스타십 트루퍼스}를 읽어야만 {노인의 전쟁}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건 분명히 아닙니다.

게다가 아무리 일반인들을 일시적으로 꼬시기 위해서라고 해도, SF가 ‘결국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SF의 심장이자 정수를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한 번 볼까요?

‘그리폰북스’가 그저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라면…

001 내 이름은 콘라드 (로저 젤라즈니)

죽은 줄 알았던 약혼녀와 다시 만나는 남자 이야기입니다. 남자는 결말에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죠.

002 우주의 전사 (로버트 A. 하인라인)

여자 문제로 군대에 간 남학생 이야기입니다. 장교로 진급한 주인공은 입대한 아버지를 부하로 삼습니다.

003 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 귄)

낯선 나라에 외교 사절로 도착한 남자 이야기입니다. 도착한 나라의 외교 분쟁에 휘말려 납치되어 온갖 고생을 겪다가 다행히 구출됩니다.

004 다아시 경의 모험 (랜달 게릿)

살인 등 각종 범죄의 범인들을 잡는 귀족 탐정 이야기입니다. 탐정은 별로 홈즈를 안 닮았는데 그의 조수는 딱 왓슨 짝퉁입니다.

005 타임 패트롤 (폴 앤더슨)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임무를 수행하고 여자들을 사귀는 남자 이야기입니다.

006 파괴된 사나이 (알프레드 베스터)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실이 탄로나서 결국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되는 재벌2세 이야기입니다.

007 솔라리스 (스타니스와프 렘)

과거에 잘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는 과학자들 이야기입니다.

008 중력의 임무 (할 클레멘트)

낯선 이들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남자 이야기입니다.

009 영원한 전쟁 (조 홀드먼)

전쟁에 징집되어 한참 싸우다 결국 제대해서 동기였던 예비역 여군과 결혼하는 남자 이야기입니다.

010 인간을 넘어서 (시어도어 스터전)

백치와 버림 받은 아이들, 양심 없는 남자 삼류 인생들이 만나 함께 행복하게 살게된다는 이야기입니다.

011 크리스털 월드 (J.G. 발라드)

친구 부인이자 내연 관계에 있는 여자를 찾아 아프리카 오지의 밀림에 들어갔다 결국 다시 나오는 사내 이야기입니다.

012 드래곤과 조지 (고든 R. 딕슨)

사고를 당한 약혼녀를 찾아 낯선 세계에 빠져드는 젊은이 이야기입니다.

013 낙원의 샘 (아서 C. 클라크)

굉장히 높은 건축물을 지으려는 한 공학자의 집념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롯데월드말고요.

014 리보위츠를위한 찬송 (월터 M. 밀러 Jr.)

우매한 대중들 속에서 성스러운 지식을 보존하는 수도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015 화씨 451도 (레이 브래드버리)

TV 연속극에만 빠진 아내에게 권태를 느낀 중년 소방수가 수상하게도 이웃집 소녀에게 호감을 갖게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016 높은 성의 사나이 (필립 K. 딕)

남편을 떠나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를 찾아가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017 추락하는 여인 (팻 머피)

마야 유적지에서 일하면서 미쳐가는 엄마 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여자 아이 이야기입니다.

018 유년기의 끝 (아서 C. 클라크)

친구와 가족들을 떠나 낯선 세계로 밀항했다가 돌아온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HAPPY SF 총서가 그저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라면…

(앞서와 중복되거나 단편선 등 적당하지 못한 작품은 건너 뜁니다)

001. 잃어버린 세계

짝사랑하는 아가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미지의 오지로 탐험을 떠난 애송이 이야기입니다. 모험 끝에 성숙해져 돌아와서는 보기 좋게 아가씨를 차주죠.

002. 불사판매 주식회사

일종의 보험 사기에 휘말린 사나이 이야기입니다.

003. 신들의 사회

사랑하던 여인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갔다가 불행한 사고에 휘말려 정신적/신체적으로 심각한 퇴행을 겪자 모든 힘을 동원해 여인을 보살피는 순정남 이야기입니다.

004. 쿼런틴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던 여인의 실종 사건을 의뢰받고 각종 모험을 겪다가 심신이 피폐해지는 하드보일드 탐정 이야기입니다.

008. 비잔티움의 첩자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산업 스파이 이야기입니다.

012. 마일즈의 전쟁

가출 청소년이 어른들을 속이고 다니다가 작은 거짓말이 점점 큰 거짓말을 부른다는 교훈을 얻는 이야기입니다.

017. 이계의 집

여행하다 폐가가 보이더라도 쓸데없이 들어가 보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018/019. 심연 위의 불길

여자 사서와 난파자와 기억상실증 환자가 낯선 곳으로 항해를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결말에서 남자는 죽고 기억상실증 환자는 큰 화상을 입으며 여자 사서는 웬 고아 남매를 맡게 됩니다.

슬슬 재미 없어지는데, 그래도 ‘미래의 문학’까지는 해봅시다…

01 정신기생체 (콜린 윌슨)

친구의 자살에 충격을 받아서 이상한 철학 체계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상한 철학 체계는 추종자들이 꽤 생겨서 서로 모여 집단 환각도 막 같이 보고 그럽니다.

02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고마츠 사쿄)

젊어서 여행을 떠났다가 할아버지가 다 되어서야 할머니 곁에 돌아오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치매까지 걸려와서 할머니를 알아보지도 못하다 죽습니다.

03 바벨-17 (새뮤얼 딜레이니)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는 여류 시인 이야기입니다.

04 컴퓨터 커넥션 (앨프리드 베스터)

미쳐버린 친구의 음모로 어린 아내를 잃어버리는 사내의 이야기입니다.

05 타임십 (스티븐 백스터)

온갖 모험을 겪은 끝에 간신히 돌아와 여자 친구를 구하는 남자 이야기입니다. 여자 친구가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인 것은 그냥 넘어갑시다.

06 바실리스크 스테이션 (데이비드 웨버)

부하들의 빠진 군기를 제대로 잡아 전투에서 승리하고 진급하는 여군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부하들 태반이 전사한 건 마찬가지로 그냥 넘어갑시다.

.

 …의도적으로 살짝 왜곡한 부분들이 있는 건 인정합니다만, 봅시다, 여기에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를 읽고 싶으면 그냥 일반 소설이나 추리, 로맨스 등등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만 나오는 책들을 읽으면 됩니다. 외계인, 로봇, 우주선이 나와야 SF라는 식의 소재 지상주의를 편들 생각은 없습니다만, SF의 재미는 결국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SF적 요소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SF 독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게토 엘리트주의ㅡ그런데 솔직히 이것도 오래된 SF 팬들보다는 어떻게든 뭔가 아는 척하고 싶어 좀이 쑤시고 안달난 초입자들에게서 더 잘 보이는 모습 아닙니까? 진입 장벽의 유무 혹은 높고 낮음이 장르소설들 사이에서의 우열을 의미하지 않고, 애초에 장르소설들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고 장르부심을 부리는 것만큼 병신 같은 짓도 없습니다ㅡ가 새로운 독자들의 유입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사실일 수 있겠지만, 애초에 장르소설들 중에서도 SF의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는 게토 엘리트주의와는 무관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진입 장벽 자체가 SF를 SF로 보존해주는 울타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울타리를 치우면 SF도 사라집니다. SF를 소설이게 하는 최소한의 알리바이일 뿐인 등장 인물 사이의 관계와 갈등에 초점을 맞춰준다고 해서 SF를 안 읽던 사람들이 SF를 즐기고 계속 찾아 읽게 될까요?

‘과학 소설에 대해 변명하기’에서 든 예를 보면 결국 독자들은 SF가 아니라 로맨스를 읽은 셈입니다. 당연합니다. SF는 개인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니까요. SF는 개인과 개인 수준을 넘어 인간 사회, 인류라는 종,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어떤 지성, 혹은 우주 그 자체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르입니다. 망원경을 가지고 왜 샬레 속을 들여다보라고 합니까? SF를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읽고 쓸 때 벌어질 일은 사실 이미 벌어져 있습니다. {다이버전트} 등 멍청한 십대 디스토피아 로맨스물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

.

.

Advertis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