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펠루시다1-지구의 중심에서}  / {펠루시다2-지저세계 펠루시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 지음, 박들비 옮김, 새파란상상

솔직히 털어놓고 말해서 우리가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에게 바라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개연성, 과학적 정합성, 등장인물의 생각, 정서, 심리에서의 입체적 두께 등등 현대 SF가 최소한 갖추어야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마저도 우리는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에게 기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희망과 기대를 포기했을 때에야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는 우리에게 그가 가진 재미와 즐거움을 풀어놓기 시작합니다. 풍선껌이나 솜사탕, 쫀드기 등등 불량식품들의 지끈거리는 달콤함이라고 불러도 좋고, 맥주 마시며 낄낄거리고 비웃는 맛에 보는 B급 영화에 비유해도 좋습니다. 수준이나 깊이 등 질적 기준과 무관하게 일단 흥미진진하게 재밌다는 점만큼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지구공동설을 빌려쓴 초기 SF로는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도 있습니다만, 그쪽이 누가 쥘 베른 아니랄까봐 지질학과 고생물학 분야의 백과사전적 지식으로 도배한 다소 현학적이고 따분한 여행기였다면 이쪽은 누가 {화성의 공주}와 {타잔}의 작가 아니랄까봐 인간 대 자연, 문명 대 야만서구 대 비서구의 단순무식한 대립 구도 위에서 대결과 투쟁과 정복의 모험담으로 시종일관합니다. 하도 노골적으로 당당하게, 일말의 망설임이나 죄책감 없이 백인 남성 중심주의를 설파하니 오히려 솔직하고 순수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그러고 보면 20세기 초에 나온 모험 소설들은 현재로서는 재현 불가능한, 자기 검열 따위 전혀 없이 순도 100%로 분출되는 마초 판타지-사춘기 전후 소년들의 환상의 정수들을 담고있지 않나, 그런 소설들이 주는 재미도 어른으로서의 적절한 거리감만 유지한다면 즐길만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판본 2권에서도 결국 부제로 써먹고 있지만) 추억의 그 단어 ‘지저세계’ 펠루시다의 정글과 해변, 산과 바다는 백인들이 침범하기 이전, 원시 자연의 한적한 아름다움을 우아하게 빛내고 있습니다. 개연성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인물들과 사건들은 전형적이고 진부하긴 하지만 출간된 지 90년이 지났어도 꽤 조마조마하게 읽어나가도록 하고요.

이 두 권으로도 ‘펠루시다’의 재미는 충분히 맛본 셈이긴 한데, 출판사에서는 후속작들까지 계속 번역 출간할 계획인 듯합니다.

 {무한의 경계}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이지연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

이미 ‘HAPPY SF’ 무크지와 월간 ‘판타스틱’을 통해 국내에도 소개되었던 중편 [슬픔의 산맥]과 [라비린스]에 새로운 중편 [무한의 경계]를 더해서, 골격 대체 수술을 받은 직후의 마일즈가 예산 횡령 의혹과 함께 들이닥친 일리야의 힐문에 차례 차례 에피소드를 회상한 뒤 마침내 오해가 풀리고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는다는 형식으로 한데 묶은 작품집입니다.

다시 읽은 [슬픔의 산맥]은, SF의 표피만 덮어씌웠을 뿐 이야기의 뼈대 자체는 내부의 전통과 외부에서 유입된 변화 사이의 갈등-혹은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갈등을 다룬 뻔하고 뻔한 이야기라는 고장원 씨의 평(참고 링크 원문은 찾을 수 없군요)이 분명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핀트가 잘못 맞았었다는 느낌을 줍니다. 같은 작품집에 수록된 나머지 두 에피소드와 달리 [슬픔의 산맥]은 스토리의 독립성은 가장 높은데 작품 자체의 독립성은 가장 낮습니다. 지금까지 출간된 시리즈들 중에서 [슬픔의 산맥]의 이야기가 다시 거론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심지어 {무한의 경계} 안에서도 일리얀이 힐책하는데 왜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회상했는지 개연성이 마련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완결되어 있지만(살인 사건의 신고와 수사, 범인을 찾고 처벌하는 추리 소설의 구성은 완전하게 갖춰져 있습니다), 본질적인 의미는 작품 안에 없고 작품을 둘러싼 시리즈 전체가 부여합니다. {세타간다}에서 특히 두드러지지만, 보르 계급의 전통에 따라 군대에 들어갔지만, 마일즈가 전쟁 수행이 아니라 전쟁 방지를 군인의 임무로 생각하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는 것은 모두 이 작품에서, ‘작은 숙녀님’에게 한 약속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약속과 맹세와 명예는 ‘보르코시건’ 전체에서 울려퍼지는 메아리입니다. 첫권 제목이 뭐였죠?) 그렇게 본다면 [슬픔의 산맥]은 ‘보르코시건’ 시리즈 전체의 주제부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미궁]은 부졸드와 마일즈의 장기가 잘 발휘된, 아마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전형이라 할 정신없는 활극입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게 점점 더 꼬여가는 상황 속에서 잠시 반짝이는 행운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마일즈의 솜씨가 감탄스럽고, 마일즈의 장애가 시리즈 전체에서 갖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변주해내는 결말의 성찰적 대사도 멋집니다.

[무한의 경계]는 이 작품집의 표제작이 될 수 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전편 [미궁]에서도 마일즈가 덴다리 용병대 예산을 꽤 낭비하긴 했지만 여기선 정말 횡령이라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의뢰명령받은 소규모 구출 작전을 대규모 탈출 작전으로 바꿔 버렸으니까요. SF를 읽는 짜릿한 맛 중 하나인 ‘적극적 독서의 필요성’이 잘 살아나는 작품으로, 독자는 처음에는 거의 실존주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마일즈가 도대체 거긴 왜 들어갔는지, 거기서 도대체 뭘 할 건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탐색과 추론을 동반한 독서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일즈가 처한 상황은 하여간 지금까지 마일즈가 그렇지 않은 적도 없긴 했습니다만, 해법이 전혀 보이지 않는 궁지 속에서 오로지 세 치 혀만으로 그 자신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함께 탈출하는 과정에서의 쾌감은 [미궁]과 마찬가지로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주된 재미입니다. 도입부부터 연옥에 대한 비유로 시작하지만, 탈출의 핵심 과정에서 나오는 기독교 알레고리의 SF적 쓰임새는 읽는 과정에서의 소소한 곁재미이겠고요.

 {전장의 형제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배지훈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

마일즈 보르코시건 대위와 마일즈 네이스미스 제독 사이의 내적인 정체성 혼란과 외부의 의심과 의혹을 도대체 이 시리즈는 어디까지 모른 척 나아갈 것인가 궁금했는데, 비로소 여기에서 매듭이 지어지는군요. [무한의 경계] 에피소드의 결과 만신창이가 되어 도착한 지구에서 덴다리 용병대는 예산난에 쪼들리고 마일즈(어느 쪽이든)는 앞서 서술한 혼란과 의혹 속에서 역시나 마찬가지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연속적인 위기에 빠져듭니다.

문제-해결 혹은 위기-탈출 과정에서의 전반적인 플롯 구성은 {전사 견습}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의 시리즈 전반에서 가장 무리수가 많았는데, 어쩌면 덴다리 용병대의 구성과 안정 과정에서 필연적인 귀결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구성의 무리수에 눈길 줄 틈 없이 사건과 사건과 사건을 이어나가는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필력은 감탄스럽고요.

판매가 부진해서 출판사로서 고민이 많다는데 (시리즈물들의 종착역이라 할) 박스 세트화까지 되었으니 다음 권이 계속 나올지 불안하군요.

   {루시퍼의 해머} 레리 니븐, 제리 퍼넬 지음, 김찬별 옮김, 새파란상상

레리 니븐이 썼을 법한 부분과 제리 퍼넬이 썼을 법한 부분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잔재미입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제리 퍼넬이 썼을 거 같은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레리 니븐이 1971년에 쓴 인상적인 단편 [변하는 달]에서 이미 이 장편의 대략적인 골조는 잡혀 있는데, 천문학적 타격 직전의 불안한 분위기와 쏟아지는 폭우와 우박 속에서 식량 등 필수품의 확보와 대피, 타격 이후 세계 질서 재편에 대한 전망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레리 니븐만의 [변하는 달]에도 이미 생존주의적 요소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전문적인 정치 전략 자문가로 활동하였고 전략에 관한 다양한 저작물을 발표하였으며, 그의 책들은 사관학교를 포함하는 각종 군 관련 교육기관에서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는(그리고 무엇보다 {용병}에서 어설픈 스카우트 놀이를 인상깊게 선 보인) 제리 퍼넬과 공저한 이 장편에서 레리 니븐은 아마 혜성 충돌까지의 천문학적 시나리오와 과학계의 대응을, 제리 퍼넬은 충돌 전의 서바이벌 준비와 충돌 이후 서바이벌 및 재조직 과정을 쓰지 않았을까요.

결과적으로 읽는 재미가 꽤 쏠쏠한 SF입니다. 각 권은 크게 충돌 이전-충돌-충돌 이후로 나눌 수 있는데 2, 3권에서 활약할 인물들을 하나하나 꺼내놓는 1권이 상대적으로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 충분히 밑밥을 깔아놓은 만큼 2권을 지나 3권에 이르면 읽는 재미만큼은 꽤나 쏠쏠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전반적으로 그렇긴 하지만, SF적인 소재나 비전이 좀 부족하긴 한데 대신 (종종 너무 노골적이어서 눈에 거슬리지만) 우리가 공기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기는(그래서 하나도 고마운 줄 모르는) 서구 근대 과학 문명의 중요성과 연약함에 대한 통찰이 곳곳에 별사탕처럼 박혀 있어 읽는 맛을 더합니다.

 {가마틀 스타일} 배명훈 지음, 은행나무

비교적 짧은 분량의 중편임에도 지루하고 SF재미가 많이 부족합니다. 뒷표지의 “운명을 감당해내는 용기와 위대함, 인간성에 대한 가슴 뭉클한 성찰!”이라는 문구나 “완성된 자아를 가진 전투로봇 가마틀이 오류와 고장으로 불완전한 육체를 갖게 되면서 빚어지는 갈등과 일탈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운명을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출판사의 홍보 문구는 정작 작품 안에서는 확인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십시오’체를 채택한 공손한 서술은 장르 바깥의 독자에게 일차적으로 친근감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자아를 가진 로봇과 세계 사이의 갈등을 파고드는 데는 별로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가마틀의 탈주 과정은 결국 삽입된 동화를 통해 그려지는데, 여기는 실컷 물 채워 물총 들고 나왔는데 애들 앞에서 발기 불능물이 안 나가니까 당황하는 다섯 살짜리 코찔찔이만 있지 ‘아이의 마음이 아닌 온전한 어른의 자아를 가지고 탄생해버린 어느 고등 인공인격체의 고독한 내면세계’를 가진 전투로봇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로봇의 자기 인식 기능에 대한 설명(13쪽)에서 시작해서 로봇의 망설임에 대한 주관적 느낌과 감상(58쪽)을 지나 심지어 로봇의 꿈(67쪽)이나 손금과 운명에 대한 멋부린 서술(103쪽)에 이르면 로봇은 사라지고 문학적 비유와 수사만이 남을 뿐입니다.

별다른 설명 없이 무조건 킹왕짱 쎈 무기라는 ‘LP13’ 레이저포의 맥거핀적 결말에 이르면 허망한 느낌은 극에 달합니다. 게다가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걷는 여성들을 노리는 무시무시한 범죄자가 오른손에 치명적인 무기를 장착한 채 그림자 속에 숨어서 다음 사냥감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매서운 눈배를 번뜩이’다가도 ‘피부를 완벽하게 관리해주기’만 하면 다시 만날 그날만을 기다리게 된다는 건 (아마도 주된 독자층으로 상정했을) 2, 30대 여성들을 허영심만 가득한 미용지상주의자들로 폄하한 게 아닐지요.

WEB

 [할머니 17호] 전건우 지음, 웹저널 크로스로드 2014년 7월호

죽은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그리움과 사랑을 통해 임신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여자 친구와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구성도 큰 무리는 없었고, 여기에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그리움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가사 로봇을 넣은 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로봇을 극적 필요성에 의해서 너무 생명체의 비유로만 접근한 것이  결정적인 오점이 되었습니다. 목이 부러진 로봇을 고쳤더니 목소리가 변했다는 부분이나 메인보드의 소프트웨어에 누적된 오류 코드들이 기억이기도 하다는 부분(특히 로봇 공학이 아니라 로봇 행동학을 전공한다면서 전문적인 프로그래머처럼 스마트폰 하나로 코드들을 로딩해서 이리저리 지워 고치는 부분-무슨 하드디스크 조각모으기도 아니고 말이죠), 특히 ‘소프트웨어 코드를 삭제하고도 전처럼 멀쩡히 활동’한다는 부분 등 말입니다.

 [나와 함께 탱고를(Tango With Me, Darling)] 임태운 지음, 웹저널 크로스로드 2014년 8월호

일단 SF가 아닌 데다가 과학적으로 허접하고 소설적으로도 허접해서 뭔가 작품이라고도 불러주기 힘든 글들의 공통점이자 그런 글들을 피해갈 수 있게 해주는 이마 위의 인표딱지는 첫째가 등장 인물들의 서양식 이름이고, 둘째는 영문 혹은 한영 병기 제목입니다. SF의 정수를 내면화하지 못하고 여전히 남의 것, 서양의 것으로만 여기고 흉내만 내는 티가 그런 곳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물룬, 그렇다고 작위적으로 서구 SF 속 미국이나 서구의 위치에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단순하게 치환해 넣거나, 불필요하게 한국 인명이나 문화 용어를 집어넣어 작위적으로 지역색을 강조하는 이른바 ‘동네 SF’도 그다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닙니다)

임태운 씨의 지난 글들이 대개 그랬는데 이번에도 말끔히 나아지진 못했습니다. ‘이제 달만 가보면 난 은하계에 있는 별은 모두 방문해 보는 거예요. 히잉.’태양계와 은하계도 구별 못하는 단순한 오류나(근데 이건 APCTP 측의 잘못이 더 크지 않습니까? 받은 원고는 최소한의 검토나 교정도 없이 그냥 복사해서 붙여넣기 식으로 올리나 보죠? 단순한 오타나 오류가 지금까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서양식 인명 사이에 ‘당주’ 같은 일본 만화스러운 용어를 굳이 끼워넣는 고질적인 버릇은 여전하니까요. 금성에서 지구까지 32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긴급 구명정의 마법 같은 추진력의 정체가 궁금하고 2인용 우주선으로 금성까지 누비는 시대에 달 뒷면이 그렇게 인권 사각 지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점도 의문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글 전체의 완성도를 치명적으로 저해할 정도는 아닙니다.

상류층 처녀를 유혹해서 신분 상승을 노리는 하층민 출신 야심남의 음모와 파멸은 꽤 낡고 진부한 플롯인데 이 정도면 꽤 그럴싸하고 읽을 만하게 SF화 되었습니다. 임태운 씨가 [앱솔루트 바디]에서 보여줬던 감각을 다시 되찾은 것이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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