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컬쳐를 대중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종합엔터테인먼트웹진’을 표방하는 “파운틴 문화콘텐츠 웹진”에 SF에 대한 괴상한 글이 올라왔는데, 과연 표방하는 대로 ‘다양한 문화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을지 검토해봤습니다. 이하 분홍색 글씨는 해당 기사의 본문, 검은 글씨는 본지의 첨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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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라는 용어는 본래 무질서한 반문화를 비판하는 문화경향을 뜻하는 단어였지만, SF에서의 펑크는 예의 뜻을 기초로 하되 ‘사이버펑크’라는 신개념을 기점으로 널리 알려진 장르 용어이다. 근미래에 매우 현실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발달된 과학기술과 사이버스페이스,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인간, 사회 요소들의 총체적 혼란들, 그 배경이 되는 디스토피아가 기본적인 특징이다.

‘펑크 록과 밀접히 관련된 청년 하위 문화다. 펑크는 1977~80년에 영국과 대부부의 서구 대도시(특히 런던, 로스앤젤레스, 멜버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청년 하위 문화가 되었다. 부분적으로 펑크는 히피의 낭만주의 및 사회적 지위 결여에 대한 반작용이었다(일부 논자는 펑크가 자신의 실업 상태를 찬양하는 실업 청년이라고 보았다)’ ㅡ로이 서커, “대중 음악 사전”(한나래, 1999) p.331를 굳이 참조하지 않더라도 ‘무질서한 반문화’ 그 자체이지 ‘무질서한 반문화를 비판하는 문화경향’이라고 하기 힘든 펑크에 대한 요상한 정의부터 수상쩍은데첫줄에서부터 에러, SF에서 사이버펑크의 약칭도 아니고 사이버펑크 자체를 포함하는 보다 상위 갈래로 ‘펑크 SF’를 설정하는 것부터가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의문스러운데,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펑크SF의 시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필립K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1968)”이다. 필립K딕은 SF의 계보를 설명할때 3대 그랜드마스터와 함께 필수적으로 언급되는 작가다. 그가 3대 그랜드마스터에 포함되지 못한 이유는 단지 그것이 재정될 무렵에 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4대 그랜드마스터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미 수십 년 묵은 그의 사이버펑크 스타일의 작품들이 최근에 주목받으며 재발간되거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 사이버펑크가 가장 최근에 유행중인 경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이버펑크 시대를 일찍 창조했지만, 당시에는 그저 정통파 SF작가로만 알려졌을 뿐, 그가 쓰고 있는 SF들이 21세기에 폭발적으로 인기를 누릴 사이버펑크라는 점은 매니아들 외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공식적으로 영화화된 작품들(토탈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등)을 제외하고도 그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차용한 후대의 SF들(사토라레, 트루먼쇼, 스몰솔져, 토이스토리 등등)이 많다는 점에서 필립K딕과 사이버펑크가 현대 문화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할지 알 수 없어서 이만 특집 기사를 접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제멋대로 만든 가상의 하위 갈래 ‘펑크 SF’에 제멋대로 가장 유명한 시초를 정해 넣는 것까지야 지 맘이라고 해도, 재정제정될 때 생존이 필수 요건인 ‘3대 그랜드마스터’라는 요상한 설정(아니, 생존해 있으면 ‘3대 마스터’에 네 번째로 등재되는 겁니까? 필립 K. 딕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 ‘3대 마스터’ 뽑았나? 참고로 SFWA의 그랜드마스터는 필립 K. 딕 생존 당시인 1975년부터 거의 해마다 뽑았습니)은 소위 ‘빅 쓰리’에 뭔가 행덤스러운 무식한 오해를 섞어 일으킨 착오가 명백한데, ‘수십 년 묵은 사이버펑크 스타일 작품이 최근에 주목받으며 재발간되거나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것도 웃기고 ‘바로 이 사이버펑크가 가장 최근에 유행중인 경향‘이며 ’21세기에 폭발적으로 인기를 누’린다는 것도 웃기고, 문장 하나하나마다 주옥같이 웃겨서 아무래도 일부러 웃자고 쓴 글에 괜히 진지하게 낚였나 싶어질 지경인데,

사이버펑크의 정점은 영화 “매트릭스(1999)”로 이어진다. 사이버펑크는커녕, SF조차 모르는 대중에게 사이버펑크란 이런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최고최대의 작품이 매트릭스다. 매트릭스 자체에 대해서는 수십 페이지를 적어도 부족하지만, 사이버펑크만 두고 이야기하면 의외로 결론은 하나로 이어진다. 결국 사이버펑크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발전을 이루고, 인간이 살고 죽고,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성찰과 고민은 사회가 발전하면 할 수록 더욱 진지하게 봐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단지 재미있는 유행 정도가 아니고, 21세기 스타일의 인문철학인 것이다. 매트릭스에서 총알과 총알 사이에, 우주선과 로봇 사이에서 끊임없이 패러디하고 질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매트릭스 이전에는 그 뿌리가 된 만화와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1)”가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윌리엄 깁슨의 “버닝크롬(1982)”과 “뉴로멘서(1984)”가 있다. 각각 사이버펑크의 배경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요소를 창조하고 활용해낸 훌륭한 작품들이다.

까지 오면 불행히도 낚여버린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SF-영화/게임-중심주의자의 오만무지한 해프닝에 불과하군요. 영미권 사이버펑크의 찬란한 업적들을 무식하게 베껴서 끝물까지 다 빨아먹은 일본 망가들을 끝물까지 다 빠진 시점에서 도로 베낀 후안무치한 할리우드 쓰레기를 찬양하는 건 보통 강심장이나 보통 빈골통으론 불가능한 일인데, 이 글에서는 필자가 해냈습니다. 해냈어! 해냈어! 필자가 해냈어! 대단해! 사이버펑크가 논하고자 하는 것만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이 지금까지 해낸 모든 뻘짓들이 모두 결국엔 인간에 대한 것이었을 따름입니다. SF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운운하는 뻘소리들에 진절머리가 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SF는 인간이 지금까지 만들어낸 이야기 양식 중에서 유일하다시피하게 인간 이외의 것에 대해서, 인간들이 인간이라는 종의 태생적 편견에서 벗어나 세계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주는 장르입니다. 그걸 다시 인간이라는 종족의 한계 안으로 끌어들이면, 도대체 SF가 왜 있는 겁니까? ’21세기의 인문철학 스타일’같은 아는 것 개뿔도 없으면서 필사적으로 젠체하고 싶어하는 병신 헛소리에 도대체 본지가 왜 특집 기사를 할애했는지 머리를 쥐어 뜯고 싶어집니다.

최근의 사이버펑크는 갈 수록 사이버스페이스보다는 디스토피아와 인간의 고뇌 자체에 치중하는 경향이다. 근미래를 논하는 작품에서 사이버펑크를 논하지 않는 작품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클라우드아틀라스(2012)” 같은 경우에도 작품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근미래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에피소드에서 철저하게 타락하고 망가져가고 있는 디스토피아 사이버펑크를 그려내고 있다. 역시 작품에서 논하고자 하는 주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나아갈 방향이다.

공식적으로 90년대 전후에 종결된 사이버펑크에 대해서 무슨 ‘최근의 사이버펑크’입니까. 시체팔이? 고인드립? ㅇ아, 물론 저 비천한 영상물 등에선 사이버펑크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일 수 있겠죠. 그래봤자 사실은 좀비 근미래 디스토피아 영상물은 무조건 사이버펑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과감한 무식이 어떨 때는 부럽기까지 합니다.

그 밖에 사이버펑크에서 파생된 하위 장르로는 스팀펑크과 디젤펑크가 있다. 스팀펑크의 특징은 동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증기기관 수준의 산업문명이 마법적인 요소와 결합된 SF라기 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장르이다. 물론 증기기관이 등장하는 판타지물이라고 해서 다 스팀펑크는 아니고, 증기기관 수준의 문명 요소 속에서 마치 현대와 같은 수준의 일들을 해치울 수 있는 설정이 나온다면 십중팔구 스팀펑크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날렵한 전투기라던가 공중 항공모함 따위가 나온다면 거의 확정적이다. 스팀펑크는 사이버펑크와는 달리 갖춰진 주제의식으로 성립하는 구분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장르라고 할 수는 없고, 그저 설정에 의해 좌우되는 요소하고 할 수 있다. 사이버펑크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일반적으로 디스토피아와 거리가 매우 멀다. 오히려 화려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예시가 될 만한 유명한 작품으로는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이 작품은 제목부터 대 놓고 스팀펑크다), 비디오 게임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드워프-노움 종족의 각종 기계장치(워크래프트3의 라이플맨이나 플라잉머신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많은 종류의 대체역사 장르에 꽤 자주 등장하곤 한다.(예를 들면 ‘원자력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화약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ㅋㅋㅋ 팀 파워스의 소설을 하나라도 읽어봤다면 스팀펑크에 대해 ‘동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증기기관 수준의 산업문명이 마법적인 요소와 결합된 SF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장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텐데. 그런데 여기에서 본지가 이 정신나간 넋두리를 특집 기사로 다룬 이유가 있습니다. 현재 한풀 꺾이긴 해도 계속 출간되고 있는 SF들을 따라가며 읽고 있는 나름 충실한 SF 독자들 중에서도 ‘스팀펑크’라고 했을 때 팀 파워스를 떠올릴 분이 몇 분이나 계실지, 극소수만 팀 파워스 대신 필립 리브의 ‘견인 도시’연대기 등을 읽었을 것이며, 대개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등의 비주얼을 떠올리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 등미야자키 하야오를 주깁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스팀펑크의 원수이 바로 스팀 펑크라는 위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아 절망스럽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 해외의 원조 개념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이 모든 것이 뒤틀리고 왜곡되어 수입되는 제국의 변방 중의 변방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지 회의적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치광이들의 나라에선 과연 미치광이들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미치지 않은 ‘나’가 미친 걸까요? 서구의 원조 개념을 운운하는 것은 과연 적절히 균형 잡힌 객관적인 관점일까요, 아니면 서구 맹종적인 어리석고 편협하고 편향된 시각에 불과한 걸까요?

디젤펑크의 경우에는 사이버펑크과 비견될만큼 심각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첫 번째 특징이다. 이름처럼 석유로 돌아가는 기술체제를 극단적으로 증폭시킨 모습을 보여주며, 디젤문화의 특징상 필연적으로 현대화된 엄청난 종류의 무기체계가 등장한다는 특징 역시 가지고 있다. 특히 디젤문명이 꽃을 피운 20세기 후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여 이념의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반드시 민주와 공산의 대립일 필요는 없고, 예를 들면 환경주의자와 개발주의자의 대립과 같은 제3이념들 간의 대립도 디젤펑크라고 할 수 있다.(물론 양쪽 다 환경따위는 씹어먹고 매연 폭발하는 무지막지한 병기를 굴리겠지만.) 또한 디젤펑크 세계관의 암울함은 발전이 정체된채로 문명이 멸망하는 결말로 이어지며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널리 알려진 대표작으로는 HG웰즈의 소설 “우주전쟁(1898)”, 영화 “매드맥스(1979)”, 비디오 게임으로는 “폴아웃 시리즈(1997)과 “바이오쇼크 시리즈(2007)”가 대표적인 디젤펑크다. 물론 위에 언급한 모든 작품들에서 셀 수도 없는 총탄, 디젤엔진의 요란한 소음, 석유 때가 잔뜩 탄 사물과 환경 따위를 목격할 수 있다.

아, 네. 앞서 스팀펑크처럼 딱 엔하위키혹은 JoySF 수준의 영상/게임 기반의 2차 창작 계열의 오해와 무지에 기반한 용감한 관점의 피력이군요. 유일한 소설 쪽 예인 {우주전쟁}도 굳이 분류하자면 스팀펑크에 속한다는 것이 잘 보여주듯이 여긴 아예 영화/만화/게임에서만의 제멋대로 정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정말로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브 장르의 여러 명칭과 개념이 SF 소설에서 처음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과연, 이렇게 광범위하게 보편화된 대중들의 편견을 오해와 무지의 소치로 몰아붙이는 것이 과연, 정말로 과연 얼마만큼의 타당성을 가질 것인지? 나와봤자 얼마 안 되어 절판되고 극소수에게만 읽힐 뿐인 소설 중심의 SF 담론이 과연 얼마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 것인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과연 타당할지?

갖다 붙이면 펑크가 될 수 있는 장르는 아직까지도 계속 등장하고 있다. 원자력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는 ‘아톰펑크’, 생물학적 발전의 끝장을 볼 수 있는 ‘바이오펑크’ 따위도 존재한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SF펑크’ 따위의 장르를 고려해 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망상일까?(*)

그러나 ‘SF 펑크’ 같은 헛소리를 들먹이는 저런 개소리를 접하면 도저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건 대중 문화의 한 하위 장르를 어떤 매체에서 헤게모니를 쟁취할 지, 낡은 매체와 새로운 매체 사이에서의 갈등이 아닙니다. 지와 무지, 정해와 오해, 선과 악 사이의 정정당당하고 명명백백한, 비록 쪽수에 밀려 패배할지라도 끝까지 정당한 투쟁입니다. 다행히 지난 5월 26일자로 이 개뻘헛소리들의 행진은 끝이 났습니다만, 이 투쟁은 아마도 한국이나 SF 둘 중의 하나가 끝날 때까지는 계속될 것 같아 암울하기만 합니다.

장르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장르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장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표방하면서 해당 장르에 대해 무지와 오해만 재생산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관심과 애정이 아직은 무르익지 않은 것? 혹은 관심과 애정을 가장한 취지와는 무관한 다른 저열한 욕망의 발로? 한국의 대부분의 하위 문화들과 마찬가지로 SF도 여하한 종류의 비평과 담론에도 목마른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보자를 위해 도와주마’라는 미명 아래 길게는 80년대부터 계속된 박상준 씨 등의 해설을 열화복제재탕한다든가 ‘보다 대중친화적으로!’라는 미명 아래 해당 장르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정보를 확대 재생산하는 개뻘짓은 하등의 도움이 안 됩니다. 지난 연말의 모 팟캐스트 방송도 그렇고,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나 게임 같은 2차 창작물에만 기대어 쉽게쉽게 이야기하며 저열한 자기 과시와 나르시즘적 만족감만 충족시키기보다는 차라리 모르면 입을 열지 않는 게 오히려 SF를 돕는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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