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9일 세상을 떠난 이언 M. 뱅크스의 추모 특집입니다. 두 달에 한 번 업데이트하는 본지 특성상 다소 시차가 많이 나게되었습니다만, 가슴 한 쪽이 허전한 것은 부고를 들은지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군요.

(이언 뱅크스의 이름으로 나온 {말벌공장}, {다리}, {공범}, {비즈니스} 등도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들입니다만, SF가 아닌 관계로 본 기사에서는 생략합니다. 혹시 안 읽어보신 분들은 {다리}만큼은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이 한 구절 :

마인드는 4차원 공간에서 3차원 공간으로 이동해 오면서 모든 고급 기능들을 미리 꺼두어야 했다. 마인드의 정보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진 나선 속에 이진법 방식으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중성자는 핵 밖에서는, 그리고 초공간 밖에서도, 붕괴했다(그러면 양성자가 되었다. 하하하. 커맨드 시스템에 계속 머문다면 오래지 않아 마인드의 메모리 대부분은 깜짝 놀랄 만큼 분명하게 <0000000……>으로 바뀔 터였다). 그래서 마인드는 주 기억과 인식 기능을 붕괴도 사용도 못하게 막는 장(場)으로 감싸 효과적으로 동결시켰다. 대신 실제 공간에서는 예비 피코 회로를 써서 작동하고 있었고, 사고를 위해선 실공간 빛을 쓰고 있었다(참으로 모욕적인 일이었다).

사실 마인드는 아직도 모든 저장 메모리에 접근할 수 있었고(비록 그 과정이 복잡하고, 그러므로 느리긴 했지만 말이다), 따라서 모든 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고하는 것에 관해서라면, <자신이 되는 것>에 관해서라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마인드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조잡하게 압축한 복사본이었고, 완전히 미로급의 복잡함을 지닌 진정한 자신의 단순한 평면도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제한적 규모가 이론적으로 제공 가능한 선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실물에 가까운 복사본이었고, 지각력까지도 갖추고 있었다. 가장 엄정한 기준으로 본다 해도 지각이 있었다. 그러나 차례는 본문이 될 수 없고, 거리의 지도가 도시일 수 없으며, 지도가 땅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누구인가>?

(234쪽)

(국내 한정으로)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부를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문장이 잘 안 읽히는 것 때문에 번역가를 탓하는 의견들이 있는데, 이언 M. 뱅크스의 밀도 높은 묘사와 치밀한 구성을 생각해보면 번역 과정의 문제는 생각만큼 크지 않아 보입니다.

(행간에서는 잠깐 잠깐 쉬었겠지만) 정체가 탄로나서 익사 직전에 처하는 도입부에서 시작해서 결말에서 마침내 정말로 죽을 때까지, 차라리 죽는 게 편해보일 정도로 쉴새없이 연속되는 고난 속에서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살아남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가리지 않는 주인공 호르자부터가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SF들의 주인공들 중 가장 독특한 인물이라고 할 만 하며, 그런 인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쉴새없이 정신적 육체적 한계 상황으로 몰아넣는 작가의 악랄한 솜씨도 유례가 없다고 할 작품입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스페이스오페라에 대한 국내 독자들의 인식은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를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이 바뀌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한 구절 :

ㅡ 드웨러 격식 전쟁은 거대한 규모로 싸우는 결투와 비슷합니다.

파신이 하데렌세에게 말했다. 대령은 파신 쪽으로 몸을 살짝 돌렸다.

ㅡ 보통은 미적 논쟁 때문에 벌어지지요. 종종 행성 계획을 둘러싼 논쟁의 마지막 단계이고요.

ㅡ 행성 계획요?

ㅡ행성 하나에 띠와 대가 몇 개나 있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가 가장 흔하죠. 그 뒤엔 보통 짝수와 홀수로 편이 나뉘고요.

ㅡ <행성> 계획이라고요?

대령은 마치 처음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듯이 되풀이해 말했다.

ㅡ 거대 가스 행성들도, 음, 계획되는 줄은 몰랐네요.

ㅡ 드웰러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간만 충분히 있으면 행성의 띠 수를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정말 이렇게 하는 걸 확실하게 본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할 순 없죠.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 일을 한다는 행위가 아니라 원칙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세상에 살고 싶은가? 그게 문제입니다.

(390쪽)

세 편의 SF 중에서 가장 유쾌한 작품인데, 이는 전적으로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SF들을 통틀어 가장 개성 넘치며 매력 만점인 외계 종족 드웰러들 덕분입니다. 광속 이하에서의 성간 항해마저도 조금 불편하고 시간이 걸리는 여행으로 치부하는, 종족 전체의 역사는 1백억 년을 상회하고 개별 개체의 수명도 수십억 년에 달하는 드웰러들의 기묘한 사회를 거울 삼아 눈 앞의 이익에 매달려 애면글면 살아가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통렬하게 풍자하는 이언 M. 뱅크스의 필력은 놀라울 따름이고요.

이 한 구절 :

두 걸음을 더 내디디면(드론에게 말하고 드론의 대답을 듣던 구게는 무의식중에 게임 감각으로 느끼며 깨달았다), 이제 옆에 오게 되는 것은…… 구게는 문제를 분석하는 데 한 걸음이 더 걸렸다……. 뭔가 나쁜 것, 뭔가 거슬리면서 조화롭지 않은 것…… 뭔가가 있었다……. 다른 뭔가가. 구게가 왼쪽으로 지나치려는 세 사람에게 뭔가 잘못된 점이 있었다. 마치 숲 영토에 숨은, 아직 배치되지 않은 유령 말들처럼……. 구게는 이 무리에 정확히 뭐가 잘못됐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바로 알았다. (점점 더 커져 가는 게임 감각이 구게의 의식마저 차지하겠다고 아우성쳤다.) 구게는 저곳에 말을 하나 놓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터였다.

……다시 반걸음…….

……그리고 깨달았다. 구게가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게임 말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285쪽)

alt. SF 9호에서 이미 리뷰했으니 다시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권말 해설에서부터, ‘컬처 시리즈’에 입문하기에는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보다 {게임의 명수}가 나으리라고 하는데, 게임이라는 보다 친숙한 소재를 활용한 점에서는 보다 대중적일 수 있으리라 긍정되는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첫장에서부터 주인공이 쉴새없이 절대절명의 위기의 연속 속에 내던져지는 {플레바스를 생각하라}에 비해 다소 완만하고 천천히 메인 플롯으로 진입하는 {게임의 명수}가 정말로 보다 쉬운 작품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요는 {게임의 명수}가 잘 안 읽힌다고 해서 이언 M. 뱅크스의 짜릿하고 황홀한 모던 스페이스오페라의 세계를 멀리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

.

.

이언 M. 뱅크스의 다른 좋은 SF들이 국내에 계속 번역 출간되기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탁월한 상상력과 구성력, 문장력에 감탄하고 감동받을 수 있기를, 그럼으로써 국내 창작 SF가 한 계단 더 올라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Advertis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