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거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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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농담입니다만, 일말의 진실도 섞여 있긴 합니다. 우선 먼저 짚어놓고 들어가야 할 것은, 한국의 SF 독자층의 존재는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특정 시대 특정 조건들의 산물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70년대부터 80년대 사이의 과학입국 분위기와 90년대 컴퓨터 통신망 도입(에 굳이 하나쯤 더 추가하자면 90년대 사회주의의 몰락)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만큼이나마) 팬덤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현재 SF 독자층 생성의 특수성을 생각해보면 신규 독자층의 대규모 유입이나 팬덤 세대 교체는 요원할 뿐아니라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실제로, ’70~80년대에 유년기를 ‘아이디어 회관’ 등 아동용 축약판 SF와 텔레비전 일본 만화와 함께 보내고, 90년대에 사회과학 출판사들에서 찔끔찔끔 나오던 일본어 중역판 SF들로 미적대며 남아 있다가 결정적으로 ‘그리폰 북스’ 때문에 갱생탈덕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어른이 되서도 여전히 SF나 읽으며 살 수 밖에 없게 되어버린’ 전통적인 독자층에 새로운 독자군이 유입된 것은 90년대말~2000년대 초반, 1) 프리챌 등 4대 통신망 외 새로운 인터넷 커뮤니티의 등장과 2) ‘행복한 책읽기’출판사의 SF 총서 홈페이지 개장, 2000년대 중반 이후 3) 디시인사이드 판타지 갤러리의 몇몇 갤러들이 (양판소 이후) SF 쪽을 기웃거림인생종침의 세 경우가 전부였고, 셋 다 규모는 미미했다고 하겠습니다. 게임이나 만화를 통한 장르 팬층의 확대를 주장했던 모 사이트의 현실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예의겠죠.)

편해

포기하면 편한 것은 맞지만, SF는 마약과도 같아서, 혼자 즐기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인생을 종치고즐거움을 나누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SF의 마력을 모르는 순진한 어린 양들을 어떤 책을 소개하면 인생 종치게우리와 함께 SF를 즐기게 할 수 있을지 한 번 생각해봅시다. 전통적으로 많이 이야기된 주제이지만, 이번 특집에서는 보다 현실성 있게,

1) 현재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SF

2) SF의 재미를 제대로 가지고 있는 SF

라는 두 가지 기준을 적용해보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SF라도 절판되었다면 추천작으로 소용이 없으며, 그 한 권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나 다 읽은 다음 다른 SF를 찾아 읽게 할 수 없다면 그 또한 추천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 기준에 따른 alt. SF의 추천작은,

1. 미스터리 / 추리 / 스릴러에서 독자들을 빼오자모셔오자

  

아무래도 새로운 독자를 처음부터 만들어낸 것보다는 기존의 다른 장르 독자를 빼오는 게 더 쉽겠죠. 근래에 한풀 꺾였다고는 해도 전통적으로 부자동네독자층이 넓고 두터운 추리/미스터리/스릴러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강철 도시} 이래 SF와의 교집합의 역사도 유서깊으니 특히 만만안성맞춤이라고 하겠습니다.

F. 폴 윌슨의 {다이디타운}은 레이먼드 챈들러나 대실 해밋 등 하드보일드 독자들에게 던져볼 만한 떡밥이며, 알프레드 베스터의 {파괴된 사나이}는 보다 고전적인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 팬들에게도 꽤 매력적일 작품입니다. 존 스칼지의 {작은 친구들의 행성}은 존 그리샴 류의 법정 스릴러 독자들을 낚아오기 좋아보이고요.

진입 장벽은 아무래도 {파괴된 사나이}>{다이디타운}={작은 친구들의 행성}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파괴된 사나이}는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베스터의 솜씨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 것이고(이후 순서는 {타이거! 타이거!}로 확실히 잡은 다음에 {바벨-17}이나 {뉴로맨서}로 확장), {다이디타운}은 도입부의 설정 소개만 참고 넘기면 본격적으로 찌질한 주인공의 찌질찌질 곤경이 연속되니 역시 빠져들기 쉽겠죠(이후 순서는 {얼터드 카본}으로 확실히 잡은 다음 마찬가지 {뉴로맨서}로 마무리). 존 스칼지야, 첫장 펼친 다음부터는 신경 안 써도 자동으로 {노인의 전쟁} 3부작→{스타십트루퍼스}→{영원한 전쟁}→행덤‘행복한 책읽기’ SF총서와 폴라북스 ‘미래의 문학’으로 게임 끝.

2. 뷔페에서 골라먹게 하자

90년대 독자층이 형성된 데는 도솔과 고려원, 서울창작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여러 단편선들을 쏟아냈던 것도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는데 장편에 비해 아무래도 심리적 부담이 덜한 점도 있고, SF 장르 자체가 장편보다는 단편에서 본연의 재미가 더 잘 살아나는 점도 있고, 무엇보다 개개인마다 다른 독서 취향에 추천한 장편 한 권이 제대로 맞아들어가길 기대하는 것보단 여러 작품 중 하나가 맞아떨어질 확률이 좀더 높은 점도 있어서, SF 포교에는 장편보다 단편선이나 단편집이 더 적절하겠죠. 그 중에서도 도솔에서 나온 {세계SF걸작선}과 {세계휴먼SF걸작선}이 비교적 시대별, 하위장르별, 주제별 등 여러 면에서 균형 잘 잡힌 선정으로 유명했고, 한 권으로 합친{마니아를 위한 세계 SF 걸작선}도 지난 십여 년 동안 서점에서 자리를 지키며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는데, 이번에 확인해보니 어느샌가 드디어 절판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각각 어마어마한 두께에 네 권으로 나온 {SF 명예의 전당}은 제목도 거창한데, 부담스러운 분량은 단점, 좋게 말해 고전적이고 고색창연한(솔직히 말해 케케묵은 구시대적인) 단편들이라는 점은 오히려 장점입니다. 1권에서는… [전설의 밤] 이 걸작이긴 한데, 처음 SF를 읽는 사람에겐 분량이 조금 부담스럽겠고, 마지막에 수록된 세 작품, 제임스 블리시의 [표면장력]과 아서 C. 클라크의 [90억 가지 신의 이름], 톰 고드윈의 영원한 걸작 [차가운 방정식]을 먼저 읽도록 권하면 어떨까요. 2권은 스탠리 와인봄의 [화성의 오디세이]나 대니얼 키스의 [앨저넌에게 꽃다발을],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세 작품이 제일 먼저 읽을 만 하고 나머지 작품들도 다들 아기자기하고 무난하고 톡톡 쏘는 편이어서, 네 권 중에서 한 권 추천하기에는 제일 적당해 보입니다. (3, 4권은 처음 권하기에는 별로 적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1, 2권에서 SF의 참맛을 알게 되어 보다 분량이 많은 작품도 소화할 수 있게 되면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유니버스]나 존 W. 캠벨 주니어의 [거기 누구냐?]가 꽤 짜릿한 재미와 감동을 주겠습니다만.)

특정 종교에 한국식으로 편향된 사람이 아니라면(애초에 SF라는 장르 자체가 특정 종교나 이념으로 마음이 닫힌 사람들에게는 아주 많이 무리긴 하겠습니다만) {갈릴레오의 아이들}이 소재별 단편선임에도 불구하고 SF 장르 특유의 재미가 골고루 담긴 좋은 단편들이 많은 쓸 만 한 미끼입니다. 어슐러 K. 르 귄의 따분한 단편이 제일 앞에 있는 게 좀 에러긴 하지만, 단편선이나 단편집은 원래 순서에 상관없이 땡기는 것부터 읽어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조지 R. R.  마틴의 [십자가와 용의 길]이나 로버트 실버버그의 [침팬지의 교황]부터 읽기 시작한다면 무난하고 순탄하게 SF에 진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댄 시먼스의 {히페리온}은 단편집이 아닙니다. 하지만 읽어본 분들은 동의하시겠지만, 현재 구할 수 있는 어떤 단편선들보다도 {히페리온}의 각 에피소드들이 훨씬 더 강렬하고 짜릿하며 SF의 여러 하위 장르들을 그 핵심적인 재미들을 제대로 찌르고 있습니다. ‘열린책들’ 특유의 빡빡한 편집과, 누가 현대(라고 해도 이미 20년 전 작품이지만) SF 아니랄까봐 감 잡기 힘든 도입부만 극복하고, 사제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까지 시선이 닿기만 한다면 {히페리온}을 다 읽고 {히페리온의 몰락}까지 읽어치우는 것은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돌아갈 수 없는 선을 이미 넘어선 상대방의 남은 인생에 애도와 사죄의 마음을 담아 이언 M. 뱅크스라는 작가가 있다고 알려주면 되겠습니다.)

3. 정공법

뭘 구차하게 SF 아닌 척하고 단편 쪼가리 흔들어서 꼬시고 낚고 합니까. 그냥 단행본 하나 뙇 던지면서 이게 바로 SF다다시는 SF를 무시하지 말아라외칩시다.

  

일반인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진 SF의 간판, 빅3를 활용하자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과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장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을 거친 다음에 아서 C. 클라크로 확실하게 마무리.)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장편으로는 고양이나 미소녀 등 시대를 앞서도 너무나 앞선 듯한 걸작 {여름으로 가는 문}이 가장 적당하겠죠.

본지가 안티 아시모프로 찍힌 것은 이미 오래인 듯 한데, 제대로 된 완역이었든 아니었든, 국내에 출간된 적이 있든 없든 장편 이상 분량의 아이작 아시모프의 SF들이 현재 시점에서 수준 이하라는 것이지,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단편들이 시대를 초월한, SF의 가장 핵심적인 재미와 감동을 담고 있다는 것은 본지도 분명히 인정하는 바입니다. (만일 아이작 아시모프의 제대로 된 걸작 단편선집이 출간되어 있기만 했다면야 본 특집은 필요하지 않았겠죠)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어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불멸의 삽질인 ‘파운데이션’ 시리즈나 다시 나온다고 하니, 별 수 없이 대안이나 모색해야겠습니다. 폴 앤더슨의 {브레인 웨이브}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장점은 잘 살리고 단점은 어느 정도 극복한 수작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기발하다고 통하는 처참하게 한심한 한국 독서계에 제대로 먹힐 작품이랄까요.

{엔더의 게임}은 {스타십 트루퍼스}와 더불어 이미 충분히 검증된 떡밥이자 미끼입니다. 영화까지 개봉한다니 불우한 비신자들에게 SF를 포교하기에 최적의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다만 {엔더의 게임} 한 권으로 끝내야지 후속작이라든지 외전이 있다는 것은 가능한 한 감추는 게 좋을 것입니다.

4. 문과생 전용

인류의 좁은 테두리를 넘어 우주 보편적인 SF에게 이과 문과 구분이 있을리 없습니다만, 일반인들에게 만연한 편견 중 하나가 SF는 이과 영역이라는 것도 있고, 일반적인 선입견과 달리 이과 출신들보다는 문과 출신들의 독서량이 훨씬 좁고 적은 경향도 있으니, 문과 계열을 위한 별도의 미끼들을 준비해봅시다.

  

시대순으로 레이 브래드버리, 로저 젤라즈니, 테드 창이면 끝날 것 같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이나 {화씨 451}도 괜찮겠습니다만, 문과생들의 심금을 울리는 데는 {화성 연대기}가 제일 나아보이는군요. {신들의 사회}가 이미 절판되었으니 로저 젤라즈니의 진수를 보여주기에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드림 마스터}요? 제정신이십니까?) 테드 창은 근래에 실전에서 가장 충분하고 확실하게 검증된 미끼이자 떡밥입니다. 다른 SF는 읽어보지도 않고 테드 창만 유일무이하게 대단한 작가인줄 무식하게 착각하는 일각의 지독히 병신스러운 반응에 대해 부정적인 것이었을 뿐 본지가 테드 창의 작품들 자체의 성취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5. 신토불이~ 신토불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근래에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김치한국적 SF론’은 SF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매력이라 할 ‘우주적 스케일의 상상력에 의한 거시적인 사변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거세하는 바보짓이라고 하겠습니다만, SF를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SF란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다른 세계 이야기’라는 선입견이 박혀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지명이나 인명 등이 현대 한국 사회로부터 나온  SF들은 제한적인 효용을 가질 것도 사실이겠고요.

 

리뷰란에서도 언급했지만 듀나의 최근 소설들은 SF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초점을 맞춰 한국어로 쓰인 SF의 최전선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국인들을 주인공으로 한다고 해도 처음 SF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기에는 힘듭니다. 10여 년 전에 나온 {태평양 횡단 특급}은 (출판사부터가 상징적인데) 듀나의 최근 경향이 확고해지기 이전의 세련되면서도 말랑말랑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적당해 보입니다.

듀나→김보영이든 김보영→듀나든 순서는 상관 없겠죠. 김보영 씨의 두 권의 단편집 중에서는 ([0과 1 사이]를 포기하기 아깝지만)상대적으로 SF적 색채가 옅은 작품들이 더 많이 수록된 {진화신화}보다는 [종의 기원]과 그 속편, 그리고 ‘미래로 가는 사람들’ 연작들을 수록한 {멀리 가는 이야기}쪽이 보다 좋은 선택이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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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명심해야 할 것은 취존. 지나친 SF부심은 일반인들에게 SF에 대한 거부감과 편견만 키울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도 있는데 한 번 읽어볼래?’ 정도의 권유가 제일 적절하겠죠. 모 종교의 열성 신도들이 길거리나 지하철, 심지어 가가호호 방문하며 포교하는 것이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인지 한 번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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