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컴퓨터 커넥션} 앨프리드 베스터 지음, 조호근 옮김, 폴라북스.

그의 전성기는 50년대였고, SF계를 떠난지 근 10여 년만에 다시 돌아온 뒤에는 과거의 찬란한 명성을 되찾기는 커녕 깎아먹기만 했을 뿐이라는 다소 비극적인 이미지가 90년대 ‘그리폰 북스’ {파괴된 사나이}의 권말 해설 이후 20여년 간 국내 독자들에게 고정관념처럼 확립되어 있던 상황 속에서 번역, 출간된 이 작품이 호사가적 호기심ㅡ과연 얼마나 망작이길래ㅡ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역자 후기부터가 그런 호기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망작보다는 괴작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플롯으로부터 자유로운 에피소드들이 의미도, 목적도 없이 현기증 날 정도로 끝없이 연쇄되는 장관은 할란 엘리슨의 말마따라 {트리스트럼 샌디} 등을 떠올리게 할 지경인데, 이건 기승전결의 명쾌한 플롯을 기대받는 장르소설로서는 득보단 실이 많은 부분입니다. 그리고 ‘정신적 갈바니 충격으로 세포 내의 노폐물을 전부 떨어버리고 분자인간, 줄여서 몰맨이’ 된다든지, ‘…죽어서 모든 신경세포가 고립되었을 때, …각각의 비트가 뇌세포 하나하나에 자리를 잡’는다는 등의 중심(이랄 게 있다면 얘네들 정도겠죠) 설정은 SF로서는 (아무리 관대해지려 해도 1900년대 초창기 SF가 아닌 한) 치명적인 결함이고요.

그러니까 ‘SF로서는 애초에 실격, 소설로서도 파탄’입니다. 그런데 망작이 아니라 괴작인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 하나는 확실하게 있으며(일반적인 SF의 재미는 아니지만), 심지어 약간은 감동적이기 까지 하다는 점 때문입니다. SF로서도, 소설로서도 꽝이지만 알프레드 베스터의 SF 소설로서는, {파괴된 사나이}와 {타이거! 타이거!}의 작가의 SF 소설로서는 (앞서 이야기한 고정된 이미지의 효과도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던 옛친구를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을 때의 반갑고 기쁜 마음이랄까요, 심지어 망가진 듯한 부분마저도 가슴 한켠을 찡하게 하는 맛이 있는 것입니다.

280, 282쪽의 난데없는 악보의 난입, 그리고 334쪽의 초현실주의적인 의식의 흐름 부분은 특히나 우리 옛친구의 예전 그대로의 정다운 얼굴이라고 하겠습니다. 뉴웨이브와 사이버펑크 양 계열 모두의 비조라느니, 휴고상이 그를 위해 만들어졌다느니,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걸작 SF로 다시 썼다느니 같은 허명에 혹한 것이 아니라, B급 감수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시대를 초월한 특급 오락물을 만들어낸 그 재주에 반했던 독자라면 호사가들의 이러쿵 저러쿵에 아랑 곳 않고 이 책도 즐겁게 읽을 것입니다.

 {타임십} 스티브 백스터 지음, 조호근 옮김, 폴라북스.

‘미래의 문학’이라는 브랜드가 사실은 ‘미래의 괴작’이 아닐까 의심스럽던 차에 나온 정통 SFㅡ진짜진짜 오리지날 원조 정통 SF입니다.

물론 원조나 정통, 오리지날을 따지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도 없을 것입니다. 할 일 없는 맛집 블로거들이나 실컷 하고 놀라지요.

그렇지만 H. G. 웰즈의 {타임머신}의 결말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천의무봉으로 이어 시작하더니 곧장 평행우주와 대체역사, 다이슨 구, 스팀펑크, 인류의 진화, 인공 지성, 은하계 식민 같은, SF의 주요 주제와 소재, 서브장르들을 종횡무진 누비며 이 소설이 독자에게 쏟아부어주는 쾌감, 읽어나가는 동안 자신의 보잘것없이 비루하고 왜소한 의식이 아득한 과거로부터 끝없는 미래로, 우주의 시작에서 끝으로 한순간에 날려버려지는 것을 느낄 때의 그 쾌감을 표현할 다른 말을 찾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게 바로 SF가 아니면 도대체 뭐가 SF겠습니까.

(타임머신을 만들어낸 건 좀 수상하긴 하지만) 19세기의 실용적 공학자에게 또다른 몰록 종족의 교사가 불확정성의 원리와 불완전성의 정리를 설명하는 장면이 가장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을 텐데, 원작 {타임머신}의 스타일 덕분인 고풍스럽고 묵직한 문체로, (물론 최신 SF들처럼 과격하고 급진적이지는 않습니다만) 양자역학 등 20세기 과학적 성과로부터 착실하게 길어올린 아이디어들을 견실하게 펼쳐내는 솜씨는 굳이 권말해설을 들춰보지 않아도 딱 아서 C. 클라크스러우며, 차곡차곡 쌓아올린 아이디어들이 은하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마침내는 시간의 끝이자 새로운 우주의 시작으로 향하는 더할 나위 없이 거대한 스케일은 아서 C. 클라크로부터 다시 거슬러 올라가 올라프 스태플든까지 닿습니다. (재미는 손톱만큼도 없는 올라프 스태플든이 그림자는 길긴 무지 길군요.)

아래의 ‘보르코시건 시리즈’와는 정반대로(그리고 여타의 SF 아닌 소설들과도 당연히 정반대로), 작품 전체의 초점이 등장인물과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철저히, 인간 사회와 인류, 태양계와 우주 전체에 맞춰집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우주이며,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원은 갈등-대립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SF와 SF 아닌 소설이 나뉘는 지점 아닐까요?)

700쪽을 넘기는 두께에 선뜻 책장을 열기 힘들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한 장 한 장 줄어가는 아쉬움에 안달복달하게 될 것입니다.

  {명예의 조각들} / {바라야 내전}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김창규 / 최세진 옮김, 씨앗을 뿌리는 사람.

{명예의 조각들}은 SF의 탈을 쓴 로맨스물, {바라야 내전}은 SF의 탈을 살짜 쓴 포스트 로맨스물입니다. 각각 ‘1대 남주 여주는 어떻게 맺어졌나’, ‘결혼한 1대 남주 여주는 어떻게 2대 남주를 낳고 살아가나’ 정도의 부제를 달면 좋을 것 같군요.

이미 {마일즈의 전쟁}과 {보르 게임}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던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이야기 솜씨는 여전히 감탄스러운데, (이 두 권을 읽고나면 {마일즈의 전쟁}을 다시 읽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것입니다) 유감스럽지만 두 책에서 아쉬웠던 점들도 여전히(혹은 이미 여기서부터) 보입니다.

일찍이 고장원 씨가 [슬픔의 산맥]에 대해서 비슷한 말을 했었지만, ‘SF가 아니어도 됐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SF적 요소는 작품 전반에서 피상적으로 장식되어 있을 뿐이며, 작품이 주는 재미의 핵심은 등장 인물들의 매력과 쉴새 없이 사건이 이어지는 스토리의 흥미에 있습니다. (물론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시선은 이쪽이 훨씬 깊고 폭넓습니다만)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 영웅 전설} 후반부가 연상될 정도죠. 러시아 장교와 프랑스 여공작원이 에게해나 흑해 귀퉁이의 무인도에 조난당한 이야기로 바꿔도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어 보일 지경입니다.

그러나, 권총을 광선총으로, 범선을 우주선으로 치환함으로써 진지하지만 따분했던 장르에 짜릿한 오락성을 부어넣으며 섞여들어 온 것이 스페이스오페라의 기원이자 본질이라면, 오히려 {은하 영웅 전설}과 ‘보르코시건 시리즈’야말로 스페이스오페라의 본령에 충실한 작품들이며, 앞 문단은 다만 편협하고 완고하고 고집불통이며 SF 대중화에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뿐인 구닥다리 팬의 투덜거림에 지나지 않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언 M. 뱅크스의 ‘컬처 시리즈’를 이미 2007년부터 읽어온,  좀더 멀게는 2004년에 스티븐 백스터의 [오리온 전선에서]를 이미 읽었던 우리들은 스페이스오페라라는 장르가 문학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완성될 수 있는지, SF 장르 최심층부에 얼마만큼 가닿을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거기에 가야한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만, 그런 곳이 존재한다는 것, 누군가는 가기도 했다는 것을 잊기란 힘든 일입니다.)

실컷 투덜거렸는데 뭐 더 남은 게 있을까요?

있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두 권은 기존에 출간된 두 권 및 중편들마저도 새롭게 다시 읽게하는 단서를 선물처럼 품고 있는데, 바로 이야기의 핵심에 박혀 있는 유일한 SF적 요소라 할 ‘인공 자궁’입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춰보면 {명예의 조각들}은 ‘가부장적 봉건 사회인 바라야에 어떻게 인공 자궁이 도입되게 되었나’, {바라야 내전}은 ‘도입된 인공 자궁이 바라야의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이며 억압적이고 경직된 사회 구조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의 이야기이며, 이전에 이미 우리도 읽은 바 있는 {마일즈의 전쟁}과 {보르 게임}, [슬픔의 산맥]은 ‘인공 자궁에 의해 비로소 존재 가능하게 된 문제적 인물이 어떻게 바라야 사회를 실제로 바꿔나기 시작하는가’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어슐러 K. 르 귄이나 옥타비아 버틀러, 조안나 러스나 제임스 팁트리 2세들의 어떤 소설들보다도 더, 과학 기술의 발달이 남성과 여성, 사회에 어떤 의미, 어떤 가능성,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가장 깊이 파고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이 과연 타당한 해석일지 오독일 뿐인지는 앞으로 계속 출간될 나머지 작품들이 말해주겠죠.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북스피어.

지금까지 테드 창이 쓴 작품 중에서 가장 긴 작품입니다.  단편과 장편은 단순히 분량만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재능이 많은 작가라도 단편만 쓰다가 장편을 쓰면 처음에는 제대로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테드 창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서술은 전통적인 전지적 작가 시점과 다큐멘터리적 나레이션 사이, 요약적 제시와 보여주기 사이를 어설프고 어정쩡하게 방황하며 거칠게 흔들리고, 구성도 늘어난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해 헐겁게 느껴집니다. 단편에서였다면 깔끔하면서도 여운을 남겼을 열린 결말도 중편 이상의 긴 이야기의 끝으로는 미흡하고 부족해 보이고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치밀한 단편들이 주었던 포만감을 기대하며 책장을 펼친 독자들이 만족하며 마지막 장을 덮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잠깐, 그런데 우리는 왜 테드 창을 읽는 거죠? 구성 때문에? 문체 때문에? 스토리 때문에? (아니면 그 화려한 수상 경력 때문에?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추천평들 때문에? 교회 오빠 같은 동안 때문에?) 이건 결국 다시, 우리는 왜 SF를 읽는가?라는 묻기 힘들고 대답하기 힘든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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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의 21세기 적자입니다. 19세기 근대 과학의 발달과 기독교의 세계관, 빅토리아 시대의 윤리관이 함께 빚어낸 독특한 테마 : 스스로 자의식을 가진 존재를 창조한 인간의 고뇌ㅡ공포와 불안감, 죄책감, 책임감, 동족혐오ㅡ의 최신판으로서, 테드 창은 그 특유의 성실함과 집요함으로 기존의 다른 SF들이 다루지 못했던 스케일에서 이 주제를 물고 늘어집니다. 우리가 테드 창을 왜 읽습니까. 인물 보다는 상황, 플롯보다는 아이디어, 무슨 주제든, 이전의 다른 SF들이 가닿지 못한 깊이까지 끝까지 파고드는 그 힘 때문이 아닙니까?

아마도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갈 독자층은 어느덧 애아빠 애엄마가 된 올드SF팬이거나, 그런, 인생의 다시 헤어나오지 못할 험악한 지옥에 아직 빠지지는 않았어도 애견이라든지 애묘 라든지 비등한 수준의 저주를 받은 독자들이 아닐까요. 어느 순간 당신에게 존재 전체가 철저하게 의존하는 존재가 생긴다면. 살아 숨쉬지도 않고, 어딘가 쓸모가 있는 것도 절대 아닌 것이, 오직 가진 것이고는 스스로를 인식하고 당신을 인식하고 스스로와 당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를 인식하는 자의식 밖에 없는 것이 당신에게 생겼을 때, 그것이 지금까지 당신의 모든 삶ㅡ인간 관계와 경제 상황, 인생 계획의 단절과 변화를 요구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건 단순히 피조물을 만든 창조주의 고뇌 수준이 아닙니다. (이 정도로 고뇌하는 창조주라면 기꺼이 피조되겠습니다.)

인공 지능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는 ‘게놈 엔진’이라는 모호한 용어로 설명이 모두 끝납니다. 자기 인식과 학습이 가능한 소프트웨어는 이미 소설 바깥에서 준비되어 있었고, 독자들은 작가를 따라 이 소프트웨어가 실제 현실에서 어떤 경로를 따라가게 되는지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묶인 다수의 이야기들에서 (세계의 변화를 중시하는 작가답게) 상황은 인물을 압도하고, 등장 인물이 할 수 있는 것은 변화에 맞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변화를 받아들이고 내면화하여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뿐입니다. 이전 작품들의 그런 경향의 연장선 상에서 이 작품의 결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것이라는 구태의연한 일반론을 빌려오자면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명 주기}는 지금까지 대개 그냥 스쳐지나가는 소도구에 불과했던 인공 지능을 주인공의 위치에 놓은 몇 안 되는 작품들 중 최신작이자 최고작으로 꼽을 만 합니다.

MAGAZINE

 [홈스테이] 배명훈 지음, 과학동아 2013년 7월호.

지난 3월호의 [유물 위성]은 그래도 소품이었다고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던 반면 지난 달의 [홈스테이]는 더이상 그러기 힘듭니다. 매너리즘, 자기 복제 밖에 없는 태작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한동안 시력을 제한받는 안과 수술이라면 친인척을 찾거나 간병인을 고용하거나 병원에 입원하는 게 당연할 텐데, 쿠데타가 일어난데다 인종청소의 가능성이 짙어지는 후진국에 첩보 업무로 파견나가서 하루종일 집을 비우는 전 애인을 찾아간다는 도입부부터가 SF이기 이전에 소설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개연성을 많이 깎아버리는 무리수인데, 단편적인 설명 몇 마디에서는 군대나 군수산업과의 관련성을 제시받기 힘든 주인공이 군사용 특수 관절의 작동음을 구분하고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훈련받은 군인을 과도 하나로 제압하는 초능력을 발휘하는 중반부에서도 이는 회복되기는커녕 더욱더 처참하게 심각한 상태로 굴러 떨어질 뿐입니다. ‘안경사우루스’ 같은 재미 없는 말장난으로 대충 봉합하는 결말에 이르면 ‘답정너’ 같은 유행어가 떠오릅니다. ‘결말은 정해졌고 너는 칭찬만 하면 돼.’

 [우리의 이름은 별보다 많다] 김창규 지음, 과학동아 2013년 8월호.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구성 상의 굴곡 없이 서술자의 담담한 회상과 내적 독백으로 이루어진 소품입니다. 김창규 씨 특유의 하드한 설정과 서술이 눈에 띄는데 그에 비해 가장 중점적으로 제시되는 사건과 그에 담긴 메시지는 살짝 진부한 느낌도 없잖게 평이합니다. 그 대신 결말에 제시되는 비전은 꽤 근사하네요.

WEB

 [하필이면 타이탄] 듀나 지음, 웹저널 크로스로드 2013년 7월호

현재 한국에서 활동 중인, 한 손으로 꼽기에 간신히 넘치는 숫자의 SF 작가들 중에서 가장 멀리 나가 있는 작가를 꼽으라면 결국 듀나 외에는 아직까지 대안이 없어 보입니다. 연작의 일부분으로서 자체의 독립성이나 완결성이 많이 부족한 이 단편 역시 그러한 평가를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예로서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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