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면만 보고 좋지 못한 면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침묵하거나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면과 좋지 못한 면 모두 직시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며 미워할 것은 미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럼으로써 그 모든 것을 끌어 안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호 특집에서는 국내에 소개된 해외 SF 중에서 망작을 꼽아보겠습니다. 한국 SF는 사실상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면 모조리 수상한 사이비 SF들이니 거론할 필요가 없고, 해외 SF 중에서도 마찬가지로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사이비 SF들은 제외하기로 합니다.  (한 눈에 척 봐도 멀쩡해보이지 않는 작자들이 열심히 SF라고 우겨도 별로 SF 아닌 거 같고, SF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어 보이는 괴작들의 세계는 밑도 끝도 없으니까 우선 멀쩡한 작가들의 멀쩡하지 않은 작품들만 꼽아보죠. 그리고 걸작들의 우열을 가리는 게 언어도단이듯 망작들에게도 나름 대로의 자존심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순위를 매기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중에서 얼마나 읽어보셨습니까? 여러분은  SF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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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슨 스콧 카드, ‘엔더 위긴 시리즈’

({엔더의 게임}과 {사자의 대변인}은 빼고)

   

읽은 지 오래되어 세부적인 부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참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책들입니다. {엔더의 게임}에서 보여줬던 오락성이나 {사자의 대변인}에서 보여줬던 진지함은 어디론가 다 워프시켜 버리고 남은 것은 대책없이 조악하고 불쾌한 오리엔탈리즘({제노사이드})과 허황하고 지루한 관념론의 횡설수설({엔더의 아이들)}뿐입니다. {엔더의 게임}은 본지에서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는 걸작이고, {사자의 대변인} 역시 인기는 덜하지만 카톨릭 계열 SF, 보다 넓게는 종교 SF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망설임없이 추천할 수 있는 수작인데 비해 그 뒤를 이은 졸작들에 대해서는 사이렌을 높이 울려 폭탄 경보를 발령해야 합니다.

그렉 베어, {신의 용광로}, {다윈의 라디오}

  

그렉 베어는 {블러드 뮤직} 빼고는 죄다 꽝이니 심지어 {블러드 뮤직}마저도 그게 과연 정말 괜찮았었던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신의 용광로}와 {다윈의 라디오}는 모두 줄거리 요약만 보면 대단히 흥미로운데, 실제로 읽어나가면 흔해빠진 미국 스릴러 소설처럼 진부하고 지루하고 지리멸렬합니다. 어쩌면  {블러드 뮤직}마저도, 기억 속의 축약된 줄거리가 흥미로웠을 뿐이지 실제로 읽어보면 마찬가지의 감상만 건지게 될 따름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렉 베어의 SF들은 모두 저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잘못 불려나와 추한 물질 세계에 갇혀버린 불행한 아이디어들의 무덤이라고 하겠습니다.

교주님L. 론 허버드, {최후의 등화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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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유명한 {배틀필드}를 비롯해서 번역 제목부터 망작의 스멜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투 더 스타}나 {스티비 젭슨의 테크니칼러 판타지 여행}(이야! 번역 제목 한 번 끝내준다!)은 꼭 넣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많으시겠습니다마는, 사실 그냥 셋 다 (그 중에서 {배틀필드}는 좀더 빼서 찬찬히 들여다봐줄 여지가 더 많지 않습니까? 물론 전반부에 국한한 이야기입니다만) 그렇고 그런게 특성인 스페이스오페라들 중에 하나둘로 인식을 전환하면생각해보면 나쁘지는 않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국내에 나온 교주님L. 론 허버드의 저서(물론 사이언톨로지 계열은 죄다 뺴고)들 중에서는 이 {최후의 등화관제} 빼고는 모두 그럭저럭 괜찮은 / 혹은 의외로 괜찮은 / 심지어 {공포}의 경우에는 아주 정말 빼어나게 괜찮은 장르 소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 더 스타}는 시간 때우기 좋은 스페이스오페라고, {스티비 젭슨의 테크니칼러 판타지 여행}도 ‘아라비안 나이트’나 (좀더 장르스럽게는) 러브크래프트의 몇몇 소설들을 연상시키는 맛이 꽤 괜찮죠.

네, 그럼 이제 {최후의 등화관제}를 까봅시다. 다른 모든 시시껄렁한 ‘무늬만 SF’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 SF적인 요소는 참을성 많은 독자들에게 도둑처럼 구원이 닥치듯이 맨 마지막에나 살짝 나오는데, 이 소설을 진지한 반전 소설으로 읽지 않는 한(그래도 실망스러워질 테지만), 그러니까 천박한 상업적 장르소설의 경계 안쪽에서 읽는 한, SF를 기대하고 이 책을 펴들은 독자들은 실망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이 작품의 본령은 오히려 저 전설적인 히로익 판타지의 자장 안에 있고, 그것도 마법이나 과학 없이, 암울하기 짝이 없는 구닥다리 1, 2차대전식 보병 전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전쟁의 문학적 반영에 관심이 많은 씹덕독자들에게는 감명을 줄지 모르겠으나, 원초적인 신기함을 추구하는 SF의 신실한 독자들에게는 실망감만 잔뜩 안겨줄 작품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로버트 실버버그)의 {나이트 폴}

이제 슬슬 이른바 ‘빅 쓰리’로 가봅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장편 SF들, 특히 엿가락 늘이듯 늘인 대하 장편 SF들이 작가의 이름값에 비해 얼마나 형편없는지는 이미 몇 번이나 불평했고 이제 슬슬 충분히 불평했다고 생각되지만, 이 책은 좀 다릅니다. 다른 장편 SF들이 형편없는 건 결국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장편 소설을 쓸 능력ㅡ플롯 짜는 것 외에는 인물 조형(특히 치명적!)이나 사건 전개, 문장 구사 모두 형편없죠ㅡ이 없기 때문이고, 그런 점에서 ‘없는 능력에 애 많이 썼다’ 생각도 되지만, 이 책만큼은, 자타 공인하는 최고 걸작을, 그것도 “얘가 오늘 하는 걸 다른 애들은 내일이나 할라나”라며 추켜세웠던 후배랑 같이 물에 술 타기, 술에 물 타기 식으로 개판을 만들어놨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시모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나이트 폴}을 안 읽어서 그러는 게 분명합니다.

(아서 C. 클라크와) 젠트리 리의 ‘랄마라마 시리즈’

      

얘 안 나오면 섭하죠. 걸작을 걸레 같은 작품으로 만든 건 {나이트 폴}이나 이쪽이나 오십 보 백 보입니다.  다만 이쪽은 원작은 그대로 남긴 채 이어 쓴 거라 원작 자체를(단편에서 장편으로 바꿨다고는 해도) 송두리째 엿먹인 {나이트 폴} 쪽이 좀더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라마와의 랑데부}가 (단편에서 [전설의 밤]이 그렇듯이) SF史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걸작이라면 ‘랄마라마 시리즈’는 딱 그만큼이나 SF 망작史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똥망작입니다.

로버트 A. 하인라인, {하늘의 터널}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미약했던 ‘오멜라스’를 말아 먹은 주범이 올라프 스태플든인지 로버트 A. 하인라인인지 아리송합니다만, {므두셀라의 아이들}이나 {코벤트리}는 그럭저럭 그 시절 생각하면서 읽으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SF들입니다. 그렇지만 한뜻 출판사에서 나온 세 권의 청소년 SF들 중 한 권인 이 책은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로버트 A. 하인라인의 SF들 중에서 최악입니다. L. 론 허버드의 {최후의 등화관제}가 SF의 표딱지만 단 지루한 전쟁 소설인던 것처럼 이 책은 SF의 표딱지만 단 지루한 보이스카웃야영 소설이랄까요.

아서 코난 도일, {마라코트 심해}

{안개의 땅}이 훨씬 더 쓰레기이긴 하지만, 그쪽은 SF {잃어버린 세계}의 주인공을 재활용했다는 걸 빼면 SF로 볼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까 내버려 두고, 이쪽을 씹어봅시다. 중간 부분까지는 제법 SF적인 재미가 찰진데, 절정 부분에서 그 놈의 심령학 취미를 참지 못하고 리미트 해제발동시키는 바람에 죄다 말아먹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심령회를 열어다가 코난 도일의 영혼을 지옥에서(이런 걸 쓰고 천당 갔을 리가) 불러와서 몇 대 때려주고 뒷부분을 다시 쓰게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름 만으로는 멀쩡한 수준을 넘어서 팬덤 안에서 쉽게 까기 힘든 명성 높은 작가들의 그러나 개망해버린 똥망작들을 모아 놓고보니 무언가 교훈 비슷한 게 전달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해마지않는 SF란, 저 높고 높은 천상에 계시는, 한국 문학을 구원해야할 그 숭고하고 거룩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거, SF 읽는다고 잘난 거 아니고 SF 안 읽는다고 못난 거 아니라는 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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