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미래의 이브} 오귀스트 빌리에 드 릴아당 지음, 고혜선 옮김. 시공사  2012.12.31

고전이 괜히 고전인가요, 고리타분하니까 고전이지. 이 소설도 서브 장르로서 정체성이 굳어지기 전의 SF들이 그렇듯이 굉장히 따분하고 지루하며 (흔히 쓰이는 관용구에서와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독자의 피를 말리는 소설입니다.

얼굴만 예쁘고 머리는 텅 빈(역자 해설에서도 언급됩니다만 이 소설의 여성 혐오는 정말 굉장합니다) 여자에게 절망한 나머지 자살하려는 귀족을 위해 에디슨(이름은 빌려왔지만 실존 인물과는 무관하다고 강변된. 그러나 이 소설은 결국 에디슨의 축음기와 사진술을 무지막지하게 오용하고 악용한 결과물일 뿐입니다) 이 인공 미녀를 만드는 이야기라고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줄거리를 작가는 이 SF은 SF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었는지 과장되고 현학적인 대사와 묘사를 끝없이 뿌려대며 장장 500여 쪽에 이르는 장편 소설로 뻥튀기해내는데, 아무래도 가학 취미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인공 미녀ㅡ안드로이드의 효시라고는 해도 고작 뱃속에 축음기가 든 1:1 스케일 자동 보행 인형으로, 머리카락은 가발, 눈은 의안, 치아는 틀니, 보행 원리는 자이로스코프나 전기 모터도 아니고 철제 골격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바꾸는 수은 구슬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말이나 행동의 통제는 어떻게? 에디슨은 처음에는 ‘실제 인간 여자들도 어차피 상대방의 말은 듣지도 않고 저 하고 싶은 말만 하는데다 맨날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족속들이니 그냥 당신이 이 인형 녹음기에서 나올 말에 맞춰 대사를 치면 된다’는 무지막지하게 골수 여성 혐오적인 드립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치더니 나중에는 결국 ‘엑토플라즘~ 플라즈마~ 마법의 과학~’을 외치며 궁극의 사이비 심령학으로 빠져버리고 맙니다.

당대에는 최신 과학 기술에 대한 문학의 진지한 고찰과 대응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시간은 잔인한 것이어서, 오늘날에는 일부 뒤트린 취향의 독자들에게 웃음과 기쁨ㅡ그것도 한껏 멋부려 쓴 장황하고 난해한 문장들을 감내한 다음에야 얻을 수 있습니다ㅡ을 줄 뿐이라는 사실은 어쩐지 서글픕니다.

 {작은 친구들의 행성} 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폴라북스(현대문학) 2013.02.20

{노인의 전쟁}이 {스타십트루퍼스}를 떠올리게 했던 것에서 출발해서 존 스칼지와 로버트 A. 하인라인을 굳이 계속 나란히 놓아본다면 {작은 친구들의 행성}은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떠올리게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작품 모두 스토리 상의 최종 목표는 한 세계의 정치적인 독립인데, 시대의 차이인지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에서 그 수단이 외교와 전쟁인데 비해 {작은 친구들의 행성}은 기업 상대의 소송입니다. 뭔가 맥 빠지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장편 네 편과 단편 하나가 모두 그랬듯이 {작은 친구들의 행성} 역시 쉽고 빠르고 재미있게 읽힙니다. 작은 사건이 눈깜짝할 사이에 엄청난 규모로 확대되고, 쉴새없이 반전과 새로운 사실들이 튀어나오며, 인물들은 마치 단체로 탭댄스라도 추듯 (어쩌면 너무 심하게) 능수능란하게 사건과 사건 사이를 뛰어다닙니다. 위기-절정 부분에서 독자의 감정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스칼지의 솜씨는 짜증이 날 정도로 뛰어납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구도에서 사소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SF만의 재미가 잘 살아나 있고요.

그러나, 절정과 결말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불편부당하고 공정한 사법 시스템과 (알고보니) 책임감 있고 양심적인 기업에 전적으로 기대어 있는 점은, 순진무구한 미국인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삼성 공화국 국민으로서는 반전과 해피엔딩 앞에서 순순히 박수치기 머쓱하고 찝찝합니다. 굳이 우리 사회의 현실과 연결시켜 읽지 않아도 절대 부패하지 않는 절대 권력의 설정 같은, 주인공들에게만 철저히 유리한 룰 위에서의 게임 진행은 거부감이 들 정도로 너무 매끄럽습니다. 이 지나친 매끄러움이 아마도 존 스칼지의 장점이자 단점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제 슬슬 질리기도 하고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어둡다는 다음 출간작(혹시 {The God Engine}?)은 어떨지 궁금하군요.

MAGAZINE

 [유물위성] 배명훈 지음, 과학동아 2013. 3월호

한바퀴 도니까 작가들의 서로 다른 작품 세계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게 재미있군요.  동일한 분량 안에서 박성환 씨가 다소 엉성해도 틀이 큰 이야기를 이미지 중심의 문장으로 펼쳤다면 김보영 씨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디테일이 생생한 인물을 사용했고, 배명훈 씨는 (분량 제한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유들유들한 나레이션을 바탕으로 개인에서 세계로 이야기를 순식간에 키워냈습니다.

 [업데이트] 김창규 지음, 과학동아 2003. 4월호

그리고 김창규 씨는 하드 SF의 세계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하드 SF라고는 해도 김창규 씨의 지향점은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할 클레멘트와 아서 클라크 등의 고전적 하드 SF가 아니라, {오늘의 SF 걸작선}, ’21세기 SF 도서관’ 등의 몇몇 단편들에서도 이미 보았던, IT와 나노공학, 양자역학이 스페이스오페라적 요소들과 결합된, {하드 SF 르네상스}라는 책 제목에서의 하드 SF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지가 가장 주목하고 기대하는 작가는 김보영 씨 다음으로는 김창규 씨입니다.)

[업데이트]는 새롭고 독창적인 세계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IT 산업의 용어가 덧씌워진 생체 공학의 미래상은 어쩌면 이제 우리들에게도 다소 진부합니다. (우리가 {쿼런틴}에 열광했던 것도 벌써 10년 전 일입니다!) 그러나 기억과 시각, 언어, 그리고 사랑과 믿음에 대한 이 이야기는 짧지만 꽤나 강렬하고 재미있습니다.

WEB

  [드림 플레이어(Dream Player)] 임태운 지음, 크로스로드 2월호-3월호

프랑스를 배경으로 (이름만) 프랑스인 등장인물들이 움직이니까 이제야 임태운 씨의 작품들을 어디에 놓을지 알 수 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옆자리가 딱이네요.

임태운 씨의 글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이 작품도 뜬금없이 꿈이 사후 체험이나 사후 세계와 연결되어 버리고, 자각몽이나 티벳 불교 같은 소재가 오용 혹은 악용에 가깝게 피상적으로 소비되는 등 구성과 설정 자체에 무리수가 많고, 등장 인물들의 성격이나 심리, 대사와 행동 등이 심하게 피상적이거나 작위적이어서 SF는 고사하고 우선 소설로서의 기본적인 조건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합니다.

 [도시락 엄마] 김문기 지음, 크로스로드 4월호

문장이 안정적이고 구성 솜씨도 나쁘지 않은데 SF 쪽 설정이나 용어 사용이 굉장히 서툴러 보입니다. 한 마디로 소설은 많이 읽었지만(혹은 공부했지만) SF를 안 읽은 티가 많이 난다고 할까요. 모녀 관계나 연애, 죽음, 일상 속의 정서 같은, 일반 소설들에서 다루는 부분들은 꽤 읽을 만한데, SF적 요소가 나타나기만 하면 유치하고 진부하고 무엇보다도 아주 어설퍼집니다. 규소 기반 생명이 무엇인지, 유인 우주 탐사가 어떤 것인지 대략적인 지식도 없이 피상적인 상상으로 쓴 티가 많이 납니다. (대기권 돌입시 계기 고장으로 폭발하는 지구-목성간 셔틀은 꽤 웃겼습니다만. 어, 웃기려고 쓰 거 맞겠죠?)

제목이 먼저 떠오르고 거기에 맞춰 본문을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절정 부분의 핵심도 아주 작위적이고 뜬금없습니다. 결말 자체는 꽤 볼 만한 스페이스 호러입니다만 소설이라는 게 끝이 좋다고 모두 좋아지는 건 아니죠. (그나저나 출산 문제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집어넣었을까요. 결말과 연결시키려고 애를 쓴 것 같지만, 결말의 호러가 우리 사회의 출산 문제에 대해 무엇을 시사하는지/시사하고자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SF를 제발 좀 찾아 읽고, 많이 찾아 읽고, 읽고 읽다 또 읽고, 과학이나 사회 관련 서적들도 닥치는 대로 읽고, 그러다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면 쓸 만한 아이디어인지 곰곰히 따져보고, 그래도 정말 괜찮겠다-진부하거나 억지스럽지 않겠다 싶을 때에, 이야기 설정과 관련된 정보들을 세부적인 부분까지 애써 다시 찾아보고 계속 확인하고 끊임없이 점검하며 쓴다면 다음에는 꽤 괜찮은 글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죠. 말처럼 쉬우면 개나 소나 누구나 SF 작가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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