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고마츠 사쿄 지음, 이동진 옮김, 폴라북스 2012년 11월

‘시간을 마음대로 왕래하며 역사를 관리하는 조직이 있고 여기에 저항하는 집단이 있다’는 설정은 소설이 나온 시대를 기준으로 해도 낡았습니다만, 다행히 줄거리나 아이디어보다는 스타일과 감성으로 읽을 작품입니다. (어쩌면 기나긴 시간의 흐름 끝에서 이 작품에 남아있는 것이 스타일일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스타일 : 소설은 스테고사우루스(쥐라기)와 티라노사우루스(백악기)와 전화기(20세기)를 결합한, 초현실주의를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현대 일본, 기묘한 발굴지와 영원한 모래시계라는, 작품 전체의 구성과 설정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발굴품을 둘러싼 이야기로 갑작스레 장면을 전환하고, 뜬금없이 엔딩을 보여준 다음, 미래로 미래로 쭉쭉 시간선을 내어 뻗으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첩보 스릴러스러운 첫번째 에피소드나 열대+종말의 결합으로 어딘가 묘하게 아서 C. 클라크적인 분위기가 맛깔스러운 두번째 에피소드는 꽤 괜찮은데,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면서는 시간의 도약에 따라 확장되던 스케일이 멈추고 쪼그라들면서 극적 긴장감이나 이야기 자체의 매력이 급강하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이미지, 스타일의 유효 시간은 짧고 덧없는 법입니다. (출발 아이디어에서 이미 불가능했겠지만 이 소설은 여전히 장편소설로서보다 단편소설로서의 독법이 더 어울리고,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미덕들을 추출해도 그건 장편소설들의 것이라기보다 단편소설들 쪽입니다)

여차저차 석기 시대와 일본 중세를 오가며 마무리를 위한 준비를 대충 하고, 어째 김보영 씨의 ‘미래로 가는 사람들’ 연작의 [合 – 네 번째의 축으로 가는 법]스러운 마무리와 도입부에서 제시했던 엔딩을 다시 쓰는 진엔딩을 거치고 나면 작품은 대충 마무리되는데, 결론은 일본식으로 왜색 팍팍 피우며 다시 쓴 열화 버전 아서 C. 클라크 정도될 것 같습니다. 이게 일본 베스트 SF 1위면 일본 SF도 양만 많지 질은 별 거 없네요, 뭐.

 김보영 지음, 폴라북스 2013년 1월

두번째 에피소드를 읽기 시작할 때 김보영 씨가 게임을 좋아하고 관련 업계에 종사하기도 했다는 것이 상기되는 것은 게임과 폭력성 사이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러나 말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지금까지 나온 김보영 씨 SF들 중에서 가장 폭력이 많이 나오는 작품이긴 합니다) 작품의 구성 때문입니다. 일곱 명의 집행관들이 각각 자신의 취향과 목적에 맞는 처형장을 생성한다는 설정 때문에 각 장은 마치 컴퓨터 게임의 각 스테이지처럼 제시됩니다.

그러나, 비유는 거기까지만. 병렬적으로 보이는 각 장들은 사실 하나의 감춰진 중심 이야기에 접근하기 위해 수없이 다시 쓰이는 겹쳐진 이야기들입니다. 반복 속에서 중심을 향해 나선형으로 파고드는 구성. 한국 소설에서는 고 이청준 씨가 잘 사용한 수법으로, {7인의 집행관}은 구성 면에만 국한해도 (한국 SF계는 여전히 아직도 누가 뭘하든 최초의 독보적인 시도가 될 정도로 좁은 무인공산이니 넘어가고) 그 치밀함과 집요함은 한국 장르소설의 테두리를 넘어 한국 소설 전체에서 의미있는 수준의 성취를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집요함과 치밀함 때문에, 아마 성질 급한 독자라면 200여 페이지 가까이 읽어도 SF의 S가 보이지 않는 전개에 좌절하고 집어던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향후 몇 년 동안 나오지 않을(김보영 씨는 집필이 느리니까) 좋은 장편 SF를 영원한 고전으로 박제화되기 전에 팔팔하게 살아있는 상태로 읽어볼 수 있는 기회를 발로 차는 격일 것입니다.

P.S.

1) 전술했다시피 각 장별로 게임 스테이지처럼 각각 다른 배경과 설정이 등장하는데, 덕분에 각자의 취향을 알아볼 수 있는 재미있는 시금석으로 삼아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전체 이야기는 (모 평론가 님께서는 ‘환협지’라는 이상한 표현을 썼지만) 동양풍 판타지로서 다소 여성 취향에 부합할 듯 하고, 다른 취향의 독자들을 위해서는 조폭물과 검투사물,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물도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alt. SF의 눈에는 7막이 제일 근사하더군요. 신화의 이야기 틀로 우주론을 구축한 필력은 SF 팬으로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뿐더러, 개인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신화를 다루는 캠벨적 관점에 주로 기댄,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신화 관련 SF들과 격을 달리한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2)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단편도, 김보영 씨의 작품을 읽는 것은 일종의 고역, 고행입니다. 읽어나가면서, 분명히 다 읽고 난 뒤에는 다시 처음부터 읽게될 것이며, 그 때 보이는 것은 지금 보이는 것과 다를 것임이 운명적으로 예감되기 때문입니다. 단편도 그러한데 하물며 장편임에야. (그러나 물론, 하물며 읽는 것도 그러한데 쓴 작가는 어떠했을지도 생각은 하게됩니다)

 

MAGAZINE

 [성스러운 생태계] 박성환 지음, 과학동아 2013년 1월호

인물, 사건, 배경의 비율이 여타의 소설과는 다른, 그래서 소설로 봐야될지 의심스러운 소설입니다. 작품 전체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배경으로, 작품은 신들이 실재로 존재하고, 신도들이 신들과 일상적으로 소통하는 세계를 그려내는데 주안점을 둡니다. 인물과 사건은 이 사고 실험을 최소한의 소설적 형식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가필에 불과해 보이고요. 그렇지만 작품의 핵심인 신들이 실존하는 세계에 대한 사고실험은, 그다지 독자들을 감탄시킬 만한 상상력을 보여주진 못했습니다. 박성환 씨의 다른 SF들에서도 어딘가 2%(에서 심할 때는 20%까지) 부족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추 채우기] 김보영 지음, 과학동아 2013년 2월호

김보영 씨는 본래 중장편 타입으로 단편 이하의 영역에는 잘 맞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고 보니 분량 제한이 문제인가, 라는 생각도 드는 밋밋한 디스토피아물입니다. 사상 통제를 문제로 삼는 디스토피아물들이 그렇듯 획일적인 사회에 저항하는 개성적 개인이 등장하는데, 남아있는 것은 절실함이 생생하게 담긴 설득력 있는 목소리 뿐, 우리가 김보영 씨의 작품을 읽으며 기대하게 되는 치밀한 구성과 잘 구축된 캐릭터, 현실과 유사하면서도 독창적이고 이질적인 세계, 반전에 가까운 인식의 전환 같은 것들이 모두 떠나 있고, 희미한 그림자 밖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가 기대했던 것들은 모두 단편 이상의 분량에서나 가능한 것들이긴 합니다.

 

WEB

  [맛의 달인 1, 2] 고장원 지음, 웹저널 크로스로드 2012년 12월, 2013년 1월호

일종의 연작 형태로 같은 세계관과 주인공, 주요 등장인물을 공유하고 있는 두 편의 배경은 듀나의 [일곱 번째 별]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미식이 지배하는 은하계입니다만, 과장되고 허황된 정도는 [일곱 번째 별]의 이름을 여기 끌어들인 게 미안해질 정도로 심각합니다. 듀나의 단편은 서로 다른 화학적 구성을 가진 외계인들 사이의 소통, 이해, 공존이라는 SF의 고전적 주제를 음식을 매개로 참신하게 다룬 영리한 단편입니다. 짧은 분량 안에 정치, 외교, 음모, 추리, SF적 비전과 통찰까지 빡빡하게 채워넣어서 그 자체가 풍요롭고 다채로운  맛으로 가득 찬 일품 요리와 같죠. [일곱 번째 별]의 우주는 수많은 재료와 음식을 가진 수많은 외계인들로 구성된 복잡하기 그지 없는 근사한 세계입니다. 그에 비해 [맛의 달인]은 냉면에 식초와 겨자 잔뜩 부어 먹고 다 먹고는 앉은 자리에서 물 한 모금으로 쿨렁쿨렁 시원하게 양치하시는 한국 아저씨들을 복사기에 넣고 대충 뽑아내어 채운 것 같은 은하계를 배경으로 요리부터 시작해서 정치면 정치, 음모면 음모, 활극이면 활극, 드라마면 드라마, SF면 SF 뭐 하나 제대로 그려진 게 없습니다.

[일곱 번째 별]은 음식이란 삶의 물질적 토대이자 예술이고, 문화이며, 의례로서 삶 그 자체의 비유가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쓰여졌기 때문에 작품 안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그 자체로 그럴싸해보이고 플롯과도 절묘하게 잘 맞아 떨어지며, 주제를 자연스럽게 담아냅니다. 작중에서 요리와 음식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도 아주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트집 잡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게 잘 설정되고 제시되었고요. 그에 비해 [맛의 달인]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이국적으로 보이고 싶어서 노력했으나 결국은 말장난 같이만 느껴지는 음절들의 괴상한 조합 외에는 빈곤한 상상력 속에서 끓이고 절이고 튀기는 것이 고작인데, 제목을 빌려온 만화에서처럼 천상의 음식이라도 되는 양 과장된 주제에 파이어즈 앤터니의 [은하치과대학]에서 은하계가 치과 병원을 중심으로 돌아가듯 우주 전체가 돌아가는 중심축처럼 제시되니 굉장히 작위적이고 허황되게 느껴지며, 독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은하계 안에서 그 어떤 직종보다도 영향력과 권력이 막강한 것으로 그려지는 미식가 집단도, 묘사되는 것만 봐서는 텔레비전 채널들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쏟아지는 맛집 홍보기행 프로그램에서 빠짐없이 한두 컷 나오는, 뚫린 입이라고 잔뜩 음식 처넣고서는 눈 감고 쩔쩔 매다가 카메라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들어주는 동네 주민1 수준에 불과합니다) 중심 소재인 음식이 이렇다 보니까 음식에서 풀려나오는 선주 종족과 식민 종족 사이의 갈등(1화)이나 인간과 클론 사이의 차별(2화) 같은 주제는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하고 피상적이고 평면적으로 제시되었다 아무 재미 없이 해결됩니다. (2화에서는 아예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결국은 지난 특집기사에서 다뤘던 세 번째 종류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라고 하겠습니다.

Advertis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