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윌리엄 깁슨 지음, 고호관 옮김, 황금가지 2012. 10월

소위 스프롤 3부작으로 같이 묶여 있어도 {뉴로맨서}에 비해 {카운트 제로}나 {모나리자 오버드라이브}가 떨어진다는 소문은 예전부터 돌았던 것 같은데, 직접 읽어보니 사실이긴 합니다.

다만, {뉴로맨서}가 재능 있는 작가가 젊고 재능도 최고조일 때 운도 좋게 뽑아낸 걸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그리고 이 기사를 읽으시는 분들은 alt. SF 편집인이 {아이도루}도 무척 좋아할 정도의 구제불능의 깁슨 빠라는 점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의 여지는 있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뉴로맨서}에 윌리엄 깁슨의 단점 없이 장점만 담겨 있다면 {카운트 제로}에는 장점과 단점이 다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장점 : 깁슨의 문체는 여전히 정신 사나울 정도로 현란하고(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문체 자체만 이야기하자면 젤라즈니보다는 깁슨이나 J.G. 발라드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지는 예리하며, 사이버펑크 특유의 현실적 무게감이 있는 소도구들도 눈을 즐겁게 합니다.

단점 : 다만, SF에서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로 아쉽지는 않은 이런 잔재미들 외에 정말 중요한, 제대로 한 방 때려주는 ({뉴로맨서}나 다른 많은 멋진 SF들처럼 세계 전체가 뒤엎어지는) 결말이라든가, (전편에서의 몰리나 아미티지, 리비에라 같은) 개성 뚜렷한 캐릭터(심지어 조연임에도 개성 만점이었던 핀마저도 여기서는 흐리멍텅하고 김 빠진 콜라 같은 느낌입니다)같은 명쾌하고 선명한 재미나 맛이 부족한 점이 가장 큰 단점입니다.

국내에는 겨우 장편 둘에 단편 몇이 번역되었을 뿐인 깁슨의 작품 세계 안에서의 비교를 벗어나 SF 전체로 확대해서 보면 어떨까요? 불행하게도 {카운트 제로}는 깁슨 이후에 (더 정확히는 ‘블레이드 러너’와 오시이 마모루 이후에) 쏟아진 사이비속류 사이버펑크들과 크게 변별이 안 됩니다. 작품 속의 근미래는 지금 우리에겐 너무 지겹게 보아온 지루한 풍경입니다. 깁슨 특유의 손맛이 없지는 않지만 (평균 이상의 SF이지만) 사이버펑크의 원조이자 종조, {뉴로맨서}의 작가에게 기대했던 무언가는 빠져 있습니다.

다만, 버려진 우주 식민지 모듈 내부의 텅 빈 무중력 공간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부서진 인공지능의 잔해가 만든 수많은 작은 오브제 상자들이 빙글빙글 도는 것 등의 장면은, 깁슨 아니면 절대로 어디서도 볼 수 없긴 하겠지요.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황금가지 2012.10월

헤인 시리즈의 장편들은 66년, 67년 사이에 {로캐넌의 세계}, {유배 행성}, {환영의 도시} 세 편이 나오고, 69년에 걸작 {어둠의 왼손}이 나온 다음 74년에 {빼앗긴 자들}, 76년에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인 2000년에 {Telling}이 나왔지요. 단편들도 64년부터 74년까지 네 편이 나오고 나머지 작품들은 한참 뒤인 90년부터 99년까지 나온 것을 보면 사실상 정통 헤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셈입니다. (이참에 알게 된 건데, 르 귄은 80년대에 거의 침묵하다시피 했더군요. 6,70년대의 전기 르 귄과 90년대 이후의 후기 르 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몇몇 (아직도 안 죽고 남아 있는 SF 관련) 블로그들에서 언급되었다시피 남성=무식=폭력=나쁜 것, 유식=평화=여성=좋은 것의 도식적인 대립항 속에서 전개되는 전반부는 아무리 여성주의에 호의적인 남성 독자라도 읽기 불편합니다. 이건 남과 여, 이편과 저편의 이분법적 도식을 넘어서, 우리든 저쪽이든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깎아내리고 폄하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상식과 균형 감각, 양심과 양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편해할 만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70년대의 전기 르 귄에게 적당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하여간, 르 귄은 르 귄답게 파탄에 이를 것이 명백한 이 도식적인 전개를 신화와 생태학의 힘을 빌려 파탄으로부터 구원합니다.

앤서블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전해지는 지구 전체의 급진적인 변혁이나 경쟁과 살육, 도태 없는 진보(진화) 같은  부분은 어떤 독자들에게는 모호하고 뜬금없어 보일 수 있겠는데, 생태주의나 아나키즘 쪽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명시적으로 서술하지 않아도 대충 암묵적으로 스스로 납득하며 읽을 수 있는 부분이죠. 그런 점에서도 이 소설은 일반 독자들보다는 르 귄의 독자들, 르 귄과 코드가 맞는 독자들을 위한 소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앞서의 도식적이고 흑백논리적인 전반부도 이 작품의 그런 특성이 조금 더 두드러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고요.

전반부의 결점보다 후반부의 (특히나 결말의) 미덕에 더 주목하자면 {어둠의 왼손}이나 {빼앗긴 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담 없는 분량 안에서 르 귄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듯 합니다.

 필립 K. 딕에 의하면 바로 이, 우리들이 우리가 살아있다고 착각하는 우리들의 세계가 {유빅} 속의, 냉동고 속에 보존된 반생자들의 세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유빅}은 {발리스}등을 통해 우리에게도 이제 친숙해진 필립 K. 딕의 필생의 테마가 SF적인 세계관, 소도구들과 적절히 결합된 걸작입니다. 처음 1/3은 전형적인 싸구려 SF적인 세계, 초능력자와 잡다한 자동화 기계, 반쯤 탐사된 태양계가 공대생 자취방 왼쪽 구석처럼 어지럽고 꼴사납게 뭉쳐있더니 118쪽의 폭발 이후로 갑자기 초현실주의 혹은 표현주의 소설을 방불케하는 기괴한 세계로 펼쳐집니다.

이쯤 되니 정말 폴라북스의 필립 K. 딕 선집 전체가 하나의, 젊은 시인이 짧은 시간 동안 쓴 한 권의 시집처럼 느껴집니다. 과연 필립 K. 딕만큼 집요하고 응집력 있는 주제 의식을 보인 작가를 본 적이 또 있었던가요? (SF안에서는 물론이고 밖에서도?)

거미줄에 걸린 새… 필립 K. 딕이 일생을 걸고 집요하게 매달린 주제는 열역학 법칙으로 상징되는 우주의 냉혹한 무생명적 법칙 앞에서 생명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입니다. 죽음의 표상인 엔트로피 증가는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 속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특히 ‘발리스’ 3부작 중에서도 {성스러운 침입}에 집대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문학수첩의 흉측한 표지로 읽었을 때와 달리 폴라북스 이후에 다시 읽어보니 어쩌면 {유빅}이야말로 그러한 주제에 대한 필립 K. 딕의 가장 종합적인 최종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 ‘발리스’ 3부작, 그 중에서도 핵심인 {성스러운 침입}보다도 더 선명하고 간결하고 깔끔하면서도 깊고 정확합니다.

{유빅}의 시간 퇴행은 서구 문명의 불모성 뿐 아니라 인생의 근본적인 불확실성(신과의 단절에 의한?)에까지 연결됩니다. 세계 전체의 저항과 퇴행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는 조 칩이나 우주 전체의 악의적인 방해와 거부 속에서도 끊임없이 조 칩과의 접속을 유지하려는 선한 의지의 모습 모두 눈물 날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권말의 역자 후기 제목이 ‘필립 K. 딕에 의한 복음’인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콜린 윌슨 지음,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현대문학) 2012.11월

구간신간 소개 코너에서 이미 ‘정신 나간 뉴에이지-오컬트-유사과학-신나는-철학 활극 SF’이라고 소개했지만, 정말로 딱 그것, 거기까지, 외계인이 나오고 우주선이 나오고 우주 비행이 나오긴 하지만 일반적인 SF들에서 (어떤 의미로는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어떤 작품들과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꽤 멀리 나간 작품입니다.

외계인, 우주선, 우주 비행이 나오는 동시에 역사 음모론, 달의 외계 기원설, 집단 무의식, 텔레파시와 염동력 같은 유사 과학이 나온다고 하면 아마 감이 잡힐지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정신기생체의 존재 자체까지 믿지는 않는다고 해도 서구 근대 기획이 초래한 인간성 고갈에 대한 콜린 윌슨의 통찰에 귀 기울여 본다.

둘째, 초심리학이 장르의 기원까지도 거슬러올라가는 소재라고는 해도 상식적인 선을 넘어서 SF라는 표딱지를 달고서는 해서는 안 될 반지성주의 반이성주의적 헛소리들에 진저리를 치며 이런 작품으로 시리즈를 시작한 폴라북스와 ‘미래의 문학’ 전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셋째, “이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을 위한 안내서} 이후 최대의 개그 SF야!!”를 외치며 등장 인물들이 후설만 읽으면 막 텔레파시도 쓰고 염동력도 쓰는 슈퍼 히어로로 막 변하는 모습에 열광적으로 배꼽 쥐고 쓰러진다.

…저자부터가 서문에서 집필 동기로 꼽고 있고, 폴라북스 쪽에서도 은근히 그쪽으로 홍보하던데, 러브크래프트적인 요소는 전반부에 잠깐 외에는 별로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181쪽에서 주인공이 맞닥뜨린 섬뜩한 인식은 러브크래프트가 코스믹 호러라고 불렀던, 그리고 러브크래프트의 가장 뛰어난 단편들에 도사리고 있는 소름끼치는 공포의 일면을 예리하게 포착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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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SF 단편선} 박성환 지음. 자비출판, 2012년 11월

박성환 씨가 손수 자가출간한 SF 단편집입니다. …만 순순히 SF 단편집이라고 소개하기에는 좀 걸리는 부분이 있군요. 작가 본인부터 작품 앞 소개에서 ‘불교 SF’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 대해 회의와 의문을 품는 작품이 둘 이상 이어지면 이거 솔직히 기획 단계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불교 SF라는 것이 한국에 국한하지 않고 SF 전체에서 보기 드물고 희귀한 시도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럴수록 보다 스스로 엄정한 태도를 보여야지 그렇지 않다면 단순히 소재주의에 안온하게 기대었다는 평가를 면하기 힘들 것입니다.

기발표되어 alt. SF에서도 이미 다루었던 글들은 건너뛰고, 이 단편집을 통해 처음으로 내놓여진 두 단편 [해탈된 사나이]와 [보살들의 사회]만 이야기하자면… 절반의 실패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두 글을 놓고 봤을 때도 그렇고, 각각의 글만 봤을 때도 그렇습니다.(무슨 홀로그래피나 프랙탈도 아니고) 일단 [해탈된 사나이] 쪽은 작가 본인도 인정하는 듯 한데, 객관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고, [보살들의 사회]는 단편 중에서도 짧은 단편들만 내놓던 박성환 씨가 의외로 긴 호흡의, 조금만 더 나갔으면 중편으로 불러도 될 분량과 플롯의 작품을 썼다는 점부터 이채롭지만 그보다는 멀게는 [레디메이드 보살]이나 가깝게는 [해탈된 사나이]까지 아우르는,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불교적 세계관-인간관과 인생관, 우주관을 일단은 집대성해내는데 성공했다는 점에 점수를 줄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 결과 처참하게 희생된 것은 소설로서의 SF적인 재미입니다. 박성환 씨는 마치 한국 SF계의 박상륭이라도 되려는 듯 서사와 구성을 포기한 채 자신의 과학소설적 불교관을 포교하려고 애쓰는데, 불교에 조예가 깊건 얕건 간에 그렇게까지 매달려야 할 가치가 있는 주제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중반부에 다양하게 시도한 불교에서의 해탈에 대한 SF적 해석과 조명이라든지, 결말의 (어찌 보면 진부하지만) 돌연 우주적으로 확장되는 SF적 비약 등은 개인적으로는 재미있었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기에는 지나치게 매니악하게 느껴집니다.

WEB

 [다윈과 나] 조나단 지음. 웹저널 크로스로드 2012년 11월호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베리 B. 롱이어의 [적과 나], 그리고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입니다만, 걸작과 인기작의 틈새에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구멍을 찾아낸 소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짧고 간결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는 점입니다. (다음 호의 비대하고 육중한, 비곗살이 층층히 늘어진 주제에 끝맺음도 여전히 못하는 글과 비교해봅시다)

작가가 과욕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도 편하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품고 있는 메시지도 새롭지 않지만 의미 없지는 않으며, 무엇보다도 작가가 그 점을 잘 알고 알맞은 분량에서 알맞은 정도로 잘 다루어냈습니다.

(…비글족 개척자가 여성인 걸 안 다음부터 서술자의 어조가 갑자기 호의적으로 변하는 부분에서 웃으신 분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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