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SF 단편집들을 정리한 김에 (한국 뿐 아니라) SF 전반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준자를 한 번 준비해봅시다. 가설 혹은 제안 단계일 뿐이고, 이런 식의 도식적 분류가 다 그렇듯이 실제 작가나 작품들을 나누기에 딱히 쓸만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오늘의 운세나 별점 보기처럼 반쯤 재미로 해보는 거죠.

1단계 : 공장 혹은 51번 구역

하드 SF의 세계. 혹은 SF 중에서도 가장 새로운 작품들이 모여 있는 지점입니다. 여기서는 SF 장르 안에서의 코드나 클리셰는 의미가 없고, SF 장르 바깥의 (주로 객관적인 과학 지식과 정보들)요소들이 SF 내부로 픽션으로 걸어들어올 따름입니다. 장르가 확장되는 곳. SF가 아닌 것이 SF가 되면서 SF의 경계가 넓어지는 곳입니다. 이곳의 상상력은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지며, 때로는 과연 SF가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제임스 G. 발라드 역시 여기 서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J. G. 발라드 이외에는 국내에 소개된 작가나 작품이 거의 없군요.

2단계 : 용산 전자랜드

하드 SF를 가장한 스페이스오페라 혹은 사이버펑크. 실제 과학 지식이 장르 내부의 코드로 전환되는 곳, 그러니까 주로 장르 내부의 최신 코드들이 실제로 생성되는 지점입니다. 1단계에서 나온 아이디어들의 일종의 베타테스트 버전들이 나오는 곳. 일반적인 SF 독자들이 버거워하거나 낯설어하는 작품들이 모여있는 단계입니다. 하드한 척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로 하드하지는 않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가로는 이언 M. 뱅크스. 댄 시먼스는 용산 밖에서 살짝 홍대 골목을 기웃거리고 있고, 윌리엄 깁슨은 홍대 골목 입구(그보다는 이태원 골목 입구?)에서 용산을 쳐다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나마 국내 작가 중에는 여기에 서 있는 작가가 없군요)

3단계 : 홍대 골목

3/5 지점이니 딱 그렇습니다만, 가장 무난한 SF들이 모여 있는 단계입니다. SF 장르 코드의 소비지. 대부분의 SF들을 다 여기에 끌어넣을 수 있을 듯 합니다. 뭔가 새로운 척 하지만 새로울 건 하나도 없고 예술적인 척하지만 계산 속 또한 뚜렷이 보인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제목을 붙여 봤습니다만, SF의 경계를 넘어선 걸작들도 이 분류 체계에서는 여기에 넣을 수 밖에 없으니 그런 점에서도 쓸만한 제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필립 K. 딕, 어슐러 K. 르귄 등이 대표적이지만, 이 단계에 속한 작품들과 작가들을 통틀어 보면 예외적이기도 합니다. 로저 젤라즈니나 프랭크 허버트, 스타니슬라프 렘, 코니 윌리스, 브레드버리, (그리고 당대에는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기준으로만 보자면) 하인라인이나 아시모프도 딱 여기거나 이 아래, 국내로 치자면 듀나와 김보영 씨가 여기 서 있겠죠(정확히는 홍대 골목에 있는 편의점 입구랄까요).

4단계 : 편의점 삼각김밥 코너

유통 기한 직전의 간당간당한 아이디어, 클리셰가 되기 직전의(혹은 이미 클리셰가 되어버린) 코드들이 제법 그럴싸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기의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기표들의 세계. 이 단계에서 ‘전주 비빔밥’이란 딱지는 전주 비빔밥이 아니라는 뜻이고 ‘불고기 스테이크‘라는 라벨도 불고기나 스테이크를 기대하지 말라는 의미일 뿐입니다. 이 단계에 속하는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공지능들을 잘라보면 한 손에 대본을 든 불쌍한 성우의 반토막난 시체가 굴러나오고 반짝거리는 로봇들도 물티슈로 문질러보면 때와 함께 금방 맨살이 드러나죠. 쉽게 말해서 통속적인 스페이스오페라들의 세계. 가장 최근에 우리 눈에 들어온 것으로는 {데스스토커}가 있고 아주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우주사냥개}나 {종꾸어}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SF 단편집들에 ‘나도 SF’라고 주장하며 한두 편씩 끼어있는 모 웹진 여자 작가들의 단편들도 대개는 여기 넣어볼 수 있을 듯한데,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SF라고 봐줄 수 있긴 합니다. 왜냐하면 다음 단계는…

5단계 : 인사동 골목길 (혹은 황학동 풍물 시장)

주류 SF에서는 이미 100년 전에 쓰다 버린 아이디어나 클리셰를 주워다 뭔가 새로운 것인양 쓴 작품들입니다. 대개 SF 하나도 안 읽은 사람들이 쓰고, 대개 SF 하나도안 읽은 인간들이 읽으면서 오오, 재밌어, 오오, 기상천외해, 외치죠. 인간 같은 로봇, 자기가 인간인 줄 아는 로봇, 지구인들을 멸시하는 외계인, 지구인들의 조상인 외계인, 갑자기 닥쳐오는 ABC적 지구 멸망 대위기와, 영웅적인 인간들의 드라마틱한 극복(그리고 새로운 창세기의 시작) 같은 소재나 줄거리들이 넘쳐 흐릅니다. SF라는 표딱지를 아무렇게나 붙이고 나오는 대부분의 한국 장편 소설들(허구헌 날 제 2의 아담과 이브나 찾죠), 웹저넡 ‘크로스로드’에 올라온 글 중에서도 1/3 정도는 여기에 해당됩니다. 옥석을 가려낼 안목도 부족하고, 그보다는 옥석을 가릴 여유도 없는 열악한 형편 속에서 한국 SF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올 수 밖에 없긴 합니다만, 외국이라고 없는 건 아니죠. 대표적으로 ‘기발하고 환상적이고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대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선생을 꼽을 수 있겠고, 일본의 예로는 이케가미 에이치의 샹그리라 같은 소설을 들 수 있습니다. 기획과 번역이라는 필터링을 거치기 때문에 국내의 글보다는 좀더 드물긴 하지만 꽤 많은 장편 소설들이 이미 여러분 주위에도 있습니다.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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