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특집 기사에 이어서 한국 창작 SF 단편집들을 시대별로 훑어봅시다. 복수의 작가들이 참가한 단편집들이 대상이며, 개인 단편집은 다음 기회에 정리하겠습니다.

{창작 기계} (1993.1) 서울창작

듀나 이전의 한국 단편 SF는 재래식 화장실과 비슷했습니다. 거울, 세면대, 타일, 수건 걸이는 고사하고 레버와 부레, 밸브, S자 관으로 이루어진 편리하고 쾌적한 근대적 변기 시스템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선 스타일의 원초적인 구멍 하나만 뚫린 좁고 어두운 외딴 방. 마찬가지로 찰나적이고 무게 없는 아이디어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죠. 문체도, 구성도, 캐릭터도, 심지어는 주제나 스토리마저도 정말 아무 것도. 이렇게 말하면 한국 단편 SF의 초창기에 대한 폄하나 평가절하처럼 보이지만, 이건 단순한 사실 기술일 뿐입니다. 그리고, 문체와 구성과 캐릭터 같은 건 소설의 핵심 요소일지는 모르겠지만 SF의 핵심 요소는 아닙니다. SF의 핵심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디어입니다. (물론 100년 전과 달리 현재는 아이디어만으로는 제대로 된 SF가 되기 힘듭니다만)20년 전에 나온(아! 벌써 20년이라니!) 이 단편집은 한국 SF의 펄프 시기라 할 90년대 초 PC-통신 시절의 아마추어리즘의 결산물입니다. 지금은 그 흔적을 광대한 인터넷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니, 당시 PC-통신 인기글들 출간붐을 틈타 나온 이 책과 아래 책도 그럭저럭 더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수록작의 평균 수준은 이쪽이 조금 기울지만 그건 전적으로 저쪽에 듀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읽는 재미는 오히려 이쪽이 꽤 맛깔납니다.)김호진 씨의 [창작기계], [어떤 채팅], [대리인], [고르디우스의 매듭] 등이 역시 제일 낫고, 재일교포 2세라는 배경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들이 연상되는 장종철 씨의 [지구보호장치], [지구인], [강력한 신호], [순간이동 장치], [중환자], [지능발달], [독재자], [핵미사일], [침략자와 파괴자], [외계인의 선물] 등의 짧은 단편들도 꽤 재미있습니다. 당시 좀 유명했던 이성수 씨의 [피서지에서 생긴 일]은 최악. 김창규 씨는 여기에도 다음 단편집에도 끼어 있었군요.

{사이버펑크} (1994.8) 도서출판 명경

후진국의 발전 전략은 대개 압축 성장입니다. 돌도끼 다음에 뜬금없이 조잡하나마 강철 쟁기가 튀어나옵니다. 조금 더 있으면 갑자기 또 툭, 짝퉁 불량 증기기관이 튀어나오고요.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듀나야말로 구석기 유적 속의 청동기, 혹은 시발 택시들 사이의 새나라 자동차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듀나의 작품들을 빼면 읽어나가는데 인내심이 좀 필요한 단편집입니다.

{누군가를 만났어} (2007.1) 행복한 책읽기

2007년부터 2010년까지의 짧았던 한국 SF 단편집 출간 붐의 애매한 시작점입니다. 애매하다고 한 건, 책 어디에도 SF 단편집을 표방한 부분은 없고, 아마도 이런 사유 때문이겠지만 수록 작가 중 하나의 글은 전혀 SF로 볼 수 없으며, 다른 수록 작가의 글도 다섯 편 중 제대로 SF라고 할 만한 글은 거의 없고 두 편 내지 세 편 정도 SF의 낡은 코드를 가져다 쓴데 그쳤기 때문입니다. 본 기사에서 다루지 않은(SF 단편집이라고 부르기엔 논픽션 등 잡다한 글들이 같이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세 권의 ‘과학기술 창작문예 수상작품집’ 중 2004년도(수상작)와 2006년도(초청작)에 실린 것을 제외하면 김보영 씨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책으로 읽을 수 있었다는 (이제는 유통기한이 지난) 점을 제외하면 별 의의가 없는 단편집입니다.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2007.11) 창작과비평사

10대를 위한 SF 단편집을 표방한 책입니다. 늙고 삭은 30대 이상 팬들만 득시글한 SF 팬덤의 기형적인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청소년 이하 새로운 독자층의 발굴 필요성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습니다만, 막상 시도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류 문학 출판사의 청소년 문고 중 하나로 출간된 이 책에는 8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정말로 청소년을 위한 SF인지-사실 몇몇은 SF 맞는지부터 의문이지만-는 좀 의심스럽지만 그럭저적 흥미로운 글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배명훈 씨의 [엄마의 설명력]이나 정소연 씨의 [비거스렁이] 등이 그렇고, 듀나나 김보영 씨의 글들이 의외로 SF적인 재미가 덜한 점은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그만도 못한 [소용돌이]나 [로스웰 주의보] 같은 글들도 있으니 다소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얼터너티브 드림} (2007.12) 황금가지

한국 SF 단편의 마지막 보루-요즘 단편 SF 볼 수 있는 사이트가 이거 하나 밖에 없어-이자 오욕의 장소-근데 SF가 아닌 게 너무 많아-, 한 마디로 한국 SF의 현주소-어쨌거나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입니다?-인 웹저널 크로스로드의 첫 단편집을, 듀나의 {대리전}부터 신윤수의 {필멸의 변}까지 크로스로드에 실었던 10편의 글을 묶었는데, 딱 10여 년 전의 {사이버 펑크}의 재래입니다. 듀나와 이영도 씨, 김보영 씨의 글들을 제외하면 SF라고 부르기도 힘들고, SF라고 쳐줘도 3류 이하, 정말 PC-통신 시대의 창작 게시판 망령이 되살아나온 느낌입니다. SF 작가 지망생 여러분, 제발 SF 좀 읽고 나서 쓰세요, 할리우드 영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은 SF가 아닙니다, 라고 외치고 싶어지게 만듭니다.

{앱솔루트 바디} (2008. 9) 해토

크로스로드의 두 번째 단편집입니다. 마찬가지로 웹저널 크로스로드에 게재된 12편의 단편 수록. {얼터너티브 드림}에 비해 PC-통신스러운 글들은 좀 사라진 편입니다만, 단편들 사이의 편차는 여전하고, 무엇보다도 앞서의 [대리전],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 [땅 밑에]처럼 제대로 SF 읽는 맛을 주는 글을 딱 집어 골라내기가 힘든 부분은 오히려 {얼터너티브 드림}이 나았다는 생각마저 들 게 합니다. 임태운의 유일하게 빛나는 코믹 SF 단편인 [앱솔루트 바디] 외에는 사실상 꼽을 글이 없습니다. 4단계나 5단계 이하, SF 아닌 글들도 버젓이 들어 있어 편집진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U, ROBOT} (2009.2) 황금가지

얼핏 보면 앞서의 {얼터너티브 드림}과 같은 시리즈로 생각되는 표지 디자인인데, 크로스로드와는 무관하게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별도로 기획한 SF 단편집입니다. 이제 슬슬 한국 SF 단편집, 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당연하다는 듯 다 들어가 있고, 읽는 재미도 없지는 않은데 덮고 나면 남는 게 없습니다. [미래관리부]는 장관이 너무 평면적이고 허수아비 같고 결말의 코멘트가 상투적인 듀나 투라는 점이 아쉽고, [매뉴얼]은 흥미롭기는 한데 마지막 장면 빼면 SF라기보단 어번 판타지라는 점이 걸리고, [파라다이스],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 [잘 가거라 내 아들 엄마는 널 사랑했단다](본문보다도 길어보이는 이 제목은 도대체 뭡니까) 등은 상투적인 소재를, 다루는 방법까지 상투적이어서 진부할 뿐입니다. 게다가 꼭 그 주제를 그 소재로 그렇게 써야 했냐는 점까지 가보면…(공교롭게도 나열된 순서대로 문제가 심각하군요.)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 (2009.7) 해토

크로스로드의 세 번째 단편집입니다. 김보영 씨의 [0과1 사이]가 실려 있는 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김 몽 씨의 [차이니스 와이너리], 김선우 씨의 [양치기의 달], 백상준 씨의 [우주복]도 (뒤의 둘은 소품이지만) 읽을 만한 글입니다. 듀나의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는 글 자체도 좋지만 어딘가 냉장실에 넣었다 꺼낸 김보영 씨의 글 같은 느낌이 흥미롭고요. 나머지는…읽으나 안 읽으나 별 차이 없습니다. 독자 인생의 소중한 몇 시간이 남느냐 날아가느냐 정도랄까요.

{백만 광년의 고독} (2009.12) 오멜라스

실질적으로는 2010년에 나온 책이었지만, ‘세계 천문의 해’ 사업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출생 신고를 부러 앞당겨 하는 꼼수를 부렸습니다.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는 김보영 씨의 작품들 중에서 아주 좋은 편에 속하진 않지만 특유의 세계 전체의 반전이 잘 나타나 있고 나머지 수록작들도 딱히 특출나진 않지만 각 작가들의 평균 수준에는 다 이른 작품들입니다. 다만 유광수 씨의 [마지막 천사의 메시지]는 도대체 출판사나 독자가 유광수 씨에게 뭘 얼마나 잘못했나 궁금해지는(출판사야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도대체 독자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번 특집 기사에서 언급한 단편집들의 모든 수록작들을 압도하는 압도적인 똥망작입니다. 어쩌면 한 십 년만 지나면 한국SF 단편이 도달할 수 있는 최하위점을 목도할 수 있다는 점이 이 단편집의 의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빠의 우주여행} (2010.5) 황금가지

뒷표지 날개에 따르면 {얼터너티브 드림}, {U, ROBOT}에 이은 세 번째 한국 SF 단편집입니다. 제목에 버젓이 ‘우주 여행’, 그 밑에 작긴 해도 ‘한국 SF 단편선’이라고까지 써있는데도 전혀 SF 단편집 아닐 것 같이 느껴지게 하는 표지 일러스트가 어쨌거나 대단하군요. 한국에서 SF의 이름을 걸고 나오는 단편집들이 으레 그렇듯이 SF가 아닌 폭탄들이 몇 개 섞여 있고([애니멀 201] 쾅! [해바라기] 콰쾅!!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 콰콰쾅!!!), 너그럽고 관대하게 SF로 봐준다 쳐도 어설프고 앞뒤가 안 맞는 글들이 또 있으며, 몇 번이나 푹 고은 사골 같이 정겹기 그지 없는 글들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읽을만 합니다. 본격적인 SF는 아니지만 [코르사코프 증후군]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방향으로 꽤 나간 글이고, [머리사냥꾼] 역시 여기저기서 많이 보았지만 다시 읽어도 재밌습니다. [스위치, 오프]는 착상 면에서는 {세계여성소설걸작선1}의 [레오와 클레오]를 떠올리게 하는데, 여기에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현실 정치적 문제를 집어넣으니 꽤 재미있어집니다.

{독재자} (2010.11) 뿔

여기서부터는 본지에서 이미 리뷰한 적이 있으니 관련 링크만 걸겠습니다.

https://altsf.wordpress.com/2010/12/01/re02/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 (2010.12) 사이언티카

https://altsf.wordpress.com/2011/03/01/re05/

{멀티버스} (2011.10) 에스콰이어

https://altsf.wordpress.com/2011/10/01/re12/

잡지 부록인 {멀티버스}를 제외하면 2007년 1월의 {누군가를 만났어}부터 2010년 12월의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를 마지막으로 약 4년 동안은, 그 이전에는 누구도 기대는 커녕 상상도 하지 못했던, 한국 SF 단편집의 짧고 행복했던 봄이었습니다. 총 10권의 단편집, 한 해 평균 2권 이상이 출간되었던 행복했던 시기는 그런데 왜 갑자기 끝나 버렸을까요? 올해도 두 달 남긴 했지만 별 소문이 없는 것을 보니 {멀티버스}를 제외하면 2년 째 한 권도 출간되지 않고 있는 셈입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그렇지만 10권의 수록작들 면면을 보면 따로 원인을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153 편의 글 중에 제대로 SF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한국 SF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고도 멀고, 험난하고도 험난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독자와 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뭘까요. 매사에 SF 발전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을 고민하는 출판사도 있으니 한시름 놓아도 되…ㄹ 리는 없고 간단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사서 읽고, 좋은 것은 칭찬하고 SF가 아닌 것은 SF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SF가 당신이 생각하는 SF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SF가 내가 생각하는 SF가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SF가 아닌 것을, 단기간의 성과와 양적 팽창에만 매달려 ‘영미권 과학소설의 외양을 흉내 내는 실속 없는 무한경쟁에 뛰어드는 대신 우리나라 작가만이 선사할 수 있는 독자들과의 교감을 우선시하자’는 식으로 호도하는 것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을 것이며, 그 의의도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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