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작년을 기다리며}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 2012년 7월

여기 또 필립 K. 딕의 남자가 한 명 있습니다. 지긋지긋한 아내를 뿌리치지 못하는 자신이 지긋지긋해져서 되는대로 옮겨버린 직장이 하필이면 외계 종족 사이의 전쟁에서 줄 잘 못 섰다가 지구 전체를 날려먹게된 스트레스로 완전히 맛이 가버린 독재자의 주치의 자리입니다. 게다가 아내는 또 끈질기게 쫓아와서는 자기가 중독된 약에 자신까지 몰래 중독시켜버리는데, 그 약은 또 다름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불수의적인 시간 여행을 일으키는 약이라서…

마약과 환각, 시간 여행, 평행 우주, 정치, 부조리한 외계 종족, 심리적으로 일그러진 미래 사회, 로봇과 도플갱어, 양심과 죄의식, 책임의 문제 등 특유의 소재와 주제, 화법이 총출동된, 가장 필립 K. 딕스러운 장편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중반부 이후 약물과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생고생은 필립 K. 딕의 소설에서 밖에 느낄 수 없는 재미로 가득 차 있고, 자신의 양심과 양심이 부과한 책임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결말 역시 필립 K. 딕의 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폴라북스 2012년 8월

특집 기사에서도 다루었지만, 60년대 중반 이후 필립 K. 딕의 중후반기 작품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보다 두껍게 해줄 단편들로 꽉 차 있는 두툼한 단편집입니다. 기존에 집사재 등에서 나온 단편집들과 수록작이 거의 겹치지 않으며, 특히 권두의 토마스 M. 디시의 서문이나 권말의 필립 K. 본인의 작품별 코멘트는 필립 K. 딕 팬이 아니더라도 SF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일독해야할 각별한 이유가 됩니다.

 {메타트로폴리스} 존 스칼지 지음, 홍인수 옮김, 책세상 2012년 9월

제목에서는 전혀 암시 받을 수 없지만, 현대 서구식 거대 도시 문명이 완전히 맛이 가버린 뒤의, 그러니까 핵전쟁이나 전염병, 외계인의 침략 같이 화끈한 사건 없이도 흐지부지 무너진 세계에서 아나키하고 IT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도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한 근미래를 공통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단편이 모인 책입니다.

통속적인 읽는 재미가 가장 화끈한 것은 역시나 존 스칼지의 [꿀꿀대는 소리 말고는 버릴 것이 없다]이고, 토비아스 버켈, 엘리자베스 베어, 칼 슈뢰더의 작품들도 SF로 읽는 재미가 꽤 쏠쏠합니다. 제일 재미 없는 건 가장 앞에 실린 제이 레이크의 [밤의 숲속에서]인데, 조금 읽어보다 실망해서 집어 던지기엔 나머지 네 편이 너무 아깝습니다. 표지도 밋밋하고 책값도 만만치 않지만 한 번 읽어보세요.

WEB

 [복수의 어머니에 관하여] 이영도 지음, 웹저널 크로스로드 2012년 8월

{백만 광년의 고독}에 수록된 [마지막 천사의 메시지]의 결말이 독자들을 모두 똥으로 만들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필적할 정도로 독자를 바보로 만드는 병신 같은 결말입니다. 단편의 결말이 항상 묵직하고 짜릿하고 화끈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독자가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결국은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거라고 생각하게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는 지금까지의 한국 창작 SF들 중에서 손에 꼽을 수작이었지만 [별뜨기에 관하여]는 후하게 쳐도 범작이었고, 이 작품은 졸작으로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탄인은 ‘…에 관하여’ 연작이 되기 위한 것 외에는 작품에 등장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며, 화자가 사실은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에 맛이 가서 인격 분열을 일으킨 것이고, 일종의 유사 자살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반전은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본문 곳곳에서 암시와 단서가 발견되기는 합니다만, 유사 자살 자체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수준의 개연성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자기 복제를 통한 무한 자살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잘만 살리면 양심과 죄책감과 속죄와 구원에 대한 기괴한 수작을 뽑아내기에 충분해 보입니다만, 이 작품은 분량 자체도 그런 문제를 다뤄내기엔 짧았고, 작가부터가 90년대 후반 {드래곤 라자} 이래 20여 년 가까이 반복하고 있는 썰렁한 농담 따먹기 밖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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