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사이먼 R. 그린 지음, 천태화 옮김, 모요사 2012년 4월

표지만 봐서는 이거 뭐야, 무서워.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만 역겨움두려움을 극복하고 펼쳐서  읽기 시작하면 꽤  읽을 만 합니다. 절대로 격조 높거나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만,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SF를 읽으면서 기대하는 것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SF가 문학을 구원할 거야’ 같은 개소리 혹은 ‘SF느님은 다른 잡 장르보다 훨씬 우월하심ㅋ’ 같은 헛소리를 믿는 분들에게는 얘기가 다르겠습니다만)?

초공간 항행으로 연결된 은하 제국이 있고 제국 황제는 당연히 미친 년(어머, 죄송합니다)이며 주인공은 고결한 영웅 귀족 출신인데 한순간에 역모죄에 몰려 은하계 전체에서 지명 수배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러나 당연히 우리의 주인공은 주인공답게 머리 회전도 빠르고 전투력도 출중하며(이 세계에서 광선총은 2분에 한 발  밖에 못  쏘는 조루화승총 수준의 물건이라 전투는 대부분 칼싸움입니다. 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철저히 훈련된 상급 검객인데다 가문의 독보적인 비전까지 있습니다 무슨 무협지도 아니고) 운빨도 좋고 무엇보다도 인복이 끝내줍니다. 1, 2권 내내 거의 캐릭터들을 쓸어모으는 수준으로 가는 곳마다 끌어모아 파티를 결성하는군요. 캐릭터나 플롯 같은 요소를 평가하자면 우리나라 고전소설ㅡ외국 작품이니까 그쪽에 맞춘다면 중세 로망스 수준입니다. 등장 인물들의 성격은 대개 다들 평면적이고 행동의 동기는 외적 상황과 내면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배역을 기계적으로 연기하는 수준입니다.(주인공 오언 데스스토커부터가 전쟁과 폭력을 싫어하는 역사학자라고 설정은 되어 있는데 그건 그냥 설정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칼 휘두를 때는 별 생각없이 잘 휘두르고 아빠가 혁명하라고 하면 처음엔 싫다고 개기는 척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생각없이 패거리 모아서 잘도 진행해나가고 그런 식입니다.) 사건은 개연성 없이 그저 장면 장면의 재미에 충실하게 느슨하고 병렬적으로 전개되며 위기는 제대로 된 긴장감을 조성하지 못하고 주인공 보정을 통해 대충 대충 풀려나갑니다.(처음에 ㅇㅊ이 칼 들고 덤빌 때는 좀 볼 만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뭐 비행정이 추락해도 갑자기 하늘에서 동료가 뚝 떨어지고 관광용 요트 끌고 나갔다 순양함한테 얻어 터져도 대충 탈출하고 그런 식이죠. 대충 워프해도 대충 도착하고, 그 뒤로도 뭐든지 계속 대충 대충….)

그럼 도대체  이 작품의 미더덕미덕은 어디에 있냐고요?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까지 계속 말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린 시절 읽고 좋아했던, 멀리 나가자면 우리보다 앞서 1920년대부터 해외의 수많은 선배 SF팬들이 즐겨 읽었던 이야기들의 90퍼센트는 모두 이따위 닳고 닳은데다가 허풍스럽고 조악하기 이를데없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읽는 즐거움이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런 ‘닳고_닳은데다가_허풍스럽고_조악하기_이를데없는_이야기를_읽는_즐거움’인 것입니다. 이건 다른 어떤 글들도 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멀게는 빅 쓰리부터 하드SF, 뉴웨이브, 사이버펑크 등 다양한 작풍과 사조들을 거치며 환골탈태한 요즈음의 SF들의 휘황찬란함도 멋지긴 하지만, 후안무치하고 파렴치하고 뻔뻔하게도 우리가 어린 시절 즐겼던 그 순수한 즐거움을 조악하고 저질스러운 부분마저도 그대로 되살려 낸 작품 앞에서 도대체 어떻게 킬킬거리며 미친 듯이 책장을 넘겨나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길티 플레저. 그렇지만 우리끼리 있는 자리에서까지 점잔 빼지 맙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던 시절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경이감이니 센스 오브 원더니 느껴본 적도 없는 단어들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테드 창 밖엔 빨 줄 모르신다면, 말로 소위 말하는, 유년기의 추억이  없는 병들고 불행한 어른이신 거지요. (안녕히 가세요. 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또 보진 맙시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만 첨언하겠습시다. 작가의 국적 가지고 선입견 세우긴 그렇지만 누가 영국 작가 아니랄까봐 꽤 제대로 꼬인 영국식 유머들이 감초처럼 곳곳에 끼워져 있고, 귀족 간의 알력이나 음모로 뒤덮인 궁정은 꽤 그럴 듯 하게 설정되어 있는데다가 여성가족부가 알면 경기를 일으킬 만 한 퇴폐적이고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요소들도 여기 저기에 짓궂게 깔려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스케일이 큰 점이 마음에 듭니다. 주인공 일행만 쫓아가는 단선적 진행이 아니라 아직까지는 어떻게 메인 플롯에 합류할지 알 수 없는 주변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밸런타인 울프나 드램, 핀레이 캠벨, 에반젤린 슈렉 등)도 제법 본격적으로 (어떤 면에서는 오언 데스스토커의 모험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전반적으로 이언  M. 뱅크스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꼬여있되 좀 더 유하고 장대하긴 하지만 보다 헐렁하고 친숙합니다. 치밀한 문체나 문학적 기품은 죄다 갖다 버렸고요. 시작한 김에 마저 비교해보자면 {파운데이션}의 제국보다는 훨씬 제대로 미쳐있고 암울하며 {듄}의 궁정과 비슷하지만 훨씬 가볍고 활기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올여름 최대 오락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최소한 앞으로 출간될 후속작들 표지만큼은 좀 덜 솔직하고 덜 정직했으면 좋겠군요.

다른 관점의 리뷰 : <데스스토커 Deathstalker>, 1990년대 중반에 씌어진 시대착오적인 SF무협지? (고장원) SF를 뭔가 다른 대중 소설들보다 우월하고 고급한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작성된 리뷰입니다. SF의 10%가 순금처럼 고귀하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90%의 쓰레기가 SF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공감 안 되는 관점이 아니긴 하지만 (그리고 alt. SF도 나름 편협할대로 편협하긴 하지만) 이런 오락 소설에 대해서도 조금은 너그럽게 열린 시각을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않을까 싶네요. 생판 SF소설이 아닌 것도 아니고, SF소설들의 유구한 전통 중 하나를 제대로 이은 건 사실이니까요.

 제임스 G. 발라드 지음, 이나경 옮김, 문학수첩 2012년 5월

제임스 G. 발라드의 종말 3부작 중 두 번째입니다. 전작 {물에 잠긴 세계}와 거의 같은 주제에 대한 두 개의 변주곡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초월한 전지구적 파국이 닥치자 인류는 기존의 생활 질서를 유지하려는 편과 새로운 환경에 걸맞는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조하려는 편으로 나뉩니다. 발라드는 아무래도 과잉보다는 결핍, 확산보다는 수축이 더 어울리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전작에서 물의 과잉된 이미지가 별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면, 전지구적 가뭄을 배경으로 하는 본작에서 물-생명-시간의 기본 의미항을 몇 번이고 변주해가며 물의 결핍-생명의 고갈-시간의 역전을 이야기해나가는데, 발라드의 (자칭) SF의 정수라 할 여러 요소들이 가지런하면서도 매혹적으로 짜여진 모습에 절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폰 북스의 {크리스탈 월드}를 마지막으로 읽은 지 십여 년이 지난 것 같은데 (그래도 최소한 세 번 이상은 읽었습니다) 종말 3부작의 마지막 권을 기다리는 심정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쩐지 예감은 {불타버린 세계}가 3부작 중 최고봉은 아닐까 싶군요.

WEB

 리락 지음, 웹진 크로스로드 2012년 6월

지난 호에서 평했던 [전자 인간]과 마찬가지로 영리하고 재치있는 단편입니다. 영화 ‘어벤저스’를 보신 분들 중에 예민하신 분들은 혹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9.11’사태가 ‘어벤저스’를 비롯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영상 어법에 얼마마한 영향을 주었는지, 꼭 그만큼이나, 한반도에 대한 북한의 도발이나 해마다 되풀이되는 태풍과 수해 등의 자연재해들을 이 소설이 얼마나 제대로 장르적으로 잘 반영해 내었는지, 그 솜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송 중계로 일관하는 이 소설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겪으며 지내왔던 온갖 재난들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두 개의 정치 주체와, 그 주변의 강대국들의 정치 역학적 균형을 한 순간에 허무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자연 재난적 거대한 힘을 통해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을 한 순간에 돌아보도록 만드는 설정도 좋고, 그 거대한 불가항력적 힘에 대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조그마한 소망이 담긴 종이 비행기의 반격도 문학적으로 뛰어난 대립항을 만들어서 꽤 짙은 문학적 향취를 느끼게 합니다. 웹진 크로스로드를 통해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작가인데,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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