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북스’의 ‘필립 K. 딕 걸작선(이하 걸작선)’이 일곱여덟 권이나 나온 이 시점에서 되려 때 늦은 감도 없잖아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기존에 나왔던 단편들도 한 번 정리해봅시다. ‘걸작선’ 권말의 비교적 상세한 연보에 맞춰 국내에 번역된 단편들을 배열해 보는 것은 한 번쯤 해볼 만 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연도 밑의 설명은 ‘걸작선’ 권말 연보의 요약, 단편 제목 뒤 괄호 안은 수록된 국내 단편집 제목입니다)

1947년

버클리 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융을 읽던 시절입니다. 47년이면 아마 불안 장애 때문에 집에서 개인 교습을 받다가 집에서 나와 보헤미안적 작가들과 공동 생활을 하던 시절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안정성 Stability] (페이첵)

필립 K. 딕의 사후인 87년에 출간된 작품집에 처음 수록된, 가장 이른 시기의 단편입니다. 가장 먼저 쓴 작품이 가장 나중에 발표되었다는 점도 어째 필립 K. 딕스러워서 재밌습니다만, 보다 흥미로운 건 가장 나중에 쓴 작품이라고 속여도 그러려니 싶을 정도로, 가장 이른 시기부터 자신의 작품 세계의 모든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워낙에 작품 세계 전반이 맛이 가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시간 여행을 이용한 복잡한 플롯 구조에 유리공에 담긴 (모형처럼 보이는) 도시(세계),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이 환상을 중심으로 뒤집힘(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환상이 되고 환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이 되는 주객전도) 등을 얹어내는 것이 이후 작품 활동 내내 집요하게 되풀이되었다는 점은 필립 K. 딕에게 그의 주제 의식이 얼마나 개인적으로까지 절실한 것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1952년

‘판타지 앤드 사이언스 픽션’지에 [Roog]로 데뷔한 지 일 년이 지난 해입니다. 아래 단편은 ‘플래닛 스토리즈’에 게재하고 스콧 메러디스 출판 에이전시와 전속 계약을 하게 되었다는군요. 장편들을 탈고하기 시작했지만 팔리지는 않았고, 그럼에도 주류 문학적 소설과 SF 양쪽을 쓰는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우브는 죽지 않았다 Beyond Lies the Wub] (페이첵)

우리에게 알려진 필립 K. 딕의 가장 이른 작품은 재미있게도 블랙코미디입니다. 필립 K. 딕에게서 블랙코미디를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장편에서는 {유빅}에서 잠깐, {성스러운 침입}에서 잠깐 보였지만 단편에서는 사실 [두 번째 변종]이나 [사기꾼 로봇]도 반전의 으시시한 충격을 제하고 결말의 상황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고, [최후의 수비대]나 [작은 도시], [황혼의 아침식사], [매혹적인 시장], [우리라고요!] 등 일일히 거론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작품들이 통제불가능한, 우주적 부조리에 아무 이유 없이 휘말린 평범한 사람들의 기상천외한 소동을 심술궂은 어조로 서술하는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들고 싶은 작품은 [냉동 여행]과 [외계인의 생각]. 두 편 모두 심리적 블랙코미디의 걸작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한데, 지적이고 불가능한 외계 생물에 대한 속물스런 지구인의 기괴한 패배와 몰락을 그린 [우브는 죽지 않았다] 역시 앞의 두 작품과 나란히 놓을 만 합니다.

1953년

최초의 SF 장편을 비롯해서 수많은 단편들을 에이전시에 팔던 시기입니다. 공황장애, 광장공포증, 폐소공포증 등에 시달렸고, 치료제로 처방받은 암페타민을 복용하기 시작한 해. 30편의 단편을 펄프 잡지에 팔았고, FBI 수사관 두 명의 방문을 받은 해입니다. 처음으로 SF 컨벤션에 참가해서 A. E. 보그트를 만났다는군요.

[두 번째 변종 Second Variety] (세계 SF 걸작선(도솔) / 죽은 자가 무슨 말을)

독자가 무슨 말을? 이란 문구가 떠오를 정도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어보이는 수작입니다. 한국 전쟁이 막 끝나던, 냉전의 한복판에서 상대를 물리치기 위해 스스로 개발한 전쟁 기계에게 내몰릴 위기에 처한 인류의 아이러니한 결말이 참담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배경 묘사나 서술, 구성 모두 완벽합니다.

[사기꾼 로봇 Impostor] (세계 휴먼 SF 걸작선 / 사기꾼 로봇)

아마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가장 인기 높은 필립 K. 딕의 단편이 아닐까 싶은데요. 위의 [두 번째 변종]과 마찬가지로, 아시모프 류의 ‘로봇’상에 대한 완벽한 안티 테제라 할 필립 K. 딕의 ‘로봇’상이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필립 K. 딕의 소설에서 로봇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정체성마저 대체해버립니다. 69년작 [전자 개미]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화성의 타임슬립] 등을 보아도, 결국은 ‘폐색’된 세계에서 이미 인간들은 모두 인조인간이나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Colony] (사기꾼 로봇)

주변 사물과 풍경 전체가 살아움직이고 ‘나’의 목숨을 위협하는 환상은 정신분열증적 환각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도 그렇지만 필립 K. 딕에게 있어 외계 식민지라는 것은 우주 전체의 황폐한 부조리함을 잘 보여주는 무대 장치라는 점 또한 이야기해볼 만 한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느낌 상 가장 비슷한 장편은 {죽음의 미로}로군요.

[최후의 수비대 The Defenders] (사기꾼 로봇)

‘인류의 보호자로서의 로봇’이라고 해도 (아시모프와 비교하자면) 필립 K. 딕에게선 어쩔 수 없이 기만과 속임수, 인식과 실체 사이의 간격 등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후의 수비대]는 또한, 냉전의 기만적 선동과 논리가 지배하는 녹슨 톱니바퀴 투성이의 지하 세계와, 햇살과 자연, 식물성 평화로 뒤덮인 지상 세계의 대비가 절묘한, 냉전 시기의 수작 SF이기도 합니다.

[페이첵 Paycheck] (페이첵)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이 의아한(할리우드가 언제는 제정신이었나 싶긴 하지만요) 소품입니다. 플롯은 간단한 퍼즐의 연속에 가깝고, 그만큼이나 이야기 자체에 활기는 덜한 편이지만, 모든 일을 계획했던 과거의 ‘나’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렇지만 모든 일을 계획대로 수행하게 되는 현재의 ‘나’ 사이의 자아분열은 필립 K. 딕 답습니다.

[피리 부는 사람들 Piper in the Woods] (사기꾼 로봇)

멀쩡한 사람들이 갑자기 자신들이 나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는 황당한 상황은 분명 필립 K. 딕의 전매특허나 다름없습니다만, 타인의 강요에 의해 강제로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대한 평화로운 갈망 자체를 문제시하는 건 아무래도 당시 시대적 배경과 관련지어 씁쓸하게 읽지 않을 수 없네요. 결말의 반전이야 충분히 예상 가능한 수준이지만, 얼토당토 않은 황당한 상황을 진지하게 끌고나가는 솜씨만큼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54년

‘걸작선’ 권말 연보에서는 53년과 묶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짜 아빠 The Father-Thing] (페이첵)

훨씬 더 (영화화 등으로) 유명한 잭 피니의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가 훨씬 전에 소개된 탓에 국내 필립 K. 딕 팬들에게 약간의 혼란과 패닉을 불러일으켰을 법 한데, 잭 피니의 장편은 1년 늦은 55년에 발표되었더라도 3부작으로 분재되어 처음 발표된 것은 필립 K. 딕과 같은 54년(잡지 게재 시기도 잭 피니는 11월 26일부터 12월 24일까지, 필립 K. 딕은 12월)이었으니 더욱 더 따져봐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wikipedia에서는 일단 38년에 나온 존 캠벨의 [Who Goes There?]와 묶어서 50년대 미국인들의 공포ㅡ내 이웃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ㅡ를 반영한 작품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이디어의 독창성에 관한 지리한 문제를 집어던지고 작품만 보자면,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전반부의 긴장은 필립 K. 딕 답다고 할 수 있지만, 결말의 유치난만함은 아무래도 작품의 격을 깎아내렸다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넥스트 The Golden Man] (넥스트)

핵전쟁으로 인한 돌연변이라는 소재와 인류 진화에 대한 필립 K. 딕 특유의 암울한 비전이 결합된 작품입니다. 분량은 조금 긴 편이지만 구성이 복잡하진 않고, 작품의 핵심은 주로 등장 인물들의 대사에 의존해서 제시됩니다. 시간 인식이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현생 인류 대신 미래에서 현재로 흐르는 새로운 인류의 모습이 재미있지만(이 작품이 수록된 동명의 단편집 권말 해설에서는 ‘(3) 시간과 인과율의 문제’로 분류할 만 한 모티프입니다), 보다 흥미로운 건 돌연변이에 대한 진화론적 비전입니다. 현생 인류가 대개 스스로를 진화의 정점에 올라선 존재로 착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강력한 카운터 펀치 한 방이 아닙니까?  게다가, 현생 인류와 돌연변이 사이의 관계를 ‘다수/주류/현실’과 ‘소수/비주류/가상’의 의미쌍으로 확장시켜보면 필립 K. 딕 특유의 전복적 사고가 잘 드러납니다.

[수정구슬의 비밀 The Crystal Crypt] (사기꾼 로봇)

‘조그만 수정 구슬 속에 든 진짜 도시’라는 개념은 국내에 소개된 필립 K. 딕의 단편들에서도 두 번 이상 나타납니다. ‘축소된 도시’라는 개념으로 보다 확장시키자면 바로 아래 단편을 포함해서 세 번이고요. 모형화된 도시-세계란 ‘발리스 3부작’ 등에서 집요하게 제시되는, 진정한 생명을 잃고 폐색된 자동 인형 같은 현대 사회/현대인의 모습을 풍자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첩보물의 성격을 띄고 있고, 앞서 말한 사회 풍자적/문명 비판적 면모는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첩보물 말이 나온 김에, 인류와 외계 문명이 서로 거의 대등한 상태에서 팽팽하게 대립하고 대결한다는, 딱 그 시절 냉전 구도의 반영이 분명한 구도에서도 보이는 필립 K. 딕만의 특징 하나 짚고 넘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수정구슬의 비밀]을 포함해서, 저 유명한 [사기꾼 로봇]이나 심지어 [우리라구요!]의 얼굴 없는 화성인들마저도, 꼭 지구인이 정의와 선, 외계인이 불의와 악의 이분법적 구도로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필립 K. 딕은 정의의 승리 같은 거대 담론보다는 거대한 세력 간의 다툼이라는 불가항력적인 부조리와 맞닥뜨려버린 개인의 정신적 혼란과 심리적 위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작은 도시 Small Town] (페이첵)

국내에 소개된 중에는 드물게, SF적 요소가 거의 없는, (호러)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분위기나 구성, 느낌은 딱 TV 시리즈 ‘환상특급’의 한 에피소드로 적당해 보이는군요. 모형 오덕 잉여 만세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SF로 보기 힘드니 넘어갑시다.

[존의 세계 Jon’s World] (페이첵)

[두 번째 변종](53년작)의 충격적이고 묵시록적인 결말을 생각한다면, 그 속편이란 도대체 그 존재를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순수악에 가까운 무언가로 느껴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필립 K. 딕입니다. 필립 K. 딕이 누굽니까? 필립 K. 딕을 못 믿쑵니까? 왜곡된 시간 감각으로 인한 예지 능력과 평행 우주, 시간 여행 등이 기묘하게 뒤섞인 이 작품은 [두 번째 변종]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일어섰을 뿐 아니라, 마지막의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눈물겹게 이상적인 미래상의 제시 대목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혼의 아침식사 Breakfast at Twilight] (페이첵)

임박한, 피할 수 없는 미래로서의 전쟁 앞에 선 소시민 가족의 나약한 모습을 통해 당대를 통렬히 비판한 SF의 걸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결말에서 주인공 가족은 목숨을 건 선택을 통해 비참한 상황으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오지만 반드시 일어나게 될 전면전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가 되어버린 미래상은 여전히 몇 년 뒤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이디어와 플롯 면에서는 이듬해의 [스위블]과 쌍둥이격인 작품입니다.

냉전이 암시하는 핵 전면전의 악몽에 짓눌린 당시 군중의 무의식적인 공포를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두 번째 변종]부터 [사기꾼 로봇]을 지나 [존의 세계]와 [황혼의 아침식사] 등의 블랙코미디적인 걸작 SF로 뽑아낸 능력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55년

장편 데뷔작 {Solar Lottery}가 페이퍼백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첫 번째 단편집 {Handful Darkness}도 간행된 해입니다.

[매혹적인 시장 Captive Market] (죽은 자가 무슨 말을)

내용상 ‘사로잡힌 시장’ 쪽이 더 적절한 제목은 아닐까 싶은데 넘어가고… (번역 퀄리티야 어떻건 필립 K. 딕의 단편집을 네 권이나 찍다니 집사재 사장은 도대체 내생에 무슨 복을 얼마나 받으려고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의 법보시급이죠.) 평행우주와 초능력, 핵전쟁과 우주 여행이라는 전통적인 소재가 필립 K. 딕스럽게 엮인 소품입니다. ‘에드나 버텔슨 여사’가 자신의 능력이 단순한 평행 세계 사이의 이동이 아니라 가능성의 선택적 소급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부분의 서술은 정말 딱 필립 K. 딕스럽게 오싹하고 심술궂죠. 앞에서 하던 이야기의 연장선 상에서 바라보자면… 부조리한 세계의 파멸적 질서(닫힌 시공간의 쳇바퀴)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인간 군상의 모습 또한 냉전, 전쟁, 부조리한 전면적 폭력 앞에서의 개인의 무력감과 절망감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스위블 Service Call] (마이너리티 리포트)

[황혼의 아침식사]와 쌍둥이인 작품입니다. 뒤틀린 시간선 때문에 미래의 파국을 알아버린, 그리고 동시에 피할 길은 없다는 사실 또한 뼈저리게 느끼는 소시민 개개인의 무력감이 잘 반영된 작품. [황혼의 아침식사] 쪽이 전면전 이후 군대 사회로 변질되어버린 미래상이 소름이 쭉 끼치게 한다면 이쪽은 모든 사람들이 철저하게 사상적 통제를 받는 미래상에서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시간은 피할 수 없는 파국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이고, 평범한 소시민들은 결코 그 위에서 내려올 수 없습니다. 고려원의 {코믹 SF 걸작선}의 [르네상스 맨]이 떠오르는 가볍고 경쾌한 도입부를 이렇게 끔찍한 악몽으로 전개할 수 있다니 새삼 필립 K. 딕의 상상력이 존경스럽습니다.

1956년

주류 문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일반적인 소설들(모두 소실된)을 집필하던 시기입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The Minority Report] (마이너리티 리포트)

끔찍한 할리우드 영화야 알 바 아니고, 필립 K. 딕의 단편들 중에서도 수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플롯은 아찔할 정도로 복잡하고 사건은 쉴새없이 펼쳐지고 주인공은 모두를 의심하는 가운데 자신과 가족과 세상을 위해서 가장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평생을 들여 구축한 시스템이 자기 자신의 자유 의지를 침범해 들어오는 역설적 상황, 저지르지 않은 죄로 처벌받는 사람들의 세계는 카프카를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페이첵]과 [최후의 수비대]를 제외하자면(사실 둘 다 좀 수상쩍기는 하지만요) 지금까지 나온 단편들 중 가장 긍정적인 분위기의 결말입니다. 기존의 체제가 다시 옹호된 점의 보수성은 유일한 변수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는 심술궂은 결말로 인해 다소 완호된 느낌이고, 이는 아마도 특별한 일이 없었던 시기의 작품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1957년

56년과 묶여서 설명된 해입니다.

[아무도 못 말리는 M The Unreconstructed M] (죽은 자가 무슨 말을)

소품이라고 일축하고 넘기기에도 좀 구립니다. 깔 건 까야죠. 장편 쓰느라 기력이 고갈됐는지약을 끊었는지 긴 이야기가 나올 수 없는 걸 억지로 늘린 듯 늘어지는 느낌이 아주 일품입니다. 외양을 바꾸는 자동 살인 기계라든지 외계 행성으로의 유배, 가상의 부유함으로 호기부리는 사업가 등의 개별 소재들은 괜찮은데 제대로 한데 묶이지 못했습니다.

1959년

두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미망인과 그녀의 세 딸과 함께 살던 시기입니다. 이듬 해에 첫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는군요.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나이 Recall Mechanism] (마이너리티 리포트)

슬슬 다시 이전의 필력이 회복되는 느낌입니다. 필립 K. 딕은 시간 여행보다는 ‘타임 슬립’에 가까운, 시간 인식의 혼란(주로 미래의 예지)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 소품에서는 다소 가볍고 코믹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래봤자 블랙코미디의 코믹이지만요.)

[우리라구요! Explorers We] (마이너리티 리포트)

레이 브래드버리의 [도시](국내에는 {토탈호러}에 수록)가 생각나는 설정입니다만, 그보다는 {솔라리스}가 떠오를 지경입니다. 아니, 일체의 배후나 이유, 목적을 알 수 없이, 죽은 자들의 복제물을 끊임없이 보내오는 외계 세계라는 점에서는 확실히 {솔라리스}에 가깝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예 카프카가 제일 적절한 비교 대상일 것 같습니다. 우주는 부조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다만 수동적으로 이에 휘말려 필사적으로 발버둥칠 뿐입니다.

[전쟁 놀이 War Game(Diversion)] (사기꾼 로봇)

외계인들과는 여전히 대립 중인 미래, 공무원들은 적성국의 장난감 수입마저도 배후에 깔린 진정한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장난감들에 대한 상상력도 재미있고, 가장 무해해보이는 장난감이 가장 위험했다는 결말도 흥미롭습니다.

1963년

61년부터 {높은 성의 사내}와 {화성의 타임슬립}을 집필 및 출간했습니다. 63년은 {높은 성의 사내}로 휴고상을 받고, 세 번째 아내가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닥터 블러드머니} 등을 집필했고 {파머 앨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의 토대가 되는 환상을 본 해입니다.

[완벽한 대통령 Stand-By(Top Stand-By Job)] (마이너리티 리포트)

‘실재보다 더 실제 같아서 실재를 대체해버리는 가상/모방’이라는 필립 K. 딕의 전매특허 모티브가 사용된 정치풍자 SF입니다. 지구 전체의 대통령직은 컴퓨터가 맡아서 처리하며, 인간은 단지 컴퓨터의 고장에 대비해서 옆에서 대기할 뿐입니다. 말 그대로 주객전도. 그런데 이 주객전도된 상황에서 다시 주객전도가 일어납니다. 외계로부터의 위협이라는 중대한 시점에 컴퓨터가 고장나고, 아무런 능력적 뒷받침 없이 자리만 채우기 위해 선정되었던 사람에게 덜컥 절대 권력이 주어집니다. 이중 전복 구조는 필립 K. 딕의 장기로, 소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도 잘 쓰였습니다. 여담이지만 ‘뉴스 광대’ 짐잼 브리스킨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의 버스터 프렌들리를 예고하는 듯 합니다.

[퍼키 팻의 전성시대 The Days of Perky Pat(In the Days of Perky PAT)]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건 {파머 앨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없이는 읽기 힘든 단편입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2002년에 출간되었으니 거의 10년을 사이에 두고 거꾸로 읽게 되는 작품이로군요.) 비록 캔-D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황량한 폐허 속에서 환각도 없이 인형 놀이에만 몰두하는 어른들의 모습은아이들의 눈에 비치기 때문에 더 기괴해 보입니다. 필립 K. 딕의 소설들에서 많이 반복되는 모형 세계와 생의 활기를 잃은 인간들이라는 모티프의 또 다른 변주인데, 달콤한 환상에서 깨어나 세상과 직접 맞서기 시작하는 결말은 필립 K. 딕의 작품 세계에서도 특기할 만 합니다.

1964년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을 집필했고, SF 팬덤에서 폴 앤더슨 등을 만났고, 교통 사고를 겪었으며 스물한 살 짜리 아가씨에게 매달리던 시기입니다.

[그래, 블로벨이 되는 거야! Oh, to Be a Blobel!(Well, See, There Were These Blobels…)] (마이너리티 리포트)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을 다루는 첩보물인데, 유전학 관련 블랙코미디가 깨알 같은 재미를 줍니다. 자판기를 연상시키는 로봇 정신의는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의 휴대용 로봇 정신분석가가 떠오르게 하는군요.

[물거미 Waterspider] (마이너리티 리포트)

필립 K. 딕이 SF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어느 장르 작가가 자신의 장르에 대해 안 그렇겠습니까마는)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쾌한 코믹 SF입니다. 심지어는 블랙코미디적 요소마저도 옅고, 장르 팬으로서 장르 판 자체를 낄낄거리며 즐겁게 바라보게 합니다. ((지구에서의) 배경은 SF 컨벤션입니다.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오르페우스의 실수 Orpheus with Clay Feet] (죽은 자가 무슨 말을)

블랙코미디 소품입니다. 아이디어 자체는 도솔의 {세계 SF 걸작선}에 수록된 앤터니 버제스의 [뮤즈]와 동일한데 작가의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아이디어 자체의 형상화는 앤소니 버제스 쪽이 훨씬 나은데, [오르페우스의 실수]의 주안점은 그쪽이 아닙니다. 누가 필립 K. 딕의 작품이 아니랄까봐, 과거 시간대의 중요 작가에게 영감은 커녕 창작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리고 돌아온 주인공은 시간 여행사로부터 새로운 작업을 제안받습니다. 하지만 그 제안의 원래 출처는 창작 의욕이 완전히 꺾여버린 예의 작가가 남긴 유일한 작품으로, 여기서부터 소설 속 소설이 소설 속 소설의 바깥에 있는 소설의 이야기를 지배해버리는, 액자가 액자 틀을 삼키는 무지막지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누가 필립 K. 딕 아니랄까 봐!! 정말이지 이래도 필립 K. 딕을 사랑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가 무슨 말을 What the Dead Men Say(Man With a Broken Match)] (죽은 자가 무슨 말을)

분량이 길고 이야기가 복잡한데 그에 비해 재미는 좀 떨어지는, 늘어진 작품입니다. 각종 미디어에서 이미 죽은 이의 밑도 끝도 없는 넋두리가 흘러나오는 악몽 같은 장면이나, 이듬해 집필되는 {유빅}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사용되는, 죽음 이후에 냉동 상태로 간헐적인 부활을 영위하는 ‘반생’ 개념이 처음 등장한 건 특기할 만 하지만, 정치 풍자와 약물 중독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서 전체 이야기의 큰 틀은 많이 가려지고 흐려져 잘 보이지 않습니다.

1966년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와 {유빅}을 집필했고 앞서의 아가씨와 결혼했습니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 (SF시네피아 / 죽은 자가 무슨 말을)

기억의 허구성, 양파 껍질 같은 중층 구조의 플롯, 현실에 침투하는 환상, 진실과 거짓 사이의 전도 같은 필립 K. 딕의 전형적인 특징들이 잘 나타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화와는 상관 없이) 소품입니다. 그런데 잠깐, 당신과 내가 필립 K. 딕의 소설들을 이야기할 때에 소품이라는 개념이 과연 정말로 의미가 있을까요? 필립 K. 딕의 단편들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소개된 서구의 SF들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필립 K. 딕의 단편들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큰 장점들은 문체도 인물 조형도 아닙니다(본격적으로 맛이 간 후반기 걸작들에서는 얘기가 좀 달라지긴 합니다만). 닥치고 아이디어, 닥치고 플롯입니다. 그런데, 아이디어와 플롯이 SF 판 안에서 강세를 떨쳤던 건 이미 15년 여 전에 절정기에 올라 필립 K. 딕 당시에는 한물갔던 이른바 ‘황금기’ 시절이었습니다. 새 술은 낡은 부대에. 그런데 필립 K. 딕은 좋은 아이디어와 좋은 플롯만으로도 얼마나 소설 문학의 본령에 가닿을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손쉽게 보여줍니다. 심지어 이런 소품에서조차도. 소품을 소품이라 부를 수 없게 만드는 그 솜씨로.

1967년

둘째 딸이 태어났고 장모가 자살했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렸고, 아래 단편은 할란 엘리슨에게 LSD를 먹고 썼다고 뻥친 물건이라는군요.

[지도자에 대한 믿음 Faith Our Fathers] (사기꾼 로봇)

캘리포니아 해변가의 미국식 베트남 쌀국수 식당이 생각나게 하는 단편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나 조지 오웰이 잘 써먹었던 소재도 필립 K. 딕의 손에 넘어가면 어디 작가 당신이 미쳤는지 독자 내가 미치는지 한 번 해보자는 오기가 절로 솟아오르는 환각적이고 환상적인 심리적이고 약물 중독적인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필립 K. 딕의 관점에서 지상의 권력 핵심부는 인간의 논리로 인식 불가능한, 불가해한 외계로부터의 침입이며, 논리적 모순으로 가득 찬 절대적인 신성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인간적이고 동물적인 행위,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핥고, 타인의 상처를 자신의 상처처럼 서로 핥아주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1969년

티모시 리어리랑 놀 정도로 약에 쩔어 지내고 있었고 심지어 약물 복용으로 응급실까지 끌려갑니다. {발리스} 등에서 언급되는, 이스라엘로 탐사 여행을 간 파이크 주교가 사막에서 사망한 해입니다.

[전기 개미 The Electric Ant] (사기꾼 로봇)

가장 아름답고 멋지고 환상적인 필립 K. 딕의 단편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기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기계는 자신의 세계 인식 과정 전반을 조작해보기 시작합니다. 수동적이지 않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단지 속의 뇌’. 지금까지 필립 K. 딕의 작품들에서 주인공은 대개 가짜 현실에 엄습해오는 진정한 현실 앞에서  놀라고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는,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적극적으로 가짜 현실을 만들어내는 기제에 접근해서 스스로의 인지 과정을 조작하고 실험하는 주도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 이후로도 아홉 편 정도의 단편들이 필립 K. 딕의 생전에 발표되긴 합니다만(그 중에서도 세 작품은 국내에도 번역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수많은 필립 K. 딕의 단편들 중 후반기 대표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이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필립 K. 딕의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과 모티프가 모두 나타나 있으면서도 지금까지의 작품들과는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문학적인 아름다움마저 성취하고 있습니다. 로봇이 자신의 현실 주입 장치 테이프를 조작하기 시작했을 때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시적이며, 주입된 현실 너머의 실재를 바라보려는 로봇의 의지는 불교적이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로봇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는 가상 현실의 해체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초현실주의적이기 까지 하지 않습니까?

1974년

70년에는 {흘러라 내 눈물, 하고 경관은 말했다}를 쓰기 시작했고 {죽음의 미로}가 출간됐고, 저소득자용 식량 배급권 신세를 졌고, 네 번째 아내가 딸을 데리고 떠나버립니다. 71년에는 CIA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고, 72년에는 네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새로운 여자를 만났고 스타니스와프 렘과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73년에는 {어둠 속의 스캐너}를 썼고 다섯 번째 아내와 결혼했으며,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의 영화 판권을 팝니다. 74년은 {발리스} 3부작의 토대가 되는 신비 체험을 한 해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A Little Thing for a us Tempunauts] (페이첵)

필립 K. 딕의 단편들에서 많이 나타난, 카프카적 악몽의 또 한 번의 변주인 셈인데, 이쯤 되면 슬슬 너무 복잡하게 꼬여서 전체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시간여행사들은 그들이 실패한 근미래에 성공적으로 도착합니다. 이 악몽의 타임 루프. 벗어날 길이 없는 영원한 연옥.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철저하게 환상적으로 절망적인데, 그들을 둘러싼 제반 환경은 또 철두철미하게 속물적이고 세속적이어서 지독하게 현실적입니다. 필립 K. 딕은 역시 이렇게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이 기괴하게 암울해야 제 맛이 아닙니까?

1980년

76년에는 {발리스}의 토대가 되는, 다섯 번째 아내와의 별거와 자살 기도, 정신 병원 입원 등의 사건을 겪습니다. 80년은 {성스러운 침입}을 탈고한 해이기도 합니다.

[냉동 여행 Frozen Journey] (플레이보이 SF 걸작선 2)

{플레이보이 SF 걸작선 2}의 소개 글에서는 필립 K. 딕이 마지막으로 발표한 단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이나, 후기 필립 K. 딕의 현실과 환상, 구원과 계시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 작은 소품 안에 고스란히 잘 담겨 있습니다. 등장 인물이 겪게 되는 현실은 기실 진짜 현실 속의 인공 지능이 주인공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낸 가짜 현실일 뿐입니다. 따라서 과거 재생과 빨리 감기, 무한 반복이 자유자재로 이루어지며, 그 와중에 주인공의 유년기 원죄 의식이 위안과 구원의 발목을 잡습니다. 전반적으로 블랙 코미디의 어조가 에스프레소처럼 쓰디 쓰면서도 매력적으로 혀 끝을 자극하는 수작입니다.

1981년

{발리스}와 {성스러운 침입}이 출간되었고, ‘블레이드 러너’가 제작되고 있었습니다. 죽기 일 년 전의 해입니다.

[외계인의 마음 Alien Mind]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

소품 중의 소품. 이 정도로 짧은 작품은 집사재에서 나온 필립 K. 딕 단편집 네 권을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집필 시기와 발표 시기가 기묘한 [안정성]을 제껴 놓는다면 [우브는 죽지 않았다]부터 시작해서 정말 외계 블랙코미디로 시작해서 외계 블랙코미디로 끝나게 되는데요, 곤혹스런 상황에 빠진 주인공을 그리는 블랙코미디적 요소는 (위의 [우브는 죽지 않았다] 항목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인간을 통제 불가능한 부조리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려 있는 존재(가상을 현실이라 믿고 현실을 가상이라 생각하는 등)로 보는 필립 K.  딕의 기본적인 세계관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형식/어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짧은 분량과 간결한 필치 속에서도 그런 면이 잘 나타나 있는 이 작품은 필립 K.  딕의 단편 세계에 대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지금까지의 여정에 어울리는 결말이 아닐까 합니다. 장편에서는 (사후 유작으로 발간된 {티모시 아처의 환생}까지 포함해서) 지금까지의 정신적인 혼란과 사변적인 방황을 차분하고 진솔하면서도 감동적으로, 현실 자체와 현실을 넘어선 본질적 세계까지 함께 긍정하는 방향으로 마무리를 짓는 동안입니다만, 그 밑에는 여전히, 부조리한 세계의 부조리한 존재에 대한, 심술궂지만 냉소적이진 않은 태도는 여전하고요.

대략적으로 집필 및 발표 순서에 따라 국내에 번역된 필립 K. 딕의 단편들을 살펴 보니 큰 흐름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만, 생각보다 세세하고 보다 뚜렷한 흐름이나 변화가 나타나지는 않는군요. 단편집 네 권 분량이면 필립 K. 딕의 전체 작품 수가 방대하긴 하지만 적은 샘플은 아닌데, 그렇다면 그만큼이나 필립 K. 딕의 작품 세계가 몇 가지 문제 의식에 아주 단단히 뭉쳐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집사재의 위업 덕분에 앞으로도 작품 전집이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는 이상 필립 K. 딕의 단편 SF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소개되기는 힘들 것 같고(소개될 대표작들은 대개 다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요)… 폴라북스에서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장편 선집이 모두 완간되고 나면 조금 더 갱신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이 정도 선에서도 장편과 단편을 아울러서 필립 K. 딕의 작품 세계를 조망해볼 수 있을 듯 한데, 폴라북스의 장편들 특히 후기 ‘발리스 3부작’ 덕분에 단편들까지 다시 일독한 감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필립 K. 딕에 대한 생각, 인상들이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고 왜곡된 면이 있지 않나 하는 질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익히 알려졌듯이 약물 중독 이전에도 다양한 심리적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약물 중독이 그러한 문제들을 더욱 키우기도 했을 뿐더러, 약물이나 심리적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든 없든 간에 말년에는 보통 사람이면 신흥 종교 한 다스 쯤은 세우고도 남을 특이한 체험을 했지만, 곰곰히 그의 작품들을 들여다 보고 있자면 굉장히 영리하고, 아는 것이 많으며, 상상력이 크고, 집중력이 강하고, 통찰력 있으며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 나오지 않습니까.

세상이 이미 미쳐 돌아가는지 오래인데 그 세상을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이 과연 누구보고 미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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