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초에 출간된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비평선 “B평”(이하 영타 전환하기 귀찮으니 “삐평”)은 非평이 더 적절한 제목으로 생각될 정도로, ‘비평’이란 말을 사용하기엔 부적절한 잡문들로 채워져 있습니다만(실로 뒷표지 소개글에서 ‘작품’을 ‘상품’으로, ‘독자’를 ‘소비자’로, ‘비평가’를 ‘광고쟁이’로 치환시키면 딱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어차피 SF도 아니고 판타지 ‘업계’ 일이니 감 놔라 배추대추 놔라할 바가 아니고, 다만 3부에는 SF와 조금 연관된, 눈길을 끄는 글이 하나 있으니 잠깐 짚고 넘어가 봅시다. 이 글은 최진석 씨의 ‘한국 장르문학을 둘러싼 정황ㅡ장르 작가들이 문학상을 타기까지’에 대한 반론이나 비판은 아니며, 첨언과 부언을 조금 곁들인 요약 정리 소개글 정도가 될 예정입니다.

‘한국 장르문학을 둘러싼 정황ㅡ장르 작가들이 문학상을 타기까지’의 제1장은 ‘장르문학 담론의 실제’라는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소제목은 각각,

①장르문학이라는 조어

②장르문학을 비주류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③주류문학 vs 장르문학 구도의 허구성

…소제목만 훑어도 대충 내용 짐작 가시죠? alt. SF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장르’문학’이란 소설 전반과 문학에 대한 몰상식과 그에 따른 선망, 열등감, 피해의식이 복합되어 만들어진 기괴한 조어인데, 여기서는 피해 의식에 초점을 맞추어 ‘비주류로서의 장르문학’, ‘순문학으로부터 천시받는 장르문학’이란 허구적 개념인 장르문학의 실체화를 위해 장르 내부에서 가상으로 만들어진 상황일 뿐이라는 결론으로 일단락되고 넘어갑니다.

Re : 장르와 주류 문단의 대립이 허구적 구도라는 것에 대해서 alt.SF는 절반은 동의하고 절반 정도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대립 구도라는 게 어느 정도 장르 쪽의 일방적인 선망과 질시의 맹목적인 투영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주류 문단에서 장르에 대해 편견이나 비하가 없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주류 문단이 결코 단수가 아니며, 한국문학사에서 장르 외에도 비주류 하위 장르가 있었다는 예로 최진석 씨는 김홍신류의 실화소설이나 ‘여류소설’로 불리던 90년대 이전 여성소설을 들고 있는데, 다른 집 애들도 왕따 당한 적 있다고 해서 우리 애가 왕따 당하고 있는 게 우리집에서 허구적으로 설정한 대립 구도일 뿐이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앞의 예들은 1) 그런 목소리가 드러날 구심점이 없었거나 2) 고질적이고 암묵적인 편견 때문에 뚜렷한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거나 3) 혹은 목소리를 냈는데도 너무 오래 전이고 우리가 관심도 없어서 모르는 것 뿐이고 이쪽은 구심점이 존재하고 암묵적 편견에 대해 최근에 말하기 시작했다는 쪽이 어울릴 듯 합니다.

그러니까 오래된 역사 혹은 반복되는 역사랄까요.

그렇다면 이건 분명히 문단 외부/장르 내부의 욕망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하지, 문단 내부/장르 외부의 문제로 해명될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최진석 씨의 논의는 다른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제2장의 제목은 ‘2000년대 초반 한국문학계의 자의식’입니다. (‘④소결론’을 제외한 소제목은 각각,

①주류문학 진영ㅡ리얼리즘 vs 모더니즘 논쟁

②한국 SF 팬덤-주류문학에 대한 냉소?

③한국 판타지 팬덤의 상황ㅡ주류문학에 대한 인정투쟁

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요약 정리가 좀 필요하겠군요.

①은 1960년대 이후 문단 권력의 양대 축이었던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와 ‘창작과 비평사’를 중심으로 한 순수 참여 논쟁을 조금 이상한 방향에서 간략히 소개하면서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한국 사회에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주류 문단에게 진지하거나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그러니까 한국 사회와 강하게 연결되지 않은) 소설들이 관심을 받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Re : ‘진지한 문단은 천박한가벼운 장르소설을 싫어해’라는 통념의 사실 여부와 연원에 진지하게 메스를 들이댄 작업으로 의의가 있어 보입니다만 글 전체의 분량이나 주제와의 균형 문제인지 필요한 만큼 깊이 들어가지도 않았고 들어간 각도도 좋지 않아 보입니다. 우선 모더니즘 진영의 입장에 따르면 왜 장르 소설이 천시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미진하고, 60년대 순수 참여 논쟁으로 장르 소설 수용의 비활성화를 설명하는 것 역시 그럴 바에야 30년대 카프 논쟁으로 올라가는 게 낫지 않나 싶습니다. (그보다는 서구 문학이 처음으로 국내에 들어온ㅡSF는 당연하거니와 판타지 역시 자생종이라기보단 수입 장르이니까ㅡ개화기 무렵으로 올라가는 게 더 적절할 테고요. 일례로 국학자료원의 “과학소설이란 무엇인가”에 수록된  ‘서양 과학소설의 국내 수용 과정에 대하여(김창식)’를 들여다 볼까요. 국내에 최초로 소개된 SF인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는 작품 자체보다는 정치 의식의 고취나 새로운 지식의 보급에 주안점을 두어 재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변형되었으며, 60년대 이후많은 SF들이 국내에 번역되었지만 아동용으로 축약되거나 번안된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SF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일반적 시각이 근원부터, 본격적인 소설로보다는 계몽적인 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음을/것임을 알게 하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애초에 왜 유독 한국에서 소설은 진지한 것이어야만 했고 소설가에게 예술가 이상의 위상, 지식인이자 사회지도층의 역할까지 부여되었는가ㅡ그리고 진지하지 않은 소설은 경시를 넘어 무시되고, 진지하지 않은 소설을 쓰는 소설가는 주류 문단에서 제외되는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한국 주류 문단의 틀이 성립된 구한말-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적절해 보이고요. (주류 문단의 틀의 형식적 요건으로서는 신춘문예 제도를, 내적 요소로서는 재일 유학생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동인회의 인맥을 들 수 있겠죠. 애초에 주류 문단은 처음 출발부터 그들만의 리그였고, 이는 지금까지도 가장 굳건하고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②는 다시,  1) “오랫동안 한국 SF 팬덤은 주류 문학이 SF에 무지하며, 문단 밖의 한국 SF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음을 비웃어 왔다.”,

2) “실상 한국 SF 독자들은 한국 SF를 평가할 때 동시대 한국 문학이 아니라 자신이 읽어온 서구 SF를 기준으로 삼았다.”,

3) “즉 한국 SF 팬덤은 SF가 한국문학이라는 장 안에서 외국 SF와는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을 납득하지 못했고, 한국 SF에 ‘외국 SF에 준하는 성과’를 내라고만 요구했다.”

의 세 문장으로 압축 요약될 수 있을 듯 합니다.

Re : 여기서부터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해야 하나 망설여지는데, 결국 본지의 시각과 최진석 씨 글의 문제 의식 사이에는 근본부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예전 특집 기사에서도 밝혔다시피 SFㅡ혹은 장르소설이 주류 문단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같이 묶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국내 창작 SF가 한국의 문학상을 받는다 것이 그렇게 중요한 사건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alt. SF의 대답은 ‘아니오’이며, 장르 출신 소설가들이 주류 문단의 상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 장르에게 중요한 사건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아니오, 입니다. 주류 문단에게나 좀 영향 있는 사건이 될 수는 있겠죠.

따라서 1), 2)는 당연하게 느껴지며, 3)에 대해서도 딱히 문제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SF는(다른 서브장르들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난 장르가 아니며, 따라서 기준점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리고 향후 십여 년은 마찬가지이겠지만) 서구의 작가와 작품들인 것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국내 주류 문단의 작가/평론가들이 SF(다른 서브장르들도 마찬가지지만)에 대해 무지하며,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것 역시 당연하고(지금까지 주류 문단에서 SF 장르에 대해 언급할 때 SF 소설이 아니라 SF 영화 나부랭이나 가지고 이야기했던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단적인 예로 {태평양 전쟁횡단 특급} 가지신 분들은 확인해 보세요.), 때문에 그런 모습을 비웃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아니, 웃기잖아요. 웃기는 거 맞잖아요. 안 웃겨요? 정말 안 웃겨요?

결국 모든 것은 ‘장르소설도 한국문학인가’라는 웃기는 질문으로 환원됩니다. 이 웃기는 질문에 대한 일차적인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일 것입니다. 어쩌면 ‘장르 문학’이라는 웃기는 조어에 얽힌, 지금까지 주류 문단을 의식한 장르 팬들의 눈물 겹게 웃기는 몸부림들은 모두 결국 이 두 어절의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은전 한 닢도 아니고 그러나, 이 웃기는 질문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결코 단답형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 아니오로 대답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대답이 아닙니다. 진정한 대답은, ‘그렇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장르소설이어야 한다’이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문학 혹은 한국 소설이란 개념은 단일하지 않습니다. 광의의 개념과 협의의 개념으로 나뉘어집니다.  ‘한국어로 쓰인, 혹은 한국인이 쓴(고전 소설 중 한문 소설을 포함시키자면) 소설이라면 모두 한국 소설 혹은 한국 문학이다.’라는 명제에서 한국 소설/한국 문학은 광의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주류 문단과 관련하여 ‘한국 장르소설도 한국 문학인가?’라는 질문에서 한국 문학은 협의의 개념, 신춘 문예 등 등단 제도에 의해 닫힌 집단인 한국 문단에서 나온/한국 문단에의해 공인된 문학으로서 협의의 개념입니다. 이 점을 간과하면 한국 장르소설과 한국 문학 사이에 대한 논의는 모두 탁상공론 축에도 못 끼는 공허한 말장난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 장르소설이 광의의 한국 문학에 포함된다고 해서 협의의 한국 문학에도 포함될 수 있는 입장권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alt. SF의 입장은 도대체 그 놈의 입장권이 왜 필요한데? 입니다만.)

협의의 한국 문학과 광의의 한국 문학을 구분해 보면 재미 있는 풍경이 나타납니다. 협의의 한국 문학과, 여러 장르소설들과, 실화소설과, 여류소설과, 아동 문학과, 청소년 소설과, 귀여니 소설과, 조선일보와, 도색 소설과, 변태 소설들이 나란히,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하는 모습… 죄송합니다. 진짜 재밌어지는 부분은 여기입니다. 협의의 한국 문학이 장르문학소설과 같은 위계의 범주라면, 장르 소설이 (협의의) 한국 문학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거나 심지어 수상까지 되는 건 자연스럽거나 자랑스러운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변태스럽고 억지스럽고 기괴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이 ‘세계 로맨스 문학상’을 받거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네뷸러 상을 받는 걸 상상해봅시다. 말이 됩니까?

그렇다면, 장르소설에 대한 평가 기준이 동시대 동일 국가의 ‘다른 장르’가 아니라 동일 장르의 다른 나라 작품들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국은 그럴 경우 결국 척도는 당연히 해당 장르가 가장 발달된 나라의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인데, 그런 점에서 국내 SF팬들이 국내외 SF들을 영미권 SF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간헐적으로 들어왔던 일본 SF나 (최근에 단편집으로 묶여 소개된) 체코 SF 등도 모두 한국 SF와 같이, 영미권 SF를 기준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이건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전반이 미국에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애초에 서브 장르로서 SF가 완성된 것이 미국이고 근대 자연과학의 틀이 완성된 것이 서구이기 때문일 뿐입니다.

③은 한국 SF계의 냉소와 대비되는 한국 판타지계의 태도(SF 쪽이 냉소라면 판타지 쪽은 읍소)를, 국내 SF팬들의 텍스트가 (국내에 번역된) 해외 SF들이었던 것에 비해 국내 판타지 팬들의 텍스트는 대부분 국내 창작 판타지였던 것으로 설명합니다. (alt. SF라면 나이가 어리고 견문이 적어서라고 그냥 냉소했을 텐데, 좀 부끄럽군요) SF와 별로 관계 없는 이야기이니 넘어갑시다.

제3장의 제목은 ‘2000년대 후반의 상황 변화ㅡ문단’이고, 소제목은 각각,

①기존 주류문학 담론의 퇴조

②새로운 문학권력의 출현

③젊은 작가 · 젊은 장르에 대한 주류문학의 주목

입니다. 별로 절 별로 정리할 필요성은 없어 보이고,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안 팔려서 새 상품 찾기 시작했어요.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뻔한 얘기니까 넘어가죠. 이념의 80년대가 끝나고 탈이념은 개뿔 황금만능주의와 신자유주의의 90년대를 지나가면서 한국 문단의 정신에서 문학성과 예술성과 작품성이 모두 송두리째 상업성으로 바뀌었다고 요약하면 한 번 죽은 문학을 두 번 죽이는 셈이겠죠. (어라? 해버렸네?)

제4장의 제목은 ‘2000년대 후반의 상황 변화ㅡ장르’, 소제목은,

①한국 판타지 팬덤의 와해ㅡ’1세대’ 작가군의 몰락

②’새로운’ 한국 SF 작가들의 출현ㅡ이식문학 SF의 명암

③장르문학 팬덤의 자체적 대안 모색과 그 결과

입니다. 90년대 말 대형 서점에서도 잘만 팔려나가던 국내 창작 판타지 흥행이 과거의 영광은 완전히 잃어버린 채 대여점 귀퉁이에 빌붙어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한 수준으로 완전하게 몰락해버린 현실에서 새로운 활로로 주류 문단으로의 진입이 모색되었으며(①), 언제나 단속적이었던 국내 창작 SF 작가층도, 2000년대 이후 완전히 새로운 작가들이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주류 문단으로의 편입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입니다(②). 그러나, 편입 얘기가 나온 김에 편입학의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2학년에서 2학년으로 편입해서 3학년으로 진급할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2학년에서 다시 1학년으로 내려가버리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됩니다. 즉, 2000년대 이후 문학 시장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후죽순격으로 난립한 각종 새로운 문학상의 경우 장르 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수상자들이 난데없이 신인 취급을 받게된 것입니다(③).

①은 논리적 비약이 좀 심한 편인데, 원인과 결과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 글 전체의 논지 전개를 위해 작위적으로 끼워 맞춰, ‘1세대 작가군’으로 통칭되는, 언더그라운드(PC 통신망)에서 오버그라운드(출판 시장)으로 올라왔던 초기 판타지 작가들이 시장의 변화에 따라 (사실은 필연적으로) 몰락한 뒤 대안적 출구로 메인스트림으로의 진출이 필요해졌다는 건 아무래도 좀 수상합니다. 게다가 ②에서 SF 쪽으로 눈을 돌리면, 366쪽에서 367쪽으로 이어지는 논의는 구체적으로 복거일, 듀나, 배명훈&(?)김보영에게 단속적으로 국내에 유입된 해외의 SF들이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무엇들이었으며, 그 영향은 또한 과연 어떠어떠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할 텐데, 별로 상관 관계가 없는, 국내 번역 출간 해외 SF 작가군의 중복 문제만 잠시 건드리더니 뜬금없는 ‘따라서’라는 지시어로 건너가버리니 할 말이 없어집니다. (아니, 도대체 ‘우리는 SF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따위 사고 방식을 가진 SF 작가가 누구였는데요? 관념 속의 허수아비 아닙니까?) 그보다 ‘이를테면 전통적 SF 팬덤과 일정 정도 거리를 두던 배명훈, 김보영이 SF 팬덤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되었다는 점(368쪽)’은 2000년대 전후로, 기존의 SF 팬들이 노화-취직과 결혼, 육아 등 속세의 잡다한 일들로 SF에서 거리가 멀어지고, 기존의 판타지 팬들과 베이스가 거기서 거기인ㅡ어쩌면 보다 풋익은 새로운 독자층이 행복한 책읽기 출판사나 디시인사이드 판타지 갤러리 등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된 결과라는 것이 보다 타당한 해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된 SF 독자층이 이미 국내외 SF의 독서로부터 멀어졌을 뿐더러, 듀나 이후 작가군에 대해서는 아예 무지하거나 비판적 혹은 유보적이라는 것은, 명시적 근거를 대기는 힘들지만 그러한 부담을 배제한 상태에서는 언급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③은 팬덤과 작가, 출판업자를 (설마 의도적으로?) 혼동한 혼란스러운 논의인데(가장 큰 부분은 기존의 주류 문단과 , 글 전체의 논지 전개를 위해서는 역시나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았겠지요. 그러니까 이제 그 망할 논지의 마지막 마무리로 가봅시다.

제5장 제목은 ‘장르와 주류의 결합, 그 명암’이고, 각 절의 제목은 각각,

①장르문학 저변의 확대

②젊은 작가, 젊은 장르 담론의 문제

③과연 ‘주류’ 진출인가

입니다. 모두들 지쳤으니 요약과 함께 그냥 끝냅시다.

Re : ①은 장르소설가들이 주류 문단 쪽의 주목(과 시상)을 받은 것이 장르 창작-주류 비평의 행복한 결합 혹은 심지어 필연적인 귀결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 글이 수록된 “삐평”의 출간 의도가 이 글에도 반영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십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주류 문단의 비평이 장르소설의 창작을 키울 수 있으리라는 건, 장르소설의 진흥을 위해 주류 문단의 작가들을 끌어들여보자는 생각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 MB가 다 해주실 거야!’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거랑 비슷해 보인달까요. 애초에 (주류) 비평에 대한, 오해와 선망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하기도 했던 특집 기사에서 다루었으니 넘어가겠습니다만. 

②는 4장의 ③과 비슷한 문제를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4장의 ③과 더불어, 외부의 인정에 목 맨 장르 내부의 맹목적인 욕망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 인용구들이 참 보기 불편합니다.

③의 마지막 문단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최진석 씨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글을 끝맺습니다.

“더욱이 현재 ‘젊은 작가’들의 ‘등단’은 장르문학 진영과 주류문학 진영 양측에서 일어난 위기 상황으로 인한 임시 결합이다. 즉 위기 상황이 해소되면 이 임시 결합은 언제든지 해소될 수 있다. ‘참신한 젊은 작가’라는 프레임을 잃은 뒤의 장르 작가들이 문단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새로운 장르’가 주류문학 진영 쪽에 ‘새롭지 않은 장르’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주류문학’과 ‘장르문학’의 허구적 경계가 허물어질 수도 있고, ‘한물 간 장르’가 됨으로써 토사구팽당할 수도 있다. 그때 장르문학 진영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주류 문단의 백여 년 가까운 순혈주의 근친 교배로 인한 상업성 저하든 세계 경제 위기와 뉴미디어 등장 등으로 인한 출판 시장 불황이든 ‘안 팔려요’라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새로운 피 수혈의 일환으로 기획, 진행되고 있는 장르소설의 주류 문단 편입(문학상 수상)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요원함에 따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ㅡ최소한 지속적으로 간헐적으로 시도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밝힌 대로 장르 소설과 (마찬가지 동등한 위계인 서브 장르로서의) 협의의 문단 소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에 따르면 제대로 된 비평이나 평가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며, 오히려 평가를 받는다고 할 경우 본연의 장르로부터는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주류 문단과 주류 독서 시장에서 한국 SF가 각광을 받는 날이 오더라도, 막상 그 날 SF의 참맛을 아는 팬들은 고픈 배를 움켜쥐고 다시 해외 SF 번역본을 찾아 헤매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물며 한때의 유행으로 팽 당한 이후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alt. SF로서도 궁금하군요. 자신들의 무지와 헛된 욕망을 깨닫고 반성하게 될 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잘 나갔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주인님’들이 다시 불러주시기만 기다리며 추운 밤골목에서 외롭게 냥냥거릴지.

Re : Re : 노파심에서 언급하자면, “삐평” 준비 작업 진행 중 alt. SF에도 원고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한국 SF 담론의 지형도 (상)한국 SF 담론의 지형도 (하)를 일반적인 리뷰 형식으로 수정하여 수록할 예정이었으나, SF 팬덤과 주류 문단 사이 등에 대한 편집부 측과의 견해 차이로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입부의 “삐평” 전체에 대한 단평은 이런 사정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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