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지의 바다

…SF 담론 섬의 바깥에는 평생 SF를 한 편도 읽어보지 않은, 그러나 SF라는 말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서펀트들이 여기저기 출몰하는 무지의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가. SF는 불량식품이다.

‘SF는 유치한 아동용 오락임. 만날 외계인 나오고 광선총이나 쏘고 황당무계하고 백해무익함. 어른이 되어서도 SF 보는 종자들은 아직 철이 덜 든 거임. 우리 애도 요새 공부는 안 하고 피씨방에서 게임이나 함.’

오락으로서의 SF라면 핵심을 짚은 관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유치’와 ‘황당무계’, ‘백해무익’ 같은 표현이 문제가 되는군요. 그렇지 않은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공상과학’ 같은 표현에 대해서 아직도 많은 SF팬들이 질색하는 것도 이러한 편견에 고통받았던 지난 날의 상처가 아직 채 아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SF의 가장 큰 효용 중 하나가 재미인 것은 사실로서 충분히 인정할 수 있어도, SF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의 진면목이 철저히 무시되고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나. SF는 산업이다.

‘SF는 고부가가치사업으로 일찌기 승용차 백만 대 수출 이익과 맞먹은지 오래이므로 민족의 무궁한 영광과 경제 발전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해야 함. 특히 영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분야에서…’

SF 소설을 읽는 우리와는 무관한 이야기군요. 그냥 영화판에서 심 감독이랑 같이 그러고 놀라고 하죠. 뭐.

…라고 쿨하게 받아치고 넘어가고 싶은데, 의외로 뿌리가 깊어서 해악도 큰 담론입니다. 궁극적으로는 SF 소설을 SF 영상을 위한 소스로만 보는 관점이 아닙니까. SF 가지고 과학적 내러티브 어쩌고 하는 치들을 발본색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다. SF는 어렵다.

‘SF는 과학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할 것 같고 뭔가 골치아프고 복잡해 보여요…’

(우리는 모두 알지만) SF 내부의 서브 장르의 스펙트럼은 다양해서, SF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일부 하드 SF를 일반화한 데서 기인한 오해, 혹은 대한민국에 만연한 기초적인 과학 상식(혹은 교양)의 결핍의 한 징후일 것입니다. 어쩌면 일체의 지적 유희, 정도 이상의 복잡한 사고를 모두 거부하게 만드는 이 시대의 야만주의의 결과물일지도…

2. 오해의 해안

…SF 담론 섬은 섬 주제에 있을 것은 다 있습니다. 그 최외곽에는 다 큰 어른이 된 다음에야 불순한 목적으로 SF를 속성 섭렵한 이구아나들이 울퉁불퉁한 바위에서 금빛 게으른 낮잠을 자는 해안이 있습니다…

라. SF는 예언이다.

‘쥘 베른은 잠수함을 예언했고 웰즈는 공중전을 예견했음. 또, 클리브 카트밀은 원자폭탄을 예언했고…’

(그런데 왜 로또 맞은 SF 작가는 없답니까.) 속성상 효용론에 속하는, 유구한 전통을 지니 담론입니다. 외삽법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근대 과학 기술의 발전에 기반한 새로운 시간 관념이 SF라는 장르의 탄생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면 (유사) 미래 예측은 SF의 핵심 중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허구와 사실을 구별하지 못하면 오해일 뿐이지요. SF는 실제 미래를 예측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미래 혹은 미래의 탈을 쓴 가능성의 세계를 유희적으로 사변하는 것 뿐입니다. (문득, 앞으로 미래에 역사학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자기 소설도 사실성이 없는 게 아니라는 모 SF 작가 선생님의 희대의 명언이 다시 떠오르는군요.)

마. SF는 교과서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세계에 당당하게 들어가서 의식적으로 활발히 움직이는 것도 방법이 되겠고, 상상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필요한 학습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상상적 스토리텔링의 전통적인 보고인 문학, 그 중에서도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예민한 촉수를 들이대는 과학소설을 탐독하는 것이라 하겠다.” (박상준, {목격담 UFO는 존재하는가} 서문 중)

담론 라.와 비슷한 관점입니다. 아무래도 오해의 해안에는 효용론에 속하는 담론들이 많이 횡행하는군요. 앨빈 토플러의 ‘SF를 통해 합리적이면서도 유연한,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계발할 수 있다(혹은 계발해야 한다)’ 정도는 무난하지만 미래 사회(혹은 이미 미래화된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SF를 읽어야한다는 건 본말이 전도된 거지요.

바. SF가 문학을 구원할 거야.

“저는 위기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소설이 안 팔리고 있거든요.”(임형욱, {HAPPY SF 창간호} p.52)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문학의 구원자로 뜬금없이 SF를 불러올리는 황당한 담론입니다. 단지 19세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유통기한 지난 것을 호들갑스럽게 문학 전체에 확대 적용하고, 앞으로 갈 길이 구만 리나 창창하게 남은 SF의 앞날을 겨우 구시대적 일부 문학 장르의 구원에 머무르게 하는 견강부회한 관점은 상대할 가치가 없습니다.

사. SF는 문학이다. 고로 문학은 SF다. (SF가 문학을 구원할 거야2)

“‘리보펑크’가 생명공학을 소재로 한 SF를 지칭하고 ‘슬립스트림’이 문학 제도 안에서 나온 SF경향의 소설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키메라의 아침}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사실 자체를 이렇듯 그가 완강히 부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박진, ‘장르문학에 대한 오해와 편견’ 중)

‘바.’가 주류로 올라가고 싶은-기득권의 일원이 되고 싶은(혹은 주류-기득권의 관심 / 인정을 받고 싶은) 장르 내부의 유치하고 불순한 욕구의 발로라면 이쪽은 SF를 이용해먹고 싶은 장르 외부-주류 문단 일부의 불순하고 사악한 욕망의 발현이라 하겠습니다. 즉, 포화 상태 레드 오션인 기존의 문단 비평에게 SF 등 장르소설은 일종의 미개척지, 블루 오션인 셈이랄까요. 의도가 불순한 만큼 내용도 허접해서, 장르 안에서 이미 돌고돈 이야기들을 마치 새로운 이야기인 양 주워섬길 뿐입니다. 본격 SF는 읽지 않고 자기네 주류 문단에서 SF 닮아 보이는 애들 가지고 SF 딱지 붙이기 놀이하다가 반박당하기도 하고요.

아. SF는 장르문학 중에서도 고급이고 우월하다.

하드 SF 쓰는 사람들은 무조건 똑똑해보여. [4]  삶의 나무   2011/05/22  28
하드SF는 선택받은 자들의 영역 [2]  김강건   2011/05/22  20
뭐? 공돌이의 프라이드이자 장르계의 인텔리 SF가?! [1]  세츠나..   2011/05/14  28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팬들도 은근히 품고 있는 감정이죠. SF에 대한 애정과 구별하기 힘든 부분입니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보다는 다른 장르팬들 특히 인접한 판타지 독자들 중 일부(예를 들어 디시인사이드 판타지 갤러리라든지)의 편견 혹은 그런 편견에 빌붙어 SF팬인연 과시적으로 다니는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헌책 수집꾼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겠군요) 일정 부분 담론 다.의 발전형이라 할 수 있을 텐데, SF가 유연한 상상력과 기초적인 과학 상식(혹은 교양)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브 장르의 특성을 우열론으로 연결시키는 건 논리적 비약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문학ㅡ혹은 대중문화에서 서브장르 간에 무슨 고저우열이 있단 말입니까.

3. 담론의 정글

…해안을 지나 섬 안쪽으로 들어가면 다 시든 야자수부터 아름드리 열대우림수까지 다양한 나무들이 뒤섞인 괴상한 정글이 펼쳐집니다…

자. SF는 상상 과학이다.

“무엇보다도 과학 소설이니 사변 소설이니 부르면 영화나 만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을 포함하지 못하니까요.^^ (언젠가 이야기했지만, ‘과학 소설 영화’라는 말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표도기, JOYSF)

SF를 ‘과학소설’ 대신 ‘상상과학’으로 부르자는 건 결국 SF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외연을 넓히면 본질은 흐려지는데, 대개 스토리나 구체적 사건, 갈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 덧붙여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결국 SF의 중심을 소설에서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으로 옮기거나, 오덕스러운 설정 놀음을 정당화하는 것 뿐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지우기 힘듭니다.

차. SF는 사변소설이다.

‘{해리 포터}도 speculative fiction으로 보면 SF가 될 수 있지 않나요?'(Happy SF 출판사 홈페이지 독자 게시판 덧글 중)

본 특집은 SF의 정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SF에 대한 팬덤 안팎의 태도와 인식을 정리해보자는 것이죠. 담론 차.는 사변 소설이라는 용어를 포괄적으로 사용해서 SF와 SF 아닌 것들을 몽땅 뒤섞어버리는 사고방식입니다. 실제 작품들의 탐독을 통해 SF에 대한 관점이 형성된 게 아니라 2000년대 전후로 드문드문 나온 안내서와 개론서들을 통해 SF에 대한 피상적 관점을 가진 경우 생기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카. SF는 경이감이다.

“말씀하신대로 과학소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자연의 경이로움, 센스 오브 원더 같은 것을 저희가 넣으려고 했으면 이게 과학소설이라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려고 했을 텐데, 처음부터 이거는 과학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소설 잘 읽은 독자들이 보면은 웃는다, 그래서 저희가 저희 스스로 이거는 그냥 테크노 스릴러야, 표방을 하고 낸 거예요. 저희가 SF도 아닌 것을 가지고 SF라고 주장한다, 이런 얘기 안 들으려고요.”(정재승, {눈 먼 시계공} 블로거 간담회 녹취록 중)

SF의 재미, SF의 감동을 잘 나타낸 말 중 하나가 경이감인 건 분명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이감이 SF의 정의 혹은 필요충분조건인 것은 아니죠. 피상적으로 이해한 경이감에만 집착해서는 오히려 SF의 본질을 놓치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문화적 변두리에서 어구에 집착하고 형식적 피상적 요건을 교조적으로 섬기는 것은 SF도 다를 바 없나 봅니다. 위 인용문 출처 포스트의 덧글 중 유로스의 관점이 적절하군요. 

타. SF는 재미다.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무지와 오해가 뒤섞인 바닷가에나 자랄 법한 나무입니다만, 이쪽은 팬덤에서 쓴 맛 단 맛 다 보고 반박귀진, 반본환원한 경지에 이른 올드팬의 관점입니다. 이쯤 되면 ‘공상 과학’이란 표현도 정답고, 예전엔 무슨 일로 그렇게들 싸웠나 싶죠.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모습이 멋있어 보이긴 합니다만, 결국 귀차니즘의 일종으로 볼 수 있겠고, 별로 생산성이 없는 관점이네요.

파. SF는 마약이다.

“이런 SF를 어떻게 분류할까 하다가 심연 위의 불꽃에서 착안해 high speed SF라고 불러주기로 했다. SF에 등장하는 첨단기술은 어느 정도 장르 내부에 고착되었다. 하지만 SF 독자 사이에서도 장르에서 유통되는 과학기술을 소화 흡수하는 속도에 차이가 나는 것 같다. 큰 강이 있고 폭이 좁고 속도가 빨라 쉽게 붕괴되는 지류가 있다. 심금을 울리는 서사와 인문적 사유에 천착, 의미의 가소성 따위, 환유와 은유를 선호하며 SF의 위대한(?) 사회 실험에 집착하는 것들은 ‘예의상’ 큰 강의 흐름에 해당하는 medium speed, SF 장르 자체가 이미 문화에 내재되거나 융합되었다고 믿고(영화 따위?) 시시한 인간 서사의 불편함 그대로 기계물 판타지스럽게 멍하면서 때때로 지저분한 계몽주의적 시각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천한 것들은 low speed, 이미 산전 수전 다 겪은 21세기 독자를 대상으로 작가가 귀찮은 부연 설명 없이 논문에서나 보는 전문 용어로 떡칠하며 자기 할 얘기를 마음껏 해대는 종류를 high speed라고…”(luke, 개인 블로그의 {블라인드 사이트} 감상 중)

담론이라기보단 극소수 하드코어팬들의 취향입니다. 담론 타.의 극단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서구 SF의 최근작 중에서도 가장 첨단에 놓인 작품들에서 경이감이라는 말만으로는 형용 불가능한, 지적 쾌감과 정서적 감동이 융합된 정신적 황홀감을 중시하는 관점이죠. 역외권에서 저속권이나 무사고심부에 잘 내려가지 않는 것처럼 팬덤 안팎과의 상호작용이 드물고, 담론 형성에 큰 영향이 없습니다.

하. SF는 SF다.

동어반복의 말장난입니다. 지금까지 나열한 담론 혹은 관점들이 뒤섞인 것이 아마 일반적인 SF팬들의 평균적인 의식 구조겠죠. 자칭 타칭 SF 평론가들을 정리해 보는, ‘담론의 정글’ 중심에 솟아있는 ‘4. 평론의 산맥’ 등은 다음 호에 실을 예정입니다. 본 기사의 관점이나 분류에 추가 혹은 수정할 사항이 있을 경우 의견 주시면 귀 기울여 듣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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