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line

 {화성의 타임 슬립}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2011.05.11)

신경쇠약 직전의 화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딕의 우주에서 외계 식민지는 미국 개척 정신의 대척점에 놓여 있습니다. 미국 현대 문화의 쇠락한 찌꺼기들과 함께 힘없이 변방으로 떠밀려나온 사람들은 권태와 소외감, 우울증 속에서 자동 인형처럼 반복적으로 살아갑니다. 시간의 흐름을 왜곡할 수 있을 정도의 자아를 가진 자폐아마저도 평범하고 진부한 욕망의 대상이 될 뿐이며, 욕망은 공허한 삶을 계속 굴리는 관성에 불과합니다. 잭 볼렌의 정신분열증적 비전 속의 자동인형들의 세계도 볼 만하고, 호주 원주민들을 연상시키는 화성인들의 모습도 독특합니다. 독특하다는 말이 나온 김에 말이지만, 같이 출간된 세 편 중에서 필립 딕의 독특한 정신 세계가 가장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죽음의 미로}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2011.05.11)

필립 딕이 외계탐험물을 쓰면 결국 이렇게 됩니다. 외계 행성은 기계장치로 꽉 찬 외계 생물들이 천연덕스럽게 살아가고ㅡ그러다 심심하면 주역의 점괘 풀이 같은 메시지나 뱉어놓고ㅡ그로테스크한 지형 속에서는 보는 사람마다 내용이 달라지는 빌딩이 홀연 출몰했다 사라지며ㅡ아무도 그 건물에 들어가지 못 합니다. 그러고 보면 필립 딕은 카프카와 얼마나 닮았는지!ㅡ심리적 문제들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할 만한 탐험대는 의문의 살인 사건 속에서 우왕좌왕하며 천천히 자멸합니다. 현대에 필립 딕이 각광받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필립 딕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한 ‘현실의 비현실성’이 역시나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낯간지럽게 말미에 등장인물들의 입까지 빌려 작가 자신이 극찬하는 작품 속 신학은 별로 참신하지 않았지만 송과선과 직접 연결된 기도를 통해 신의 응답이 현실화되는 세계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필립 딕적인 반응들은 상당히 귀엽습니다.

  {닥터 블러드머니} 필립 K. 딕 지음, 고호관 옮김. 폴라북스(2011.05.11)

초반의 급격한 장면 전환ㅡ핵전쟁의 갑작스러운 충격을 이렇게 생생하게 살려낸 작품이 또 있었을까요? 때론 상세한 서술보다 불친절한 비약이 더 효과적입니다ㅡ이후로는 여타 많은 핵전쟁 이후 이야기들처럼 산업 혁명 근처까지 퇴행한 사회가 펼쳐집니다. 진부하다고요? 우리의 필립 딕이 진부할 리가요. 있는 줄도 몰랐던 기기묘묘한 초능력자들이 시골 마을에서 지구와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기 위해 결전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소설은 제대로 필립 딕스럽게 전개됩니다. 죄의식과 정신분열증, 외부 세계에 대한 순수한(SF적인) 호기심과 저열한 지배욕이 돌연변이와 장애아, 정신질환자의 대결 속에서 맞부딪힙니다. {유빅}, {죽음의 미로} 등의 심술궂은 무한 반복 지옥에 비해 다소 안이해 보일 수도 있는 결말입니다마는 {앤드로이드는 꿈을 꾸는가}나 {화성의 타임 슬립} 같은, 간난신고 끝에 그래도 누군가는 일상으로 복귀하는 모습은 필립 딕의 작품 세계 전반에 감도는 혼란과 광기를 생각해보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필립 딕은 아마도 그의 소설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원할 방법을 찾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던의 아이들} 로버트 하인라인 지음, 김세민 옮김. 기적의책(2011.04.18)

전형적인 하인라인식 청소년용 우주  모험 SF입니다. 정보가 모두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사고와 행동은 명쾌하고 대립과 갈등은 분명하며, 스토리 진행은 빠르고 경쾌합니다. 많은 올드팬들은 어린 시절 읽었던 아동용 판본과의 차이점에 궁금하시겠지만 읽어본 바로는 (유의미한) 큰 차이는 없습니다. 일대일로 판본 대조를 해보지 않았으니 보다 디테일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저 기분 탓일지 모르겠고요. 하인라인의 자유주의ㅡ혹은 엘리트주의 혹은 파시즘ㅡ도 중세 유럽 암흑기스러운 무지와 편견, 음모에 대항하기 때문에 보다 생각 없이(!) 혹은 사상적 불편함 없이 신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아무런 생각도 비중도 없는 세대 계승을 위한 씨암탉 수준으로 취급되는 부분이 조금 걸리지만 까짓 거 원조 마초 SF 작가가 쓴 미국 10대 남자 청소년용 모험물인데 그러려니 해야겠죠. 성실한 권말 해설이 보기 좋습니다.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찰스 유 지음, 조호근 옮김. 시공사(2011.04.22)

(이 코너에서 리뷰하는 것이 적절할지 일말의 망설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트위터에서 리퀘스트도 있었으니 언급해봅니다)

취향에 따라 호오가 많이 갈릴 작품입니다. 구미 쪽은 장르소설이 자연스럽게 분화한 역사 덕분에 굳이 슬립스트립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주류소설의 유연성이 강하고ㅡ최근 우리나라 주류 문단은 이제야 그걸 (또 어색하게) 따라하기 시작했죠ㅡ이 소설 역시 그 연장선 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장르 SF는 아니고, 시간여행과 타임루프, 타임패러독스 등은 SF에서처럼 작품 안에서는 일단 실재하고 작동하는 개념이 아니라 모두 일종의 문학적 유희ㅡ은유일 뿐입니다. (르 귄은 SF는 은유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주류문학의 은유는 느낌이 다르네요.) 그리고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ㅡ물론 아무리 읽어도 익숙해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죠ㅡ독자들은 공연히 골머리 아파할 수많은 이공계 개념이나 용어들도 결국은 세련되고 재치 있는 문학적 유희의 일부이고요. 이 모든 유희가 공허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이민 2세로서의 작가의 가족과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문제 의식이 소설 안에 진솔하게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기에 장르소설 팬들이 좋아할 만한 작은 재미들이 양념처럼 살짝살짝 숨어 있고, 과학적 개념을 문학적으로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결말은 슬쩍 SF적으로도 감동적입니다.

on-line

  [고요의 언어 1, 2] 이재인 지음, 웹진 크로스로드(2011.5월, 6월호)

무엇보다도 세계의 기본 원리를 거의 끝까지 베일에 감추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솜씨가 감탄스럽습니다. 문장도 안정적이고,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원숙까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풋내 나지는 않아 기본적인 읽는 맛이 있고요. 전반적으로, 지난 호에서 다룬 [미래 도둑]을 제외하면 근래 읽은 웹 단편중에서 제일 낫습니다. 다만 이번 호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난, 이 기묘한 세계의 비밀이 기본적으로 과학적 개연성이 부족한 점은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감응자’와 ‘감응’에 대해서 작가는 만족스러운 설명을 해내지 못했고, 그 결과 세계의 종말과 변화라는 큰 스케일의 결말이 불러일으킬 법한 감흥을 많이 까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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