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존의 논의를 점검해봅시다.

1) 아이작 아시모프 : 마이클 크라이튼이 {안드로메다 스트레인}(1969)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일이 기억난다. 그때는 과학소설이나 판타지가 진짜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이 흔치 않았는데 그는 그런 일을 이루어낸 ‘외부인’이었다. 왜 그가 외부인이었을까? 그는 과학소설 잡지에 기고하지 않았다.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중 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ㅡ{아시모프의 과학소설 창작백과} 김선형 옮김, 오멜라스 p.91~92

(아시모프가 SF의 3대 거장이긴 하지만, 구시대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위의 책에서 드러나는 그의 SF관은 기본적으로 1920, 30년대. 너그럽게 갱신해주어도 60년대 이후를 넘어서지 못한다. 구시대적 관점으로는 크라이튼 뿐만 아니라 베르베르도, 그리고 지금까지 alt. SF의 리뷰란을 장식해준 수많은 국내 온라인 걸작 단편들도 모두 SF의 기치 아래 대동단결 사해동포가 되어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 듯. 하. 하. 하) 

2) 홍인기 :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 또는 영화가 에스에프가 아닌 이유는 그의 과학이 ‘엉터리 과학(bad science)”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에스에프라는 겉모습을 “공포물”에 입혀서 독자 및 관객의 비이성적인 정서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건 이미 에스에프계에서 오래 전에 얘기가 다 끝났다. ㅡ출처 : The 3rd Eye

(다른 지면에서는 마이클 크라이튼이 과학에 대한 대중의 해묵은 오해와 공포를 이용할 뿐 과학의 발달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한 통찰을 하지 않기 때문에 SF가 아니라고 했다.)

3) 테드 창 :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죽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드린 것입니다. 이 [죽은 과거]란 소설은 진보적 이야기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결말은 시간탐사기가 파괴되어서 아무도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가 아닙니다. 세상은 변할 것이다, 라는 메시지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SF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SF는 변화의 문학이며, 세상이 급진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현실에 반영합니다. ㅡ출처 : 날개를 펴는 곳의 녹취에서 인용

(따라서 마이클 크라이튼은 항상 소설 속 사건이 세계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결말로 끝나기 때문에 SF로 보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고 같은 강연에서 발언했다.)

2. 떡밥의 의의를 검토해봅시다.

특정 작가 혹은 특정 작품이 SF인지 아닌지는 애초에 답이 없는 떡밥입니다. 많은 예술 장르에서 그런 것처럼ㅡ쓰레기통 두드리는 소리가 음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엔진 시동 거는 소리는? 하지만 난타 공연이나 Art of noise의 Close(To the Edit)를 생각해 봅시다ㅡ문학에서도 장르의 범위를 명확하게 한정짓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문학 개론서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무의미한 질문이라고 전제한 다음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장르의 경계는 근대 이후의 국경선처럼 명확하게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종족들의 영역처럼 (혹은 가시광선 스펙트럼 사이의 색구분처럼) 비분절적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의 표현을 따르자면 ‘문학’과 ‘잡초’는 ‘존재론적’ 용어라기보다는 ‘기능적인’ 용어다. 이 용어들은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지 사물의 불변적인 존재에 대하여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 용어들은 하나의 텍스트 혹은 한 포기의 엉겅퀴가 사회적 전후맥락 속에서 갖는 역할, 주위에 있는 것들과의 관계나 차이점, 그 행태의 양상, 그것이 쓰이는 목적과 그것에 관련된 인간적 실천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문학’은 순전히 형식적이고 공허한 종류의 정의다. (테리 이글턴, {문학 이론 입문}, p.18 정명환, 정남영, 장남수 공역, 창작과비평사 1994. 8. 25. 초판 9쇄)

그런 점에서 alt. SF에서 지난 여섯 달 동안 몇몇 국내 창작 단편들에 대해 SF가 아니라고 리뷰란에서 쏘아 붙이기는 했습니다만, 반론의 여지는 충분히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누가 SF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경계를 확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동시에 (Potter Stewart의 유명한 발언(I know it when I see it)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 마디로 명확하게 설정할 수는 없지만 장르의 범위에 대한 암묵적인 경계는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학을 ‘객관적이고’ 기술적인 범주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그저 사람들이 문학이라고 부르기로 제멋대로 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의 가치판단들은 개인적 변덕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판단들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처럼 분명히 흔들리지 않는 더욱 심층적인 신념의 구조들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위의 책 26쪽)

테리 이글턴의 예에 의하면 SF는 문학보다는 잡초 쪽이겠지만, 하여간 문학이라는 단어의 함의가 가치판단에 기반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 이글턴의 논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시공사판 {우주의 전사} 권말 해설의 그 유명한, 강수백씨의 연대별 인용구로 점철된 SF의 정의 중 후반부의 ‘SF란 우리가 SF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혹은 ‘SF로 출간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SF이다’ 등의 인용문이 국내의, SF에 대해서 아는 것 별로 없으면서 허세 부리기는 좋아하는 찌질이들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특정 작품 혹은 특정 작가가 특정 서브 장르에 속하는지는, 그 자체로서는 정답 없는 문제라고 할지라도 해당 서브 장르의 특성에 대해서 각자의 기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그러니,

3. 떡밥을 물어봅시다.

SF는 이미 일어난 일 혹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일반적인 소설의 개연성 관련 설명에서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물론 SF의 스케일은 일반 소설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요즘 당신 이웃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와 ‘서기 1만년 경 어느 모래행성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일어날 수 있는’이라는 표현 자체가 양쪽에서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SF에서는 논리적 정합성과 관련되어 쓰이지만 일반 소설에서는 개연성, 혹은 재현성과 보편성에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그런데 마이클 클라이튼의 소설들은 대개 이미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안드로메다 스트레인}은 ‘이 책은 미국 최대의 과학적 위기를 5일간의 기록으로 정리한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명지사, 정성호 옮김, 1993. 제3쇄 p.7)

{콩고}의 첫부분에도 ‘두 개의 탐험대에는 이와 같은 갖가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대단히 많이 닮았다. 아메리카대도 대원의 3분의 2를 잃고, 100년 전의 스탠리 탐험대처럼 목숨만 겨우 부지해서 정글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또한 아메리카대도 스탠리처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했다. 식인종이나 피그미족, 정글에서 번성했던 문명의 유적, 그리고 잃어버린 막대한 보물 등의 이야기이다.’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습니다. (삼환기획, 정성호 옮김, 1992. p.13~14)

유명한 {쥬라기 공원}의 책머리 마지막 부분은 ‘그러나 ‘인젠 사건’에서 실제로 중요했던 많은 인물들은 그 합의서에 서명했던 사람들 속에 끼어 있지 않다. 그들은 1989년 8월 이틀 동안 코스타리카 서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한 섬에서 벌어진 그 놀라운 사건의 마지막 과정을 나에게 기꺼이 이야기해 주었다.’라는 구절로 끝납니다. (김영사, 정영목 옮김, 1992. 1판 20쇄 p.15)

전형적인 미국 대중 논픽션의 어법들. ‘이미 일어났던 일’이라는 모조 사실성은 독자의 흥미와 관심을 빨아들이기 위한 베스트셀러의 전략일 것입니다. 따라서 등장인물들은 마치 실존 인물인 것처럼 다루어지고({안드로메다 스트레인}과 {콩고}의 머릿말 마지막에는 등장인물들을 포함한 수많은 인명들이 참고인으로 언급됩니다.), 스토리는 스릴러 소설과 다큐멘터리의 내러티브가 뒤섞여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우리는 왜 몰랐을까요? 사건은 관계 당국에 의해서 교묘하게 은폐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 사건은 결국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논의는 다시 테드 창의 관점에 잠시 합류합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의 앞서 논의로 돌아가봅시다. SF는 불가역적인 사건을 다루는 진보적인 장르라는 테드 창의 주장은 자칫 텍스트 외적 기준으로 텍스트를 평가하는 듯한 오해(와 거부감)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몰입감을 위해서든 어째서든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꾸며내기 위한 짝퉁 리얼리티를 위해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은 세밀화의 방식을 취합니다. 장면과 장면 사이 시간 간격은 극도로 촘촘하고 장면 당 디테일은 굉장히 풍부합니다. 소설의 시점은 장편 소설이므로 전지적 작가 시점이지만 등장 인물들에게 굉장히 밀착해있어서, 때로는 1인칭 시점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등장 인물들 개개인도 입체적이고 배경과 성격, 심리가 세심하게 다루어집니다.

모두가 일반적인 SF의 어법과는 정반대입니다. SF는 개인보다는 세계에 관심이 크기 때문에 시간 간격은 성기고 장면 당 디테일은 희박하며 등장 인물은 주인공의 경우에도 배경과 성격, 심리보다는 행동에 가장 큰 초점이 맞춰집니다.

문체에 주목하는 것은 다분히 형식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보면 사실 ‘마이클 크라이튼은 SF인가 아닌가’라는 떡밥 자체가 SF를 형식이 아니라 내용으로 보는 관점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질문을 바꿔봅신다. 왜 마이클 크라이튼이 SF일 수 있다고들 하는 걸까요?

아마도 과학기술을 소재와 주제로 다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을 소재와 주제로 다루면 SF일까요? 실제로 과학적 지식 혹은 첨단 기술을 다루는 SF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흔히 하드 SF라고 부르는 작품들 역시 과학과 공학의 실제 지식보다는 그 안에 내재된 논리를 토대로 상상력을 펼치는 것 뿐입니다. 많은 정통 SF들은 단지 (‘장르 소설’답게) SF 장르의 전통적인 코드들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시모프의 로봇이나 아서 클라크의 외계인들은 모두 SF 코드 위에서 핀 아름다운 꽃에 불과합니다.

4. 낚이진 맙시다.

요약하자면, 특정 작가 혹은 특정 작품을 SF이다 아니다,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논의에 덧붙여 SF의 일반적인 문체와 마이클 크라이튼의 문체 상의 차이점에 초점을 맞춰봤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스타일 상의 차이점을 빚어낸 원인으로 이야기 속 변화가 개방적인지 폐쇄적인지에 관심을 보이는 테드 창을 거쳐서 작가가 이야기를 다루는 태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일반적인 SF와 마이클 크라이튼의 차이점을 살펴 봤습니다. (‘일어났을 수 있는 일’이라면 대체역사SF를 떠오르게 할지도 모르지만, 대체역사SF가 과거의 한 점에서 현재와는 다른 방향으로 그 이후를 향해 새로운 시간선을 외삽한다면 마이클 크라이튼은 단지 기존의 시간선 위에 없었던 점을 하나 찍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이 차이는 절대적이거나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마이클 크라이튼의 스타일 상의 특징은 SF 안에서도 힘들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깁슨 역시 시간 간격이 촘촘하고 디테일이 풍부하며 등장 인물의 배경과 성격, 심리를 세밀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물론 이야기를 다루는 깁슨의 태도는 SF적입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글들이 SF인지 아닌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들이 SF인지 아닌지, 배명훈 씨의 글들이 SF인지 아닌지는 모두 SF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종류의 떡밥은 마치 헬리혜성처럼 주기적으로 팬덤 게시판에 찾아오곤 하는데, 어느 작가가 혹은 어느 작품이 SF인지 아닌지보다는, 혹은 귀찮으니까 그냥 무조건 다 SF라고 불러주자고 하는 것보다는(모 게시판의 ‘{해리 포터}도 사변 소설’ 드립이 생각나는군요), 그 작가 혹은 그 작품이 어떤 점에서 SF인지 혹은 SF가 아닌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보다 발전적이지 않겠습니까.

 

P.S. 테리 이글턴을 인용한 건 서재에 있는 문학 개론서가 그것 뿐이기 때문일 뿐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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