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특집의 연장선 상에서ㅡ본격적인 평론은 아니지만 근래 나온 두 권의 앤솔로지의 서문과 권말 해설에는 SF 팬덤 바깥ㅡ그리고 SF 팬덤 일부가 바라마지 않는 (그럭저럭)주류 문단 일각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 까봅시다.

1.

 웹진 크로스로드에서 나온 단편집입니다. 권두 서문은 크로스로드 편집위원이시자 포스텍 인문학부 교수이신 박상준ㅡ동명이인인 ‘SF 해설가’ 박상준 씨가 한때 동일인으로 오인받아 곤욕치른 바 있는ㅡ씨인데, 이 단편집의 서문에 나타난 그의 SF관은 기본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6,500만달러를 들여 만든 ‘쥬라기 공원’은 1년만에 8억 5,000만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이는 자동차 150만대를 수출해서 얻은 수익과 같다(그러니 스필버그를 수입하자)‘는 식의 경제적/실용적 효용론에 불과합니다.

(전략) 핸드폰의 다양한 변화 발전이 소비자들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산자의 아이디어에 의한 것임을 새삼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스스로 진화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욕망을 불어넣고 새로운 필요를 만들어내는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문법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현실 너머를 꿈꾸는 상상력과 그것을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상적 스토리텔링이야말로 다양한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이끌고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변화를 낳은 원동력에 해당한다. 따라서 최소한 새로운 사회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상상적 스토리텔링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서는 안 될 것이다. (8쪽)

그러니까 스마트폰을 만들기 위한 SF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낯설고 두렵다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를 통해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길이란 무엇인가. 답은 자명하다. 그러한 변화를 낳는 원동력 곧 상상적 스토리텔링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세계에 당당하게 들어가서 의식적으로 활발히 움직이는 것도 방법이 되겠고, 상상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필요한 학습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상상적 스토리텔링의 전통적인 보고인 문학, 그 중에서도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예민한 촉수를 들이대는 과학소설을 탐독하는 것이라 하겠다. (8~9쪽)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위한 SF이고요.

경제적 효용론은 다시 윤리적 교훈론으로 이어집니다.

과학소설 읽기는 과학이 가져다 줄 긍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과학만능주의에 의해 파생될 수도 있는 문제 또한 의식하게 함으로써, 상상력을 증진시키는 효과에 더하여 우리의 균형감각을 살려주는 이점 또한 지니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분홍빛 전망과 더불어 디스토피아에 대한 회색빛 경고 또한 놓치지 않아 온 것이 전통적인 SF의 역사인 까닭이다. (9쪽)

그럴 바에는 그냥 핸드폰 설명서랑 도덕 교과서를 읽지 그러세요?

과학소설 읽기에서도 정수는 바로 한국 창작 SF를 읽는 것이다. 한국 창작 SF는, 한편으로는 SF의 이러한 전통을 이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SF 고유의 특징을 구축해 옴으로써, 우리 현실에서 필요한 상상력과 균형감각을 키우는 데 있어 안성맞춤이다. SF 일반의 상상력에 더하여 한국적 작품세계가 주는 친숙함이 가미되어 읽는 즐거움이 한층 강화되었으니, 그 외의 사정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9쪽)

신토불이~ 신토불이~

경제적이든 윤리적이든 실용주의적 효용론으로는 SF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포스텍 같은 공대라도 인문학부 교수이 맞으신지 모르겠군요. 소설을ㅡ문학을 경제 실용서 혹은 도덕 교과서로 읽어야 한다는 인문학자라니, 어딘가 좀 기괴하지 않습니까?

결국엔 SF를 제대로 된 소설ㅡ문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거죠.

(전략) 이러한 특징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무엇을 말하는가’에서보다 ‘어떻게 말하는가’에서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더 커진다는 문학론 일반의 견해를 한국 창작 SF에서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컬렉션의 모든 작품들이 문체나 서사 구성에 있어서 기본을 확실히 갖추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식의 묘미를 선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의 SF가 문학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한결 더 공고히 했다는 주요한 근거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매우 소중하다. (11쪽)

그런 얄팍한 실용주의적 관점으로는 개별 작품의 본질을 제대로 짚어볼 수도, 장단경중을 재어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뭘 소개하고 안내하겠다고 서문입니까?)

소개하고 안내해보겠답시고 시간여행을 모티프로 한 세 편의 수록작을 비교하고 있지만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는 애초에 시간여행물이 아닐 뿐더러, 나머지 두 작품 역시 단순하고 평면적인 아이디어와 설정의 비교에 단순 그칠 뿐입니다.

SF를 읽는 것은 결코 ‘SF 차원의 과학적 상상력을 음미하는 즐거움'(12쪽)이나 ‘독창적인(!) 과학적 설명들을 비교해 보는 재미'(같은 쪽)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럴 바에야 대중 과학 잡지의 미래 예측 기사를 읽거나 이재율의 블로그를 찾아가는 게 더 흥미진진하지 않겠습니까?

읽고 씹는 게 그야말로 시간 낭비였습니다.

2.

 SF에 애정과 관심이 많으신ㅡ그래서 조하형의 {키메라의 아침}을 SF라고 우겼다가 작가로부터 직접, 내가 쓴 건 SF가 아니라고 반박당하신 바 있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SF라는 걸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외치셨던ㅡ문학평론가 박진 씨의 권말 해설입니다.

SF에 애정과 관심이 많으신 문학평론가님답게, 권말 해설을 ‘듀나의 새 책을 읽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더구나 출간을 막 앞두고 있는 듀나 소설집을 활자화되기 이전에 먼저 읽는다는 건, 직접 해보니 정말 근사한 일이었다'(367쪽)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아저씨 지금 너무 흥분하신 거 아닙니까? ‘직접 해보니 정말 근사한 일이었다’는 건 어딘가 다른 상황에 적합한 문장 같습니다만?

그나저나 ‘이번엔 또 어떤 기발한 상상력으로 얼마나 기상천외한 세계를 펼쳐 보일지, 그 기대만으로도 듀나의 소설집은 서둘러 페이지들을 넘기게 한다'(같은 쪽)는 건 오오 그럭저럭 괜찮은 자세입니다. 박상준 교수이라면 ‘이번엔 또 어떤 현실적인 상상력으로 얼마나 2011년 한국의 현실을 반영했을지, 그 기대만으로도 듀나의 소설집은 서둘러 페이지들을 넘기게 한다’라거나 ‘이번엔 또 어떤 과학적 상상력으로 얼마나 독창적인(!) 과학적 설명들을 펼쳐 보일지, 그 기대만으로도 듀나의 소설집은 서둘러 페이지들을 넘기게 한다’ 운운 했을 법한 데 비해서 말이지요. 그렇지만,

(전략) 외국에 비하면 한국 장르소설은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는 판단에 좀처럼 다른 여지를 두지 않았다가 듀나의 소설을 읽고 생각을 바꾼 독자가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368쪽)

라는 문장에 정신이 아득해지지 않은 독자는 alt. SF 하나만은 아닐 것입니다. 뭐,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또,

(전략) 이제는 장르소설의 울타리를 넘어 듀나의 소설 그 자체를 개성 있고 매력적인 문학작품으로 읽을 수 있는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든다.(같은 쪽)

에 이르면 어이쿠, 정신줄 풀려나가는 소리 들리십니까. 듀나마저도 {태평양 횡단 특급}이나 {대리전}은 개성 있고 매력적인 문학 작품의 울타리 밖에 있는 장르소설일 뿐이었다 이거죠? 듀나를 예찬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장르 소설 전체를 까는 솜씨가 일품입니다. 역시 본격적인 문학평론가은 까는 솜씨도 다르군요. 거기에,

듀나의 소설이 있어 우리는 장르소설 안에서 기존의 관습과 코드들을 찾아내고 조합하는 지적인 게임이나, 이를 바탕으로 장르소설로서의 수준을 가늠하는 평가의 방식 등이 다소 단조롭고 일면적인 독법임을 알게 되었다.(후략) (369쪽)

에 이르면 끊어진 정신줄을 매달고 우리의 개념이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훨훨 날아가는 상쾌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됩니다. ‘기존의 관습과 코드들을 찾아내고 조합하는 지적인 게임이나, 이를 바탕으로 장르소설로서의 수준을 가늠하는 평가의 방식’으로 SF 소설을 읽으셨던 분 계십니까? 도대체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자기가 예전에 그랬으면 솔직하게 자기가 그랬다고 이야기를 하든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대상을 느껴보려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죠. 머리는 느끼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데 쓰는 겁니다. 그런데 즐기려면 느껴야 하거든요. 느껴지지 않으니 어디서 들은 풍월만 조합해서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재미 없으면 안 읽으면 되는 게 대중문학, 장르소설 아녜요?

이쯤 되면 이 분들이 왜 장르소설, SF소설을 제대로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면서 숟가락 얹으려고 그렇게 안달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뭐, 주류 문단 중심에 있지 못하는, 주류 문단 언저리에서 치열한 경쟁의 장인 중심부로 들어갈 수 없어 새로운 블루 오션으로 장르소설, SF소설을 찾아내 선점하려는 거라는 식의 악의 섞인 억측은 하지 맙시다. 설마 그렇겠습니까? 그렇지만…

이에 더하여 우리를 둘러싼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듀나의 소설에서 우리는 장르소설 특유의 관점으로 현실을 포착하고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사유의 민첩한 움직임에 동참하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장르적인 동시에 문학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지금 듀나의 소설은 재현의 한계에 부딪힌 우리 시대와 우리 문학이 장르적 상상력을 통해 어떤 출구를 모색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인상적인 예로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같은 쪽)

에 이르면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고,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왜 대중문학-장르소설-SF를 리얼리즘의 올가미로 옭아매려고 그렇게 안달인지 모르겠군요. 그래야 가지고 논해도 누가 뭐랄 수 없는 무게감 있는 문학이 되니까?

한국에서 왜 SF가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왜 SF가 문단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지는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루한 교조적 리얼리즘과 시대착오적인 유교적 체면주의 때문이겠지요. (SF가 왜 대중이나 문단의 관심을 받아야 하는지는 여기서는 차치합시다. 기본적으로 alt. SF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그런 관점은 결국 자의적인 색안경에 불과합니다. 듀나가 현재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SF 작가라는 건 alt. SF도 인정합니다만, 박진式 리얼리즘적 문학관으로는 형편없는 평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무리하게 ‘(듀나를)읽는다는 건, 직접 해보니 정말 근사한 일이었다’는 식으로 하악대는 건 상대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 욕망의 투영 대상으로만 보는 수단화/도구화에 부과할 뿐이겠지요.)

듀나의 소설은 결코 ‘우리를 둘러싼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같은 쪽)’지 않습니다. ‘현실을 포착하고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사유의 민첩한 움직임(같은 쪽)’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제대로 된 리얼리즘 소설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의 피상적인 측면이 아니라 본질적인 측면을,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언어로 형상화시켜 독자에게 사회 현실의 구조적인 모순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입니다.

‘심지어 이명박도 있었다. 목동에 산다는 그 40대의 전업주부는 이명박 얼굴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올 때마다 그 위에 물음표가 둥둥 떠 있는 걸 본다고 했다. 몇몇 사람들이 물음표가 이명박에겐 과분한 문장기호가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고 그 때문에 싸움이 날 뻔했다'(26~27쪽)거나 ‘침략 초기엔 침략자들의 청와대 습격과 같은 사건들에 필요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윤활유로 쓸 피하지방이 필요했던 것 뿐이었다.'(155쪽)고 해서 듀나가 정치적이라는 건 설마, 그리고 물론 아니겠지요. 물론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가 듀나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SF 중 하나겠지만 그건 결코 ‘듀나가 SF적으로 조형해낸 북한의 모습은 그 어떤 리얼리즘적 재현보다 통렬하고 적실하다. 이 소설에서 북한은 온갖 우주병들이 폭발적으로 번져가는 재앙의 땅으로 묘사돼 있다. 이로 인해 북한 정부가 무력화되고 탈북자들이 줄을 잇게 되지만, 아무도 탈북자들을 받아주려 하지 않아 그들 대부분은 국경 지대에서 총에 맞아 죽고 만다'(375쪽)는 점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찌질한 남한 청년 청수가 현재 비열하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남한 사회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희망교회 외계 선교 사역단 2011′(160쪽) 같은 건 바로 그 자화상을 보여주기 위한 열쇠일 뿐입니다.

377쪽~378쪽에서는 뒤늦게 박진 씨도 비슷한 언급을 하지만 아래와 같은 극찬은 너무 허풍스럽죠.

‘그리고 이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통해 놀랍게도 그는 북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SF 소설을 우리 앞에 내놓고 있다. 듀나의 이 과감한 시도는 SF적 상상력으로 한국의 첨예한 정치사회적 상황을 파고들어 도달할 수 있는 비판적 사유의 낯선 지대를 한 번 더 열어젖힌 극적인 장면으로 기억될 만하다'(378쪽)

이건 뭐 복거일과 {파란 달 아래}를 아예 한국 SF 사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거죠. 설마 안 읽었거나 모르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겠죠? 설마? …설마요.)

잠깐, (듀나식 표현에 의하면) ‘좌절한 남자들’에게 관심을 좀 할애해 봅시다. 봉건적 잔재랄 수 있는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의 시대착오적 귀결로서의 찌질한 청년들과 꼴사나운 아저씨들은 아마도 19세기와 20세기, 21세기가 공존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의 한 표상임에는 분명하겠지만, 그것은 단지 출발점일 뿐이지 도착점이 아닙니다.

하지만 듀나의 소설들에서는 청년들이 찌질해지고 아저씨들이 꼴사나워진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다만 청년들의 찌질함과 아저씨들의 꼴사나움만 공격될 뿐입니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아 한나라당에 정권을 준 2008년 대한민국 사회는 그냥 지나치고 지나가는 길에 살포시 청와대를 밟고 갈 뿐이지요.

물론, 듀나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 작품으로 발언해야만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SF는 Socialism Fiction의 약자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앞의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의 서문에서도 살펴보았지만 SF 외부에서 SF에 흑심을관심을 보이는 경우, 특히 주류문단-강단 문학의 시선은 대개 고루한 교훈론적 리얼리즘으로 빠져버리게 되는데, (애초에 SF에 리얼리즘적 관점을 들이댄다는 것부터가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는 두말할 나위 없고) 그래서는 결국 본질은 송두리째 놓치고 지엽적인 부분만 자의적으로 우스꽝스럽게 과대평가하게 될 뿐이라는 겁니다.

유교적 엄숙주의를 탓하며 허수아비를 불태울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제대로 된 모더니티도 없는 사회에서 근대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SF를 읽을 줄 모른다고 비웃는 것도 근대 문학론으로 SF를 읽겠다고 덤비는 얼치기들 만큼이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나을까요? 과학기술 창작문예 이래 여기저기 대중소설 관련 공모전에서 많이 얼굴 비추시는 서울대 김성곤 교수도 결국은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문예사조사적 문맥에서 소설-문학에서 그동안 외면받았던 타자로서의 대중 문학-장르 소설을 바라보는 것이지, 결코 장르 소설-SF 고유의 문맥에서 장르 소설-SF를 중심부에 놓고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한국처럼 고귀하신 상류층 양반 문학과 하류 천민 불가촉 장르소설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착각하지는 않는 영미 문학의 특성상 김성곤 교수 쪽이 보다 유연하고 장르 친화적인 건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만, 궁극적으로 학자들-비평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의미이지 재미가 아닙니다. 인터넷 유행어를 패러디하자면

“의미 따위는 장식일 뿐이에요. 상아탑에 계신 분들은 그걸 모른다니까요.”

랄까, 아니면

“그러니 우리는 평론가를 멀리하고 팬질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

랄까요.

SF는 재미로 읽는 거지 공부하려고 읽는 것이 아닙니다. 즐기면 되는 걸 가르쳐주겠답시고 덤벼드는 사람들은 필요도 없고 쓸모도 없습니다.

3.

참고로 장르 내부의 목소리를 들어보죠. 프레시안에 기고된 서울 SF 아카이브 대표 박상준 씨의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의 서평입니다.

‘UFO는 차라리 한 편의 시다!’ (프레시안 books 2011.02.11)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의 경우에도 김상훈 씨나 홍인기 씨의 글이 실렸으면 어땠을까 싶군요. (박상준 씨는 이미 {나비전쟁}과 {면세구역}의 권말에 글을 실은 바 있지만 둘 다 분량부터가 빈약했고, 내용 면에서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죠.) 김상훈 씨는 지금까지 국내 SF에 대해서는 김보영 씨의 {멀리 가는 이야기}에 권말 해설을 쓴 것이 유일한 듯 한데, 그러고 보면 (요즘은 아니지만 예전에) ‘SF 평론가’라고 타이틀을 달았던 것이 무색합니다. 홍인기 씨는 예전 ‘이매진’ 시절까지는 활발했었는데 근래에는 배명훈 씨의 {타워}에 대해 개인 블로그에 짧은 감상을 남긴 것 외에는 들리는 바가 없고요. alt. SF는 양적 측면에서는 고장원 씨가, 질적 측면에서는 홍인기 씨가 SF 내부의 목소리로는 각각 유일무이한 칼럼니스트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장원 씨는 질적인 측면에서, 홍인기 씨는 양적인 측면에서 너무 부족함이 많으니, 다시 한 번 패러디하자면,

“그러니 우리는 평론가들을 모두 멀리하고 블로깅을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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