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에 로버트 하인라인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복거일이 있습니다. 작품을 이야기할 때 작가의 정치적 관점을 빼놓기 힘들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alt. SF에서는 이제 그 힘든 과제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2.

한국의 SF작가들은 진화론보다는 자연발생설로 설명하는 게 적절할 듯 싶습니다. 서로 별 영향도 없으면서 대략 십 년 단위로 새로운 작가/작가군이 출현합니다. 그래도 90년대의 듀나와 2000년대의 작가들 사이에 우격다짐으로라도 엮어볼 여지가 있다면, 80년대의 복거일과 이후 작가들 사이에는 줄을 연결해볼 고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3.

한국의 SF판이, 기후 변화로 황폐해진 대지 위를 운좋게도/혹은 운 나쁘게도 살아남은 조그만 육식공룡 새끼 몇이, 굶어죽지 않았을 초식공룡 몇 마리를 찾아 하염없이 헤매는 중생대 최후의 한 순간이라면, 복거일은 그 옆 호수에서 가끔 머리를 내밀며 유유히 헤엄치는 장경룡입니다.

4.

alt.SF의 이번 호 특집은 ‘네스호의 괴물’입니다.

5.

‘물에 헹군 면도날을 다시 넣고 면도기를 잠근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는 세면기에 물을 받아 턱과 볼에 묻은 거품을 씻었다.’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산문은 한국 SF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기념비의 첫구절입니다. (기념비의 이름이 묘비를 연상시킨다는 점은 상당히 아이러니컬합니다.)

비명을 찾아서 {비명을 찾아서} : 1987년 3월 20일 초판 인쇄

만약 작가의 역량이 일정량의 법칙을 따른다면, 복거일은 이 데뷔작에서 한정된 자신의 역량 중에서 90%를 이미 사용해버렸습니다. (재미로 계속 따져본다면, 나머지 10% 중 9%를 {역사 속의 나그네}로 소진하고, 0.9%로 {파란 달 아래}를 건지고, 0.09%로 {애틋함의 로마}, 나머지 0.01%를 사이좋게 나눠서 {목성 잠언집}과 {그라운드 제로}에 꼬라박았다고나?)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반 주류 문학이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경지를 SF의 힘으로 성큼 성취해버린 걸작입니다. 이 소설은 대체역사소설의 기법으로 일제 강점기가 계속 진행된 80년대 후반 한반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전체가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 치밀한 재구성을 통해 실제 신군부 독재하의 80년대 후반 한국 현실 사회가 통렬하게 비판됩니다. 그리고 단순히 비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소시민의 각성과 고민, 현실 참여를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주인공이 화이트칼라ㅡ중소기업 과장이라는 한계로, 민중이 타자화된 부분이나, 결말의 현실참여가 소극적 혹은 관념적 혹은 도피적이라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다수의 주동 인물이 등장할 수 있는 대하 소설이 아닌 바에야 주인공의 계급은 불가피한 한계 속에서 아주 효율적인 선택이었다는 두둔도 가능합니다.)

걸작이 천·지·인 삼재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빚어진다면, 이 작품은 독재 개발도상국이라는 당시 한국의 사회 현실과 역사적 체험, 은행과 무역회사 등을 두루 거친 작가의 체험과 SF에 대한 안목, 참신한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를 수준 높게 형상화해낼 수 있었던 노력과 의지, 시간적 여유가 드물게 모두 모여 빚어진 걸작입니다. 그 이후의 SF 내외의 창작 실적이 어땠든지, 작가의 정치적 견해와 실천 행동이 어땠든지 복거일은 이 한 편의 장편소설만으로도 한국 SF사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소설사에서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커다란 발자국으로 남을 것입니다.

6.

   {역사 속의 나그네} : (단행본)1991년 11월부터 현재표류중진행형

완결된다면 아마도 SF적 성취는 조금 뒤질지 몰라도 문학적 성취는 {비명을 찾아서}에 비길 만한ㅡ{비명을 찾아서}가 걸작이라면 {역사 속의 나그네}는 대작이라고나ㅡ작품이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그 불확실한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입니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 시대에 불시착한 2077년의 과학잡지 기자가 왜군의 침공 전에 전근대 조선에서 근대화 개혁을 시도한다는 줄거리는 자유주의 논객으로서의 저자의 정치적 관점이 시간여행 SF의 틀을 빌려 대체역사소설로 개화한다는 점에서 저자 개인에게나 SF계로서나 매력적이고 야심찬 기획인데 그 스케일에 걸맞는 안정적인 발표 매체를 찾지 못해(처음 일간지 연재분(‘중앙경제신문’ : 1부~8부) 3권의 단행본으로 정리된 이후 웹신문(‘사이언스 타임스’ : 9~11부)이나 월간지(‘판타스틱’ : 12부) 등을 통해 연재가 재개될 때까지 너무 오랜 공백기를 거친데다가 이후 연재분들은 단행본으로 정리되지도 못한 상태이고, 이후 연재 지면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좌초되었습니다. 한국 대하소설들이 대개 신문 연재를 통해 안정적 지면을 확보하고, 이후 단행본으로 쉽게 연계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신문 연재 소설 시대의 끝무렵에 등장한 이 소설은 결국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셈. 어쩌면 저자의 치밀하고 꼼꼼한 스타일이 작품의 거대한 배경 스케일을 너무 미시적인 관점에서 지나치게 느린 속도로 풀어나간 탓도 있을 것이나, 이 작품의 성과 또한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니 결국은 하늘을 탓할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혹은 논객으로서 필력과 시간, 지면 등의 모든 자원을 낭비소모해버린 저자를 탓할 수도 있겠지만,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정치적인 부분은 일단은 넘어갑시다.)

7.

(전략) ‘연재를 시작하며’에서 밝혔듯이, 이 작품은 과학소설로 구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배경이 된 시공이 우리가 사는 시공과 크게 다르다는 사정 때문에 과학소설의 모습을 많이 띄게 되었습니다. (304쪽, 권말의 ‘작가로부터의 편지’에서)

 {파란 달 아래} : 1992년 11월 25일 초판 발행

복거일의 작품 세계를 망가지기 전의 전기와 망가진 뒤의 후기로 나눈다면, 이제 전기 최후의 작품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작가의 정치적 견해가 창작에서 작품을 제껴버리고 전면에 나설 정도로 심각하게 외곬으로 치닫지 않았고, 덕분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어떻든) 상식적인 독자라면 눈쌀을 찌푸리지 않고 읽을 수 있는 SF입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는 상식적인 수준이며, 그 폐해까지 잊지 않음으로써 그럭저럭 균형잡혀 있습니다. 다만 상기 인용문에서 작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지만, 정치적 주제와 SF적 소재 사이의 관계, 갈등의 상승과 하강에 개입되는 과학적 요소의 함률(含率) 등에서 순도 높은 SF는 아니며, 요즘 말로 하자면 경계 소설적 위치에 놓여 있는 작품이라고 해야할 듯 합니다. (논지에서 잠시 벗어나 작품 단평의 마무리로 언급하자면, 그러나 작품 전반에 걸쳐 속삭여지는, 달 너머 바깥 우주를 향한 순수한 감성ㅡ아서 클라크류의 정통 SF의 아우라를 불러일으키는ㅡ은 감동적입니다. 특히나 이 감성이 한국 SF에서 제대로 체현된 적이 드물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작품의 SF적 의의가 결코 적은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여기에서 ‘복거일 SF’ 혹은 ‘복거일 문학’의 이후 몰락의 단초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란 달 아래} 이후로는 94년의 非SF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을 제외하면 문예 창작보다는 정치/사회 비평에 힘을 쏟기 시작하고, 이는 특히나 신한국당 정권의 종말을 전후로 활발해집니다. SF를 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 다른 시간-공간을 이야기하기 위해 SF의 틀을 빌리는 것. 왜 SF의 틀을 빌릴까요? 지금과 다른 시간-공간을 통해서 결국은 지금-여기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곧바로 지금-여기를 이야기하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거죠. 즉, 겉으로는 SF의 형식을 빌린 {목성 잠언집}이나 {그라운드 제로} 역시 {파란 달 아래}에서 이어지는 복거일 SF라기보다는 ‘자유기업센터(CFE)’ 등을 통해 내놓은 정치 팜플렛의 연장선에 놓아야 할 듯 합니다.

8.

서글픔의 물결이 시리게 가슴의 벽을 씻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마다 서글픔이 어렸다. 내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것들에도 서글픔이 배어 있었다. 모든 자취들에. 자취조차 없는 것들에 서글픔은 어렸다. (22쪽)

  {애틋함의 로마} : 2008년 8월 29일.

(단편집의 성격상 수록작들의 실제 집필 시기는 보다 이전으로 소급되겠지만) 분노라는 원색적인 감정 섞인 정치 구호에서 서글픔의 순수 서정으로 되돌아온 작품집이 한나라당 정권의 시작과 겹쳐진다는 점은 아무래도 의미심장합니다. 즉,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펼쳤다고 하더라도, 수구꼴통극우 세력이 중도보수를 자처하고 중도보수부터 죄다 빨갱이좌파로 몰리고, 정작 실제 좌파들은 아예 아웃 오브 안중이 된 안습한 현실 속에서) 작가는 ‘어설픈 좌파 정권이 가정을 무너뜨리고 사회를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국민들을 선동하여 잘못된 길로 이끄는 90년대 후반-2000년대 전반에는 세태에 개탄한 나머지 지식인으로서의 소명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준엄하게 일갈하는데 바쁜 나머지 잠시 문학적 소임을 접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며, 문학 특유의 완곡하고 우회적인 방법론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주제 의식에 천착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정감과 정신적 여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그 이전-이후의 정의롭고 명랑한 사회, 국격이 드높아지는 시기에는 빛나는 작품들을 쓸 수 있었다고나.

그렇다고 {애틋함의 로마}에 수록된 작품들이 {비명을 찾아서}부터 {파란 달 아래}까지의 전반기 SF적 성취에 비할만 한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주제와 플롯, 갈등의 심도에 있어서 모두 소품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후 세대인 듀나, 김보영 등이 이미 성취한 단편 SF로서의 수준에 미흡한 것이 사실입니다. 좋게 이야기하더라도, 고색창연합니다. 게다가 [대통령의 이틀], [우리가 걷지 않은 길] 등의 수록작을 보면 현실 정치에서 아주 빠져나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상대적인 겁니다, 이전의 두 헬-메이드 사이비 SF에 비하자면.

9.

그러나 우리 사회의 유화 정책이 단 몇 해 만에 이리도 큰 재앙을 부를 줄은 당시엔 예감하지 못했다. 그 동안 일어난 일들을 되돌릴 길은 없다. 한번 태어나면, 악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 속에서도,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은 엄청나다. ({그라운드 제로} 247쪽, 작가 후기에서)

(이거 요즘 얘기 아닙니까?)

   (신이시어, 꼭 이 책들을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나이까?) {목성 잠언집} : 2002년 1월 25일, {그라운드 제로} : 2007년 5월 25일.

복거일이 잊혀진 뒤에는 2000년대를 전후한 듀나의 시도가 오히려 호들갑스런 조명을 받았지만, 사실 {비명을 찾아서}에서부터 {파란 달 아래}까지 복거일 SF의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는 한국 장르소설의 한 전범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배경에서 제재, 주제, 인물과 갈등, 사건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모든 요소가 한국의, 한국에 의한, 한국에 관한 SF로서 한국 이름을 지닌 한국인이 한국의 문제를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찬란하게 선보였던 작가는, 그러나 90년대 후반-2000년대 전반, 어설프고 어리석은 좌파 포퓰리즘 정부의 행태에 평정심을 잃은 나머지 자신이 이전에 이룬 모든 성취를 무너뜨리고 올리버 리스먼, 줄리앙 펠레티에, 후앙 도밍고. 유진 모리스, 티모시 골드슈타인 같은 국적 없는 인명들에 개니미드, 카운디스 같은 버터 잔뜩 처바른 지명(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Ganymede의 우리말 표제어는 가니메데입니다)을 동원해서 당시 대통령을 열렬히 깝니다. (여당을 까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집요하게 대통령 둘만 깝니다)

진보 진영의 설익은 참여 문학이 그랬듯이, 위의 두 책은 독자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상식적인 문학 독자라면 불쾌감 속에 고개를 저을 것이 분명합니다. 소설의 형식을 뒤집어 쓴 정치 프로파간다일 뿐이며, 표현의 자유가 현저히 위축된 지금에 비하면 훨씬 자유로웠던 당시, 우화의 탈을 굳이 뒤집어쓰며 순교자연하는 자세를 취한 것은 아무래도 기만적입니다.

{목성 잠언집}의 서두에는 하인라인을 떠올리게 하는 나름의 미래사 연표가 제시되어 있고, 후반의 잠언과 배경 일화 중에는 로봇을 중심으로 종교 등 인간성에 대한 고찰을 제기하는 부분들이 들어있고, {그라운드 제로}의 마지막 3막은 후에 {애틋함의 로마}에 동명의 단편으로 수정후 수록된 바 있지만, 두 책 모두 SF 팬진인 alt. SF에서 다루기에는 부적당한 非SF들입니다.

10.

그러나 2011년 2월 현재, {목성 잠언집}과 {그라운드 제로}는 복거일의 과거이며, {애틋함의 로마}가 복거일의 현재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앞으로도 작가에게 정신적 여유를 선사할 우파 정권의 행진이 계속될 것이 유력하다는 서글픈 현실을 고려해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만년의 복거일이 써낼 작품들은 기대해볼 만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복거일이 현재 국내에서 가장 단정한 산문을 구사하는 작가 중 하나라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점은 SF로 다시 돌아온 {애틋함의 로마}에서 뿐아니라 심지어, {목성 잠언록}이나 {그라운드 제로}에서까지 뚜렷이 드러납니다. 그 문체로 원색적인 정권 비난을 하는 걸 보자면 좋은 실내악단이 뽕짝 연주하는 것 듣는 것만큼이나 기괴한 느낌이 듭니다. 물론 단정한 만큼 단조롭다는 반론도 제시할 수는 있습니다. 대부분의 문장이 종속절+쉼표+주절로 구성되어 단정하고 논리적인 느낌을 주지만 문장 구조의 변화가 적어 단조롭습니다. 인물(혹은 로봇)들의 대사도 마치 영문 직역처럼 대개 “호칭어+쉼표+문장”으로 구성된 점도 마찬가지고요.

어쨌거나 다소 단조롭더라도, 단아한 문장에 노작가의 원숙한 시선이 담긴다면, 한국 SF를 일신하거나 혁신할 수는 없더라도ㅡ그건 이미 데뷔작으로 충분히 해냈습니다ㅡ한국 창작 SF계의 풍요로움에 큰 기여가 될 것입니다.

11.

(아니, 그러니까 원숙한 시선이요. 편향된 시선말고.)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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