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 SF에서 대충 골라낸 2010년에 출간된 SF들은 그럭저럭 다음과 같습니다.

  필립 딕, {유빅}
  로저 젤라즈니, {집행인의 귀향}
  로저 젤라즈니, {드림마스터}
  필립 리브, {모털 엔진}
  레이 브래드버리, {일러스트레이티드 맨}
  이언 뱅크스, {대수학자}
  로버트 하인라인, {코벤트리}
  김보영, {멀리 가는 이야기}
  김보영, {진화신화}
  츠츠이 야스다카, {최악의 외계인}
  필립 리브, {사냥꾼의 현상금}
  어슐러 르귄, {하늘의 물레}
  아서 클라크 외, {SF 명예의 전당-전설의 밤}
  존 스칼지, {유령여단}
  레이 브래드버리, {화성 연대기}
  레이 브래드버리 외, {SF 명예의 전당2-화성의 오딧세이}
  카렐 차페크, {도롱뇽과의 전쟁}
  올슨 스콧 카드, {엔더의 그림자}

인터넷 서점 등의 분류 기준에 따르면 이보다 좀더 많은 책들이 SF로 분류되어 있지만, 어디까지나 영세하고 보잘것없는 1인 웹진인 alt. SF의 기준으로는 대충 이 정도 추려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내 단편선들은 SF가 아닌 작품들이 섞여있는 경우가 많아 어쩔 수 없이 제외했고… 어쨌거나 이 17 종의 SF들 중에서 2010년의 최고의 SF를 꼽자면,

…꼽기가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일단 여러 작가들이 한데 묶인 단편선이나 같은 작가라도 어느 한 작품을 꼽기도 애매하고 작품 간 편차도 있는 단편집은 일차로 제외해본다고 해도…

5위 : 막상 말은 그렇게 했어도 둘 다 단편집입니다. -_-

  

이런 자리에서 재간된 책은 빼는 게 예의겠지만,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는 오히려 빼는 게 무례할 듯 하군요. 윤동주의 [서시]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밤하늘과 별은 언제나 인류의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주요 서정적 소재 중 하나였습니다. 이 시적 감수성이 다시 지구를 돌아봤을 때, 그것도 공허한 이념 대립과 핵전쟁의 공포에 짓눌린 냉전 시기의 세상을 바라봤을 때 치솟는 것은 경멸과 환멸이며, 그 순수한 구토감이 연작소설들 전편의 바탕에 멜랑콜리하게 깔려 있습니다.

김보영 씨의 두 중단편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쪽은 브래드버리의 투명하고 가벼운 서정에 비해 단정하고 빈틈없이 짜여진 서사로 독자의 감탄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냅니다. 시대의 차이에 기인한 바이겠지만, 기본적으로레이 브래드버리가 코드화된 클리셰들에 기반했다면 김보영 씨는 간결하면서도 코드 이상의 충실한 논리적 상상력을 선보였습니다.

4위 : 이제 겨우 중편으로 올라서는군요. -_-

 

젤라즈니의 작품 세계를 두 마디의 수식어+피수식어로 요약하라면 어쩔 수 없이 현학적 활극이라고 할 수 밖에 없지만, 2010년 벽두에 한국에 소개된 이 중편은 지금까지의 젤라즈니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인간적 면모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인공부터가 불사신 아니면 초인, 혹은 둘 다였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쪽은 지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단련이 되었지만 결국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과거 한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중앙집권적 시스템의 바깥에 놓였다는, 그래서 외적-형식적 정체성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젤라즈니 특유의 트릭스터적 요소를 갖추고는 있지만, 그래도 결국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평범한 인간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ㅡ특히나 기독교적 의미에서ㅡ로봇이 오해와 편견의 베일을 벗고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바라봅니다. 주인공이 초인의 무게를 내려놓고 인간의 자리로 내려왔기 때문일까요, 서술 시점의 전복을 통해 제시되는 결말의 반전은 젤라즈니에게서 볼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따뜻하고 감동적인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3위 : 남은 셋은 장편입니다.

 

2010년도 SF 출간 목록을 정리해보기 전에는 이언 M. 뱅크스의  장편을  당연히 1순위로 꼽게될 줄로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1위로 올리기는 힘들군요. 여러 모로 근사한 도입부의 매력을 조금 살펴봅시다. 19쪽의 “루시퍼러스 대수도원장은 레세움9 IV의 스타블링 컬트의 전사 사제이자, 117개 행성계들과 주민들이 사는 40여 개 행성과 수많은 주요 인공 고정식 거주지, 민간 주력함 수십만 척의 실질적 통치자였으며, 제468포위 함대(파견대)의 위장 날개 비행 대대의 행정 대제독이었다.”라는 문장 하나. 조연급 인물에 대해 신조어 섞인 허풍당당한 직함들을 시시콜콜하게 늘어놓고 있습니다. 수도원장이라는 단어와 행정대제독이라는 단어 사이의 불협화음을 전사 사제라는 표현이 매끄럽게 이어나가며 인류가 적어도 117개 이상의 행성계의 40여개 행성에 흩어져 사는, 수십만 척 이상의 우주선이 400여 개 이상의 함대로 구성되는 거대한 우주의 일부분을 살짝 엿보여줍니다. 전형적인 스페이스오페라의 세계관입니다. 세 번 이어진 겹문장 하나만으로도 머리 한쪽이 펑 뚤리며 상상력 회로가 예열되기 시작하고, 수도원장의 외양 묘사와, 자객과의 짧은 면담이 이어지면서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독자의 모든 주의를 한 순간에 휘어잡습니다. 30쪽 이후 남은 330 여쪽과 고스란히 남은 2권 내내, 독자는 코 꿰인 소처럼 순순히 작가의 손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언 뱅크스의 상상력은 로코코 건축을 연상시킵니다. 화려하고 퇴폐적입니다. 그의 시선은 조금 삐딱한데, 국내에 소개된 두 장편 소설 모두 일종의 변절자, 배반자들이 주류적 가치에 반기를 드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또한 화려하고 퇴폐적인 상상력과 잘 어우러져 취향에 맞는 독자에게는 근사한 만족감을 안겨 줍니다. 

2위 : 없습니다.

1위 : 그러니까 공동 1위인 겁니다…

 

둘 중에 어느 작품을 더 나중에 꼽아야할지 도무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건 르귄이 필립 딕의 영역으로 들어온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능력으로 세계 전체가 뒤바뀌는 혼란에 휘말린 무기력한 소시민 주인공이란 너무도 필립 딕스러운 상황과 인물들인데, 르귄의 펜으로 다뤄지니 르귄 특유의 차분한 어조와 관조하는 시선, 그리고 (서양인의 한계가 있지만) 노장 철학의 깊이까지 더해져서 {하늘의 물레}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고 우아한 SF가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유빅}은 가장 필립 딕스러운 (안 그런 작품이 딕에게 있겠는가마는) 작품입니다. 그 독특한 작품 세계는 딕 자신에게는 일종의 질환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필록테테스처럼, 질병은 고통과 함께 그에게 가장 독창적인 상상력과 시대를 영원히 뛰어넘는 불멸의 비전을 주었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초현실적 장례식장, 펄프 SF에나 나올 법한 엉성한 달 기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초능력들, 시간 퇴행이라는 기괴한 현상과 그것을 저지할 수 있다는 정체불명의 약품,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들. 이 기괴하고 조잡한 도구들을 가지고 딕은 인생과 구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저주받은 눈먼 예언자를 둘러싼 사람들처럼 우리 독자들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홀린 듯이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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