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ff-line

 {엔더의 그림자} 올슨 스콧 카드, 나선숙 역, 루비박스

좋은 작품은 속편도 좋고 우려먹기도 좋습니다. 올슨 스콧 카드의 플롯은 너무 작가의 의도대로만 짜맞춰진 나머지 굉장히 경직되어 있고, 배경과 설정은 작위적인 냄새가 지독합니다. {엔더의 게임}이 흥미로운 점은, 소설 속 주요 사건들이 게임의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오히려 경직된 플롯과 작위적인 배경 설정이 거부감 없이, 효과적으로, 충실하게, 작가의 의도ㅡ절정의 반전을 구현한다는 것입니다. 올슨 스콧 카드는 놀이 동산의 이야기꾼입니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빈이 전투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지구의 로테르담 거리는 빈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너무 작위적이고 인공적으로 꾸며진 나머지 현실성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고 모든 등장인물들이 공업용 로봇처럼 혹은 단지 톱니바퀴인 것처럼 단조롭고 공허하게 돌아갑니다. 이런 배경은 오히려 빈의 천재성을 미심쩍게 만듭니다. 그러나 빈이 오로지 빈을 위한(굳이 덧붙이자면 빈과 엔더만을 위한) 철저히 인공적인 공간인  전투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빈의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 경직되어 비명지르던 플롯은 활기를 띠고 매끄럽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장편의 재미는 결코 순수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엔더의 그림자 아래에서만 어둡고 매혹적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이 장편을 읽고나서 {엔더의 게임}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지 않는 독자는 거의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 on-line

 [연애소설 읽는 로봇] 이재만, 크로스로드 12월-1월호

웹진 크로스로드에 올라오는 SF들 중에서 1, 2부 등으로 나뉘어 올라오는 중편들이 좋았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국 장르소설계의 특징 중 하나가 장편 분야만 기형적으로 비대하고 단편 분야는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조금 나아졌다고 해도) 미약하다는 점이라면, 장편과 단편 중간에 끼인 중편의 경우에는 미약이라는 말은 오히려 호사스러울 정도로 멸종 직전인 상태입니다. 중편은 단지 짧은 장편 혹은 좀 늘어진 단편에 불과할까요? 지금까지 크로스로드에 올라온 중편들은 대개 분량을 1/4 정도로 줄여도 무리가 없는, 질질 늘어진 단편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메인 플롯이 골다공증에 가깝게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데 비해 달라붙은 서브 플롯 혹은 파편적 에피소드들이 탄탄해서 읽을 맛이 납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화자의 참전 경험 회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안드로이드가 오작동한다.’ 부사어+관형어/서술어+주어+서술어의 단순한 겹문장 하나로 요약될 수 있는 메인 플롯은 너무 상투적이며, 불필요하게 안드로이드의 나체씬을 강조하는 세미 포르노적 서술({공각기동대}의 영향?)은 글의 품격을 많이 깎아먹습니다. 문제 해결 과정이나 결말도 너무 평면적이고 단조로워서 그다지 SF로 볼 만한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작가가 밀리터리 SF를 쓴다면 재미있을 듯 합니다.

 [상아 처녀] 김철곤,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문학 2010.12.09

[연애소설 읽는 로봇]이 걸작으로 보일 정도로 멍청한 소설입니다. 남자 주인공은 찌질하기 이를 데 없는, 어른이 되지 못한 중2병 환자이며 여자 주인공은 연민이나 이해 가능성이 0으로 수렴하는, 진절머리 나는 정신지체 장애인입니다. ([백치 아다다]를 연상시키는 여자 주인공의 대사들은 짜증나기 이를데 없습니다.)

“자네 이게 얼마짜리 프로젝트인지 알기는 하나? 말도 안 되는 사고나 일으키고. 뭐, 이제라도 돌아와 다행이지만. 이 일은 절대로 비밀이네. 책임은 묻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쓸데없는 생각 말아.”

얼마짜리 프로젝트이길래 프로젝트 결과물을 들고 도망쳤는데도 책임을 묻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사건들 사이에 최소한의 개연성도 없고, 가장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설정도 없으며 자의식 과잉의 사춘기 소년의 정서만 팽배합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땅을 밟아 본 적이 없다. 입으로 말을 한 적도, 고기를 씹은 적도, 고민을 한 적도, 행복을 원한 적도 없다. 그녀는 인간과 열대어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했다.

같은 시적인 문장은 근사했지만 제목이라든가 모티프, 서두의 인용문 등으로 의도했던 신화적 분위기는 결코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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