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내에 젤라즈니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93년 7월 29일. 그러니까 {신들의 사회}의 출간이 그 시작이었다. 필자가 국내 SF 팬덤 중 일부와 처음 접촉한 것이 90년대 말이었으므로, 출간 당시 {신들의 사회}가 국내 SF팬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기억하는 올드팬이 있으시다면 덧글에 한 말씀 남겨주시길) 개인적인 충격과 감동에 대해서는 술회하지 않겠다. (신문 하단에 책광고까지 실렸던 것이 기억나는데, 사실 론 허버드의 {B.E.}나 프랭크 허버트의 {듄}도 신문 광고로 나왔던 시절이었으니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객관적인 자료를 따라가보자면, 이듬해인 94년 10월에 출간된 서울창작의 SF단편선집 {코스믹러브}에 젤라즈니의 단편 두 편이나 수록되었다. 당시 젤라즈니에 대한 국내 SF계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간접 증거가 아닐까.

국내 SF 독자들에게 젤라즈니가 준 충격은 {신들의 사회}의 (신문 광고에도 쓰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뒷표지 작가 소개에 사용된 ‘문과계 SF’ 혹은 ‘소프트SF’라는 표현으로 집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를 아시모프의 대척점에 세운 대담함도 인상적이거니와, (로버트 스콜즈의 SF 평론서 {SF의 이해}가 93년 3월에 출간되었다고는 해도) SF에 대한 담론이 거의 전무했던 당시 상황에서 영미 SF의 역사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젤라즈니의 우월함을 도저하게 논하는, 장장 아홉 쪽에 이르는 (게다가 본문과 달리 9포인트 미만의 잔글씨다) 김상훈 씨의 권말 해설의 위력은 그야말로 ‘지금까지의 SF는 잊어라!’라는 표현이 적절할, 아이디어 위주의 딱딱한 SFㅡ문외한들에게 대개 현실도피성 대중적 상업 오락물로 비판 받는ㅡ에서 뭔가 있어보이는ㅡ지적이고 진지해보이는 문학으로서의 부드럽고 우아한ㅡSF로, 장르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의 급진적인 변혁을 몰고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이전에도 문체/감성 측면에서는 브래드버리가, 나레이션/스토리텔링 측면에서는 하인라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젤라즈니 특유의 현학성이 인식의 변환을 촉발하는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였으리라)

2.
젤라즈니에게 마초라는 꼬리표가 붙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95년 5월, 무려 세 자릿수의 호기로운 시리즈 넘버의 첫 발자욱을 내딛은 {내 이름은 콘라드}의 출간이 국내 SF팬들의 젤라즈니에 대한 평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역시 필자로서는 다룰 수 없는 영역이다. 일방적인 찬사가 한풀 꺾이고 약간은 애정섞인 비웃음이 본격화되는 것은 아무래도 2005년에 출간된 {저주받은 자, 딜비쉬}로 기억되지만, 마초이즘에 대한 비판은 그보다도 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듯 하다. 99년 2월에 발간된 “앰버 시리즈” 첫 권 {앰버의 아홉 왕자}의 권말 해설에서 역자 김상훈 씨는 {신들의 사회}와 {내 이름은 콘라드}의 권말 해설에 필적하는, 영미 팬터지 장르 전반에 대한 방대하고 깊이 있는 지식을 현란한 말솜씨로 과시하며 젤라즈니를 다시 한 번 SF와 팬터지를 아우르는 거장으로 자리매김시켰지만, 2001년 9월 29일자 조선일보의 ‘성 밖에서’ 코너에서 전 ‘이매진’ 편집장 우지연/진산 씨는 이미 젤라즈니를 우러러보기보다는 명과 암, 업적과 한계 모두를 인정하는 애정어린 놀림 섞인 어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칼럼 제목이 ‘스릴러?…팬터지?…사랑스런 사기꾼!’이었다)

“앰버 연대기”에서까지 보여주었던 현학적이고 지적인, 시니컬하면서도 현란하고 화려한 면모와 달리 기존의 장르 팬터지의 흥미와 재미에 치중한 {저주받은 자, 딜비쉬}가 기존의 젤라즈니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작품 자체의 내적인 요소 외에도 이미 팬과 팬덤, 독자들을 둘러싼 전반적인 장르 전체에 대한 팬들의 인식이 2000년을 경계로 크게 바뀐 것도 무관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2000년 2월에 출간된, 저 악명 높은 {리보위츠를 위한 찬송 1, 2}를 기점으로 2001년 5월의 {추락하는 여인}까지 영광스럽고 찬란하던 그리폰북스 1기도 쇠락하기 시작했지만, {드래곤 라자} 등 국내 판타지들의 상업적 성공에 힘 입어 ‘황금가지’ 등 나름 자본력 있는 메이저급 출판사들마저 그동안 천시하던 장르 소설들ㅡ특히 그나마 쫌 뭐 있어 보이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SF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국내 SF팬들은 이제 끝없는 목마름 속에서 뭐든지ㅡ해적판이든 일어 중역판이든ㅡ무조건 내주기만 해도 감지덕지하던 지난 날의 기억은 이미 아련해지고 번역 질이 어떻고 저떻고, 심지어 표지말고도 제본 방식이나 종이질까지ㅡ이건 2003년 4월 이후의 ‘행복한 책읽기’ 출판사에게 책임이 많은 일이지만ㅡ따져가며 읽기 시작한 것, 그러니까 어느 정도 배가 부른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입맛을 따지기 시작한 것과도 아예 무관하지는 않을 듯.

3.
요컨데, 젤라즈니는 국내 SF팬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장르에 대해 그동안 극복할 수 없었던 외부의ㅡ그리고 내면화되어버린ㅡ비하적 편견에 대해서 당당해질 수 있었던 시기의 아이콘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어느 정도 일반화되면서는 자연스레 과대평가되었던 부분이 거품처럼 꺼져버리며 그 반동으로 마초적이라느니, 판타지가 아니라 무협지라느니 하는 애정 섞인 놀림이 시작된 것일지도. SF에 대한 일반인-문외한 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보기는 아직 역부족인 듯 하지만 (오히려 심형래 이후 오해만 더 늘었을지도) 적어도 SF팬들 사이에서, 어린애나 보는(‘읽는’도 아니다) 것을 좋아한다는 자격지심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며,  그것이 모두 젤라즈니의ㅡ그리고 김상훈 씨의 공로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장르 내적으로는 인터넷 시대로 넘어오며 ‘월간 SF 웹진’과 ‘정크 SF’ 등에서 잠시나마 올드팬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를 꽃 피울 수 있었고, 외적으로는 1세대 판타지 작가들의 인기가 장르 소설 전반에 대한 관심과 흥미로 이어져 판타지 뿐 아니라 SF 소설도 새롭게 조명을 받은 것ㅡ1세대 판타지들은 앞표지 날개의 작가 소개에 (약력이라고 쓸 게 없기도 하니까) 영향 받은 작가 혹은 좋아하는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대개 톨킨과 미하엘 엔데 다음으로는 빅 쓰리 등 SF 작가들이 꼽히곤 했다ㅡ등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젤라즈니의 등장과 시기적으로 비슷한 것은 아무래도 흥미롭다.

종종 김상훈 씨의 번역ㅡ특히 남자 주인공은 평어체를 쓰고 여자 주인공은 높임말을 쓰는 대사 관련ㅡ이 젤라즈니가 마초적이라는 오해를 낳았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젤라즈니의 등장인물들이 남자들은 모두 능동적인 주동 인물인 반면 여자는 능동적일 경우 반동 인물ㅡ흔히 팜므파탈이라고 부르는-이며, 악역이 아닐 경우에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피구조자ㅡ구조자로서의 남성 등장인물에 대해ㅡ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설득력을 잃는다. 작가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과 과, 명과 암을 동시에 짊어지는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초기의 과도한 찬사와 맹목적인 찬양에서 애정어린 놀림을 거쳐서 이제 비로소  젤라즈니는 SF 작가로서 그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 그리고 비단 한 작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SF 장르 전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다 싶다. 90년대 초반까지의 편견어린 비하가,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 반작용으로서의 현학적이고 어찌보면 견강부회적인 추대가 있었다면 다시 거품이 빠지고 있는 지금, 이제 우리는 드디어 SF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SF팬들이 가장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시절 한 줄기 등불이었던 작가는, 어둠이 그치고 동이 트기 시작한 시점에서도 그 가치는 절대 퇴색하지 않고 언제나 누구나 기억하는 이름으로 남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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